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04]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4회)
△1900년대 당시 하와이의 오아후 섬 남쪽 와이파후에서 북쪽 와이알루아로 가는 오아후철도 협궤열차∥1902년 12월 22일 인천항(제물포항)을 떠난 첫 번째 하와이 노동이민자 121명은 일본에서 신체검사를 두 차례 받고(나가사키와 고베) 19명이 탈락했다. 그리하여 통역관 1명을 포함한 102명이 첫 이민선 '갤릭 호' 선편으로 1903년 1월 13일 오아후 섬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항해 중 발생한 안질 환자 8명이 상륙을 거부당해 가족과 함께 되돌아가고 86명만 상륙했다.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이었다. 대부분 인천 내리교회 신자였으며, 인솔자는 안정수(통역) 장경화(총무) 홍승하(전도사) 등이었다. 이후 1905년 7월까지 65편 이민선이 오아후 빅아일랜드 마우이 카우아이 등지에 7,226명을 실어날랐다. 이민 초기에는 대개 월평균 15달러로 남성은 좀 더 많았고 여성과 미성년은 적었다고 하며 주 6일 하루 10시간 노동에 3년 계약이 보통이었으나, 3년 계약은 곧 유명무실해졌고 임금 또한 조금씩 나아졌다고 한다.∥이미지 출처: ☞원본1/원본2(한국이민사박물관)
수길이 마음을 굳힌데다 양주은이 안창호의 답장까지 받게 되자 수길과 양주은의 행보는 일사천리, 바로 다음날 농장을 떠나 호놀룰루로 갔다. 배편을 확인한 다음 여관에 며칠 묵으며 역시 본토로 가려는 다른 동포들을 만났고, 시내구경 나갔다가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하와이를 떠나 1906년 3월 8일 오늘 도착한 것이다.
"아이고, 오시느라고 고생들 많습니다."
페리 부두 건물을 막 빠져나와 방향을 잡느라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일행을 향해 누군가 말을 붙인다. 차지게 들러붙는 우리나라 말이다.
"어? 치정이!"
임치정이었다.
"오랜만일세. 오느라고 고생 많았지?"
"한 일주일 배 타는 거야 뭐, 고생이랄 수 있나. 하, 바로 코앞에서 사람을 못 봤네."
양주은과 먼저 인사를 나눈 임치정은 수길을 비롯한 함께 온 동포들 모두와 일일이 수인사를 나눈 뒤 말을 이었다.
"이미 갈 곳 정해놓고 오신 분도 계실 줄 압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우선 공립관으로 함께 가셔서 식사도 좀 하시고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서 한 5리 정도 되니까 그리 멀진 않습니다."
△샌프란시스코항 내 페리 부두 건물 페리빌딩의 1900년대 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이다. 오클랜드로 가려면 예전엔 페리보트를 이용해야 했으나 지금은 다리가 놓여있어 페리보트는 사라졌고 페리빌딩 또한 쇼핑센터로 변신했다고 한다. 빌딩 입구 여섯 개 기둥 중 오른쪽 세 번째 기둥 부근은 1908년 3월 장인환 전명운 양 의사의 친일파-외교고문 스티븐스(Durham W. Stevens) 저격사건 현장이었다.∥이미지 출처: 역사복원신문 <스티븐스 처단 의거를 이후 '의열투쟁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그에 앞서 1903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년)에 가담한 직후 일본으로 도망쳤던 역적 우범선을 8년 만에 찾아내 처단하고 체포됐던 관료 고영근이 있었고, 또한 1905년 11월 을사늑약 직후 안양 서리재 고개 철길에서 도적의 수괴 이토히로부미가 탑승한 열차를 전복하게 해서 처단하려다 동료의 배신으로 거사에 실패하자 이토를 향해 힘껏 돌을 던져 이마에 상해를 입히고 체포됐던 원태우(일명 원태근) 의사가 있어 스티븐스 처단 의거를 의열투쟁의 효시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의열투쟁의 효시를 굳이 얘기하자면, 일제가 우리의 외교권은 물론 식민지배 전 단계로 통치권마저 빼앗아 통감부를 설치, 대내외 국가의사결정권이 송두리째 사라진 을사늑약 불과 닷새 뒤에 있었던 '원태우 의사 의거'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일행이 공립관 앞에 도착하자 송석준 방화중 이재수 이교담 등 공립관에 상주하는 임원들이 모두 나와 일제히 반겨주었다. 한바탕 각자 소개가 끝나고 일단 강당에 짐들을 푼 일행은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임치정의 안내로 공립관을 구석구석 둘러봤다. 식당으로도 사용하는 제일 큰 방 강당엔 부엌이 딸려있었다. 사무실을 겸한 신문 제작실, 자립 못 한 회원들이 일시 머무는 방들에 창고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건물 뒷마당엔 아담한 화초밭까지 있었으며, 무엇보다 일행이 깜짝 놀란 것은 건물 안팎에 있는 수세식 변소, 냄새가 거의 안 났다. 한마디로 공립관 전체가 잘 정돈돼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앞날에 대한 서광으로 비쳤고, 일행은 크게 안도했다.
일행이 식사를 마친 뒤, 송석준과 방화중이 공립협회 각 지방회와 각 지역 일자리 현황 및 협회가입 절차 등을 차례로 설명했다. 이재수는 공립관 생활수칙 설명과 방 배치를 맡았다. 오늘은 노독을 풀고 일자리 소개와 원하는 사람들 입회청원은 내일 하자는 송석준의 말을 끝으로, 두세 명씩 배치받은 각 방으로 짐들을 옮기는 어수선한 가운데 임치정은 또 바쁘게 부두로 나가야 했다. 일행 중 한 명이 배 타고 오는 동안 처음 본 청국인들과 사흘씩이나 잡기에 빠져서 몇 푼 안 된 수중의 돈을 화물세까지 다 잃는 바람에 짐을 찾지 못하고 그냥 왔다는 게 아닌가. 타 일행과는 다르게 부두 건물 앞에선 어쩐지 좀 심하게 데면데면 굴더니, 이제 겨우 실토한다.
△계단과 셔터, 출입문 등이 함께 있는 연갈색 건물이 1906년 당시 공립협회 회관 자리∥주소는 938 Pacific Ave San Francisco, CA 94133, USA-스트릿이 애비뉴로 바뀐 것 외엔 옛 주소와 같고 건물 외관도 옛 모습 추정-현재는 개인 주택∥1905년 11월 사들인 이 건물은 1906년 4월 18일 대지진 당시 전소했으나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으며 공립관은 오클랜드로 잠시 이주, 1년 뒤 다시 돌아온 후 1910년 8월까지 뷰캐넌 스트릿, 오스틴 애비뉴(스트릿), 새크라멘토 스트릿 등을 거쳤다.∥이미지 출처: 구글 © 2011 Google∥함께 보기: ☞독립운동유적지 국외 상세보기 공립협회 회관 자리(샌프란시스코지역 상세정보 클릭▷동영상 미주 샌프란시스코지역▷9분 38초~10분 27초 백운 선생 양주은의 묘)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독립운동유적지▷국외▷미주▷샌프란시스코▷2번▷공립협회 회관 자리)>
이튿날 아침, 수길과 양주은은 일찌거니 일어나 식사준비를 도왔다. 어제는 오후에 임치정 이교담과 함께 교회에도 다녀왔고, 간밤엔 늦게까지 술잔을 나누며 그동안 쌓인 회포를 푸느라 몸은 좀 피곤하긴 했으나 상쾌한 기분에 손놀림이 가벼웠다.
일행은 다시 모였다. 노동주선을 주관하는 각 지역의 회원들이 오렌지농장, 사탕무농장, 철도공사장, 석탄광, 미국사람 집 정원사, 레스토랑 주방일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고 희망자를 조사했다. 또한, 송석준은 협회가입 희망자를 조사한 다음 두어 군데 지방회의 야학과 미국학교에 다니는 동포-학생들 소식도 전해주었다.
하와이와는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거기서는 농장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좀 해보려고 해도 먼저 와서 자리 잡은 일본인들 등쌀에 이건 도대체 옴치고 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긴 다르다. 임금도 거의 두 배다. 이젠 됐다. 마음만 먹으면 어느 무엇이든 다 거뜬히 해낼 수 있겠다. 아, 얼마나 좋은가. 여긴 이렇게 모든 동포가 하나로 뭉쳐있구나. '이 사람도 서고 저 사람도 서서 모든 동포가 한가지로 서고…'
수길이 옆에 앉은 양주은을 돌아봤다.
(계속)
참고:
이재명 의사의 공립협회 회원 가입 날짜에 관하여
공훈전자사료관의 <재미 한인 50년사/제6장 정치적 활동/이재명 의사의 헌신>을 보면 <…1906년 3월 10일에 미주로 와서 한인 공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라고 돼 있다(☜). 그래선지 한국현대문화사대계에도 '3월 10일 가입'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공립신보 기사는 전혀 다르다. 11월 22일 자 기사에 새로 입회한 회원으로 올라있다. 또한, 입회하기 전인 7월 14일 자엔 본인 이름을 다시 고쳤다는 기사가 있다. 두 기사는 '회원 되기 전에 이미 회원처럼' 활동 중이었단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필자는, 협회에서는 누군가 입회를 청원하면 먼저 일정 기간 활동케 한 후(준회원), 입회승인(정회원)은 그 결과에 따르지 않았을까, 그에 더해 3월에 갔는데 4월에 대지진, '이런저런' 이유로 회원가입이 좀 늦어졌다 하고 한번 생각해 본다.
다음 [가]는 이재명 의사가 이름 고친 내용부터 귀국한 사실까지 알려주는 연월일 순서 기사 넷이다. 몇 안 되는 기사이지만 이 의사의 활동 정도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의사 귀국기사에 '자원·파견'은 없으나 이 또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이재명▷연속간행물▷공립신보)
#1. 이름을 수길(壽吉)에서 다시 재명(在明)으로
△공립신보 1906년 7월 14일 자 6면 1단∥경계자(삼가 말씀드리는 사람)는 본인의 이름을 수길(壽吉)로 통행이옵더니 다시 [在明]으로 고쳤사오니 지구(地區) 첨(僉) 동포는 아시압 노생길이스 류(로스앤젤레스 체류) 이재명(李在明) 고백(알림)∥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2. 공립협회 회원 가입
△공립신보 1906년 11월 22일 자 4면 2단∥羅省會報告 로스앤젤레스지방 회장 장원근 씨의 보고를 거한즉…새로 입회한 회원 15인의 성명과 거주를…양주삼 정원현 김병록 김성택 손성조 오남식 문명록 박은상 이재명 김경순 이경진 동희룡 송재문 한주삼 권명하 (원명 수길을 계부가 지어준 재명으로 다시 고친 뒤에 가입했다.)∥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3. 공립협회 창립 2주년 기념행사
△공립신보 1907년 5월 31일 자 1면 2~3단(연결)∥羅城會報告 로스앤젤레스지방 회장 장원근 씨의 보고를 거한즉 4월 5일 연환회(공립협회 창립 2주년 기념행사)에 총회를 위하여 연보한 제씨 열명(列名)과 금 수효는(금액은) 여좌라 하니…임준기 10원 황사용 10원…김병록 5원…이재명 2원 50전…이상 합금 364원 45전이라 하다.∥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4. 귀국일
△공립신보 1907년 10월 18일 자 2면 4단∥동포귀국 이재명…이달 9일 시베리아 선편…∥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이재명▷한국사연표▷근대사연표)
#1. 공립협회 회원 가입
<1 1906년 3월 10일 李在明 義士,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회원으로 가입. 한국현대문화사대계 V(손보기) p. 699(☜)>
#2. 귀국일
<2 1907년 10월 9일 李在明, 매국노 숙청 위해 샌프란시스코 출발. 한국현대문화사대계 V(손보기) p. 699(☜)>
<공립협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한 만큼 통칭으로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도 가능은 하겠지만, 정식명칭은 북미 한인 공립협회이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하면 일단은 '지방회'이다. 이재명 의사는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회원이었다.>
2011.12.31(토)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