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03]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1. 11. 19. 07:42

(3회)

 

처음 생각과는 너무나도 다른 현실에 나락에라도 빠진 듯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수길은 1905년 12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하와이 이민은 중단되고 먼저 온 사람들 본토 이주가 서서히 늘면서 귀국하는 사람까지 생길 무렵이었다.

 

해가 설핏해진 느지막한 오후였다. 항상 여름인 이곳 하와이도 12월이 되자 제법 선선해지고 해도 많이 짧아졌다. 오늘은 일요일, 교회 가는 날이다. 하지만 수길은 간밤에 늦게까지 마신 술을 핑계로 그냥 막사에 있었다.

 

여느 일요일 오후 이 시간이면 이웃 막사의 양주은과 함께 아직 교회에 있을 그가 오늘은 팔짱을 낀 채 창밖을 내다보며 우두커니 서서 사람이 와도 모를 만큼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디론가 놀러들 갔는지 같은 방 식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양주은이 교회에서 돌아오는 길로 그를 찾았다.

 

"어! 형님! 일찍 오시네요?"
"응 그래. 근데 어제는 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는가. 몸은 괜찮아?"
"아, 예. 죄송합니다…이쪽으로 앉으시죠."

 

수길이 뒷머리를 긁적이다 얼른 자리를 권했고, 양주은은 침상 위에 걸터앉자마자 들고 있던 가방에서 신문을 꺼내 펼쳐 들었다.

 

"이 신문, 나는 교회에서 다 보긴 했는데, 논설만 내가 잠깐 읽어볼게."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북미 한인 공립협회 기관지 공립신보였다.

 

"대저 신문이란 것은 세상을 밝게 하는 빛이오…모든 부패한 사상과 추악한 습관을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정신으로…본 신보를 공립신보라 칭하는 것은 이 사람도 서고 저 사람도 서서 모든 동포가 한가지로 서고 넘어지는 자가 없기를 바라며…외국에 있는 모든 동포는 본 신문의 본의를 저버리지 말지어다."

 

△공립신보 창간호/1905년 11월 22일 자 1~4면∥공립신보/북미/상항/938 Pacific street./San Francisco. Cal. U.S.A./광무 9년 11월 20일 창간∥광무 9년 11월 22일 1905-11-22 제1호∥창간일과 제1호 발행일이 다르며, 1905-11-22는 누군가 나중에 써넣었다.∥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소리 내어 논설을 다 읽은 양주은이 신문을 건넸다.

 

"우리 한국에내고 학생르치사람 헐버트가 공립회 연설했다도 하고…기사 다 볼 만해…작년에 본 갔던누구냐, 임치정이랑 이교이는 상항지방회 서기라고 하네? 4면에 고를문 가져온 사람 말 들어보니까, 거기서동포 일자소개 해주고 저녁에 학을 열어서 공부도 가르쳐 준대…수길이 자젠 마음 고 본토, 립협회로 가보소."

 

수길이 신문을 읽으며 말을 받았다.

 

"수민원이나 회사나 선교사가 다…한통속이나 진배없었고…여기나 거기나 매일반 미국땅인데…공립협회 가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하긴 그래…그런데 말이야…"

 

그랬었다. 개발사업과 신문화 도입을 위해 하와이 이민이 필요하다는 알렌 공사의 설득에 정부에서는 수민원을 설치하여 장려했고, 하와이 당국에서 파견한 (알렌의 친구 아들) 데쉴러가 동서개발회사를 세워 모집을 주관했는데, 혼자서 가든 권속을 데리고 가든 누구든지 정착을 간절히 원하면 편리하게 주선하고 하와이 제도 내의 모든 섬에 있는 각 학교에서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않는다는 등의 고시를 냈었다. 존스 목사는 한 술 더 떠 천국이나 다름없는 미국을 가는 건 하나님의 축복이라 선전했었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하루 보통 10시간 25일 노동에 월급은 평균 15달러로 하는 일에 비해 터무니없는 저임금이었고, 일할 때는 점심시간 30분 외 쉴 틈이라곤 아예 없었으며, 감독관은 노동자를 채찍으로 다스리며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렀다. 게다가 숙소마저 군대 막사처럼 지은 비좁은 판잣집, 처자식과 함께 온 사람이라도 겨우 방 하나를 배정받았고 독신은 한 칸에 4~10명이었다. 학교공부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한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1900년대 하와이 노동이민 초기 한인 숙소의 모습과 또 다른 숙소의 출입문 앞 계단에 앉아있는 어느 한인 가족들의 모습이다.∥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원본

 

양주은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네처럼 늘 학교 다닐 궁리만 하던 임치정이금, 어디라더라…하여간 지금은 학교 다닌단 말도 들었어. 그래서 해본 생각이 아무래도 공부는 본토로 건너가야 그나마 기회가 있지 싶어, 모르긴 해도…그건 그렇고, 공립협회 총회장 안창호 사람 말이야, 대단한 사람이 귀국할 때 그 양반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어."

 

마침내 두 사람은 이듬해 3월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수길은 공부에 대한 집념으로 새로운 기회를 잡고자 했었고, 양주은은 지긋지긋한 농장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하와이까지 널리 알려진 안창호라는 사람 한번 보고 가자 했었다.

 

수길은 그렇게 안창호를 만나게 되었고, 공립협회는 그의 운명이 되었다. 양주은도 안창호를 만나면서 귀국을 포기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눌러앉았고, 김원택 동포의 농장일 등 기타 남의 일을 조금 더 하다가 웬만큼 돈이 모이자 사업을 벌이게 된다.

 

주은은 이재명 의사 서거 , 하와이에서 찍은 이 의사 사진 '대한의사 이재명군'을 써넣은 사진엽서  기타 사진엽서를 많이 만들었으며, 안중근 장인환 이재명 등, 사진들에 독립문 등의 사진,  그리고 대한민족은…, 대한의사 만세, 부자 되는 비결(상제가), 국민가(윤치호) 등의 쪽지를 하나로 묶어 만든서에는 중근 의사 에 '이 자리는 누가 들었을까 아마'라고 쓴 쪽지를 올려 미주지역 동포들의 애국심을 더욱 고취했다. 또한, 그는 마켓 스트릿에 자리 잡은 찬관(식당) 거의 전액을 수많은 애국지사 독립운동 지원금으로 썼으며, 해 임시정부 요로 군자금을 모아 보낼 때에도 역시 모금을 이끌며 큰 힘을 보탰고 나아가 형편이 어려운 동포들도 많이 도와주었다. 이러한 그의 남다른 애국애족은 광복 후 은퇴할 때까지 계속돼 가난한 유학생은 물론이요, 미국을 일시 방문하에게까지,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학비나 여비를 보태주었다. 그는 그렇게 1981년 8월 30일 만 102세를 일기로 서거할 때까지, 자신의 생활은 늘 뒷전이었다.

 

△1913년 양주은이 안창호에게 보낸 사진엽서∥Mr C H. Aan/232 Perry. st/San Francisco/Cal/안 선생 창호 씨 각하(귀하)…배 양주은 상∥이 주소의 건물은 공립협회가, 1909년 2월 (하와이 한인 24개 단체연합) 합성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1910년 5월 대동보국회가 추가로 참여해 대한인국민회로 한 번 더 도약하자 같은 해 8월 사들인 주택으로, 1914년 12월 다시 팔고 이전할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회관으로 사용했다.∥간단한 안부 인사에 사진에 대한 느낌을 묻는 짧은 내용이지만 서로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상단 돌려쓴 부분-이 사진이 선생 생각에 어찌 되었습니까.∥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다른 동포 열 명과 함께 두 사람은 발걸음도 가볍게 샌프란시스코항 페리 부두에 도착했다. 수길은 그동안 몇 차례 더 교회서 얻은 신문을 양주은과 함께 읽으 음을 굳혔고, 양주은국길에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만 거두절미 써 보낸 자신지에,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안창호의 곡진한 답장에 크게 감동했었다.

 

△공립신보 1906년 3월 12일 자 2면 4단韓人新渡(한인 새로 건너오다) 거(去) 팔일 만주리아 선편에 한인 十二人이 하와이로부터 상항에 도착하여 무사히 하륙하였고 한인 일명은 수삭 전에 시아틀에 하륙하였다가 일작에 상항에 내도하였더라.∥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계속)

 

참고: 韓人新渡는 韓人新到(한인 새로 도착하다) 등과 함께 쓰였으며 아울러 집조(執照/여권) 없이 건너온, 특히 독립운동으로 망명해온 동포를 말할 때도 쓰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검색: 韓人新渡 新渡韓人 韓人新到 學生新渡 新渡學生 同胞新渡 新到同胞(한인신도 신도…신도동포 등 한글검색도 가능)>

 

2011.11.19(토)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