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05]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5회)
"이민선 탈 때 농장주가 미리 대줬던 그놈의 100달러…아시다시피 저는 모은 돈은 별로 없어도 이렇게 새로 시작하는데…저보다 1년 이상 먼저 오셔서 빚진 돈이야 진작 갚으셨고 술도 궐련도 전혀 안 하시니까 여유는 좀 있잖습니까…형님도 그냥 여기서 어떻게 더 버텨보시면…전에 말씀하신 삼밭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흔들어 강물에 노를 젓듯 여덟 팔자를 그리며 무슨 생각엔지 한참 골똘해 있던 양주은도 수길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삼포(蔘圃)? 글쎄…삼포야 좌우간에 리버사이드 가서 안 선생부터 뵙고…"
"저는 지금 바로 입회청원 먼저 하고요, 그리고 이따 형님 가실 때 저도 같이 갈랍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데는 리버사이드나 로스앤젤레스가 더 나을 듯해서요."
"내 생각도 그게 낫지 싶네. 잘 생각했어. 그래, 나하고 같이 가세…"
두 사람은 저마다 희망하는 일자리 면담으로 부산한 동포들 및 협회 임원들과 함께 서로들 아쉬움 속에 덕담을 나눈 뒤 리버사이드를 향해 출발했다. 임치정은 화륜차정거장(기차역)까지 따라 나오며 수길을 격려해 주었고, 양주은에게도 어지간하면 귀국하지 말고 협회 일을 같이 해보자는 당부를 또 잊지 않았다.
△공립협회 입회청원서 식양(양식) 내외지(국내외) 통용∥이미지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다음날 오후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수길과 양주은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안창호의 마중에 깜짝 놀랐다.
"어서들 오십시오. 안창홉니다."
"아니, 안 선생!…저희 오는 걸 어떻게 아시고, 제가 편지에는 오는 4월쯤 귀국할 때 그때 한번 뵙고 싶다고만 했는데…"
양주은은 안창호와 두 손을 맞잡고 반가움에 더한 감격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예, 저도 그래서 어제 오후에 임치정 선생 전어(전화)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오늘 오실 거라곤 생각 못했었지요. 반갑습니다."
첫눈에 두 사람을 알아본 안창호였다.
"자네가 이수길이지? 어허, 자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오랜 지기인 양,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벌게진 얼굴로 말없이 지켜보던 수길이 안창호가 말을 걸자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끄어 억…엉엉…"
"자네 왜 그래? 갑자기 왜 울어 이 사람아…"
"자, 자, 눈물 거두고…"
간신히 울음을 그친 수길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더듬더듬 안창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어렸을 때…연광정골 살 때…선생님을 한 번 뵌 적 있습니다…"
북청으로 피란 갔다가 3년 만에 돌아온 열한 살 무렵 황제 폐하 탄신일에 쾌재정서 열린 만민공동회에 동네어른들을 따라갔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른 사람들 연설은 다 잊었어도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하고 재밌게 시작한 안창호 연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날 저녁 집에서 쾌재정에 못 가신 몸져누워계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낮에 보고 들은 걸 말씀드리면서 자신도 공부 많이 해서 안창호 같은 훌륭한 사람 되겠노라 다짐을 했었고, 아버지는 사실 계부이며 생부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고, 쾌재정서 연설 듣고 온 며칠 뒤 어머니는 끝내 눈을 감으셨으며 성이 다른 이부동생 하나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계부가 자신의 이름을 재명으로 고쳐주었는데 이민 떠나오면서는 원래 이름으로 왔노라, 무시로 어머니가 생각나면 쾌재정 연설이 떠올랐고 안창호가 생각나면 또한 늘 어머니가 그리웠노라…속내를 털어놓는 수길의 목소린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동안 유달리 정말 친하게 지내며 교회까지 함께 다녔던 양주은도 이제야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을 뵈니까…어머니를 뵌 것 같은 느낌에 그만…죄송합니다…"
"아하…그랬었구나…아차, 양 선생, 미리 얘기해놨으니까 오늘은 저의 집으로 가십시다. 수길이, 우리 긴 얘기는 집에 가서 하기로 하고. 자, 가자고."
(계속)
참고1:
도산 안창호의 쾌재정 연설
(3. 스타탄생! 안창호) 평양 쾌재정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는 1898년(1897년의 오류) 7월 25일(음력) 평양 쾌재정(快哉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광무황제 탄신일을 기념하고 자주독립과 부정부패의 척결을 만민에 호소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약관 20세의 청년 안창호가 연사로 나와 탐관오리의 부패상태를 통쾌하게 고발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도산은 수만의 군중이 모여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말로 휘어잡은 뒤, 이들 군중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 폐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던 처음 보는 일이니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어찌 쾌재가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자리를 같이 하였으니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가 아닐 수가 없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이것이 쾌재정의 3쾌라 하는 것입니다."
△갓을 쓴 청년 안창호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자료 내용(사진 설명)은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 청년 시절 갓을 쓰고 사진을 찍은 안창호를 비롯한 3형제라고만 하면서 가운데가 안창호라 한다.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 온라인 기념관 자료 역시 독립협회 관서지부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시기(1897년)의 모습이라고만 한다. 하여 필자는 3남 1녀의 셋째 안창호(초명 치삼)의 사진상 왼쪽이 둘째 형 치명, 오른쪽이 큰형 치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태복의 도산 안창호 평전 외 기타 자료에 의하면 둘째 형 치명은 어려서 사망해 치호 창호 신호의 2남 1녀가 됐다고 한다. 적어도 10세 무렵 초명인 치삼을 창호로 개명하기 전의 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할 무렵 저 사진을 함께 찍은 두 인물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도무지 의문을 풀 길이 없었다. 누군진 알 순 없지만 아마도 의형제를 맺은 인물들로 독립협회 관서지부 발기인들일 수도 있겠거니 하는 정도에 그쳤었다. 그러다가 필자는 필대은 안창호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 관서지부 평양지회 회원이던 길선주 그와 함께 한국 기독교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중 한 분인 이기풍 목사의 증손자 이준호 목사의 연락을 받았다. 사진상 왼쪽 인물은 아무래도 자신의 증조부가 틀림없다고 하면서 위 사진을 본 지인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여 필자는 이준호 목사가 보내온 이기풍 목사 자료들을 필두로 제주성안교회 100년사, 길선주 및 안창호 평전, 흥사단 도산 연보 외 기타 자료들을 6개월여 긴 시간 비교 검토, 심사숙고 끝에 결론을 내리고 텍스트를 수정한다. 독립협회 관서지부 회원명부로 추정되는 작은 수첩을 양손에 모아 쥔 사진상 왼쪽 인물은 '이기풍 목사'가 확실하고 오른쪽 인물은 '필대은 선생'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