[연재01]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소설적 구성의 이재명 의사 평전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1회)
제1부 이재명, 눈을 뜨다
들어가는 말
마침내 노인의 긴 얘기가 끝났다. 얘기를 끝낸 노인은 또 주머니를 부스럭대더니 곰방대와 담배쌈지를 꺼내 든다. 나는 재빨리 목로 위의 내 청자 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어 권해 드리고 성냥불을 켜들었다. 노인은 손사래를 치다 이내 가만히 불을 받는다. 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내뿜으며 검버섯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대폿잔을 기울여 한 모금 마신 뒤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아직 군대도 안 간 나를 두고 마치 친구 대하듯 하면서 이재명 의사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인이 경외롭기까지 하다. 노인은 이야기의 맥이 끊어진다며 술도 담배도 고개 돌려 하지 말고 아예 마음 푹 놓고 그냥 친구거니 하라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은 1975년 12월 동짓날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시내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동네에 들어서자 한 잔만 더 마실 요량으로 간혹 들르는 막걸릿집 유리문을 밀었다. 왕대포로 한 잔 시켜 쭉 한 모금 들이켜고 나서 막 담배를 꺼내 드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목로 한쪽 구석에 앉은 아마도 80은 너끈히 지났을 백발 성성한 노인이 같이 한잔하잔다. 이미 시내에서 친구들과 거나하게 마신 뒤끝이라 딱 한 잔만 마시고 갈 생각인데 아 이런 웬 노인네가 하면서도, 노인답지 않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할 얘기가 있으니 이쪽으로 와서 좀 앉으라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합석을 하게 됐었다. 이 의사는 물론이요, 그의 처 오인성도 내 가슴을 저며댔다.
公無渡河 공무도하
임이시여, 그 강물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 공경도하
임은 기어이 강물을 건너고 마네
墮河而死 타하이사
강물에 휩쓸려서 돌아가시고 마는구나
當奈公何 당내공하
이 일을 어이할꼬, 가신 임을 어이할꼬
이 의사가 교수형을 당하고 오인성이 서럽게 우는 대목에서 나는 고등학교 때 배운 고대 시가 공무도하가를 떠올리며 숨을 죽였었다. 1909~10년이면 노인은 몇 살쯤이었을까. 적어도 80대 중반으로 보였던 노인은 어쩌면 이 의사 부부가 머물던 집 안채의 스무 살쯤이던 아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오인성과 일가붙이거나 그도 아니면 알려지지 않은 이 의사의 동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찌 됐든 노인은 이 의사의 의거 당시 스무 살은 좀 넘었지 싶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노인, 자네만 한 이재명이 운운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 36년 전의 한 노인의 얘기를 토대로, 102년 전의 이재명 의사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 한다.
△오인성 여사(1890~1919)
이야기의 시작
그가 말을 마치고 궐련을 한 대 뽑아 물었다. 한 모금 길게 내뿜는 연기 속에 호롱불이 흔들거린다. 세 사람의 그림자도 덩달아 춤을 춘다. 동짓달 삭풍이 문풍지를 울리며 방문을 한 차례 할퀴고 지나간다. 흐느껴 울던 그녀도 이제는 조용하다.
이재명 의사 부부가 재령에서 올라와 하숙집을 구하는 동안 이동수 동지를 통해서 양해를 구하고 며칠 머물던 집 사랑방이다. 이 의사가 거사를 치르고 붙잡혀간 날 다 저녁에서야, 오인성은 주인집 어른에게서 그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좀 멀긴 하지만 이동수 동지의 친척 어른뻘 되는 사람이다. 궐련을 피우면서 조용히 호흡을 고르던 그가 두 사람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재명이가 아무리 강단져도…여기도 위험할 수밖에 없어…날이 아주 어두워지면 곧 떠나도록 하고…오 선생은 일단 동수랑 같이 평양으로…"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말을 멈추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방문을 바라본다. 피우던 궐련을 화롯불에 던져 넣고 귀를 쫑긋 세웠다. 사립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들린다.
(계속)
작가의 말
이재명 의사의 구구절절 극적인 구체적 거사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숨까지 죽여가며 손에 땀을 쥐었었다. 기억을 더듬다 새삼스레 확인해 본 국사 교과서엔 단 두 줄 뿐, 정말이지 나는 되게 억울했다. 그때부터 소설로 써볼 생각을 했었다.
그 첫 시도가 1982년 11월이었는데, 어딜 가나 늘 두툼한 노트 한 권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끄적대곤 했었다. 김득구 선수가 레이 맨시니 선수와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하고서 국내로 돌아오는 (운구) 광경을 TV로 지켜보던 다방에서조차 탁자 위에는 노트를 펼쳐두고 있을 정도였다.
두 번째 시도는 1987년 봄이었다. 좀 더 정확한 자료를 찾느라 (당시 남산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을 뒤졌었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청계천 헌책방을 열심히 더듬어 다녔었다. 자료는 여전히 빈약했으나 그래도 온갖 상상력을 동원했었다.
그렇게 오래전에 써두었던 습작을, 이제 조금만 다듬어서 올린다는 게 시간이 한참 걸린다. 인터넷을 통해 다시 확인해 본 상당수 자료가 같은 내용을 두고서도 엉뚱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이재명 의사 생년월일 넷, 거사일 둘, 서거일까지 셋일 정도다. (그저 단순한 오류?) 가장 신빙성 높은 자료를 택하여 꿰맞추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그동안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재명 의사 1907년 10월 귀국 이후 1909년 여름까지의 행적과 이 의사 서거 이후의 오인성 여사 행적에 관한 단서도 찾아내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희곡을 염두에 두고 짧게 썼던 게 구성이 달라지고 내용 또한 길어진다. 비슷하긴 해도 조금씩은 다르거나 전혀 다른 수십 개 자료를 반복해 읽어가며, 하나하나 비교 검토해가며 연재를 시작한다. 세 번째 시도다.
2011.09.23(금)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