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05]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1. 5. 21:08

(5회)

 

"이민선 탈 때 농장주가 미리 대줬던 그놈의 100달러…아시다시피 저는 모은 돈은 별로 없어도 이렇게 새로 시작하는데…저보다 1년 이상 먼저 오셔서 빚진 돈이야 진작 갚으셨고 술도 궐련도 전혀 안 하시니까 여유는 좀 있잖습니까…형님도 그냥 여기서 어떻게 더 버텨보시면…전에 말씀하신 삼밭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흔들어 강물에 노를 젓듯 여덟 팔자를 그리며 무슨 생각엔지 한참 골똘해 있던 양주은도 수길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삼포(蔘圃)? 글쎄…삼포야 좌우간에 리버사이드 가서 안 선생부터 뵙고…"
"저는 지금 바로 입회청원 먼저 하고요, 그리고 이따 형님 가실 때 저도 같이 갈랍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데는 리버사이드나 로스앤젤레스가 더 나을 듯해서요."
"내 생각도 그게 낫지 싶네. 잘 생각했어. 그래, 나하고 같이 가세…"

 

두 사람은 저마다 희망하는 일자리 면담으로 부산한 동포들 및 협회 임원들과 함께 서로들 아쉬움 속에 덕담을 나눈 뒤 리버사이드를 향해 출발했다. 임치정은 화륜차정거장(기차역)까지 따라 나오며 수길을 격려해 주었고, 양주은에게도 어지간하면 귀국하지 말고 협회 일을 같이 해보자는 당부를 또 잊지 않았다.

 


△공립협회 입회청원서 식양(양식) 내외지(국내외) 통용∥이미지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다음날 오후 리버사이드에 도착한 수길과 양주은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안창호의 마중에 깜짝 놀랐다.

 

"어서들 오십시오. 안창홉니다."
"아니, 안 선생!…저희 오는 걸 어떻게 아시고, 제가 편지에는 오는 4월쯤 귀국할 때 그때 한번 뵙고 싶다고만 했는데…"

 

양주은은 안창호와 두 손을 맞잡고 반가움에 더한 감격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예, 저도 그래서 어제 오후에 임치정 선생 전어(전화)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오늘 오실 거라곤 생각 못했었지요. 반갑습니다."

 

첫눈에 두 사람을 알아본 안창호였다.

 

"자네가 이수길이지? 어허, 자네…"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오랜 지기인 양, 서로 반갑게 인사하는 모습을 벌게진 얼굴로 말없이 지켜보던 수길이 안창호가 말을 걸자 갑자기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어…끄어 억…엉엉…"
"자네 왜 그래? 갑자기 왜 울어 이 사람아…"
"자, 자, 눈물 거두고…"

 

간신히 울음을 그친 수길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더듬더듬 안창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어렸을 때…연광정골 살 때…선생님을 한 번 뵌 적 있습니다…"

 

북청으로 피란 갔다가 3년 만에 돌아온 열한 살 무렵 황제 폐하 탄신일에 쾌재정서 열린 만민공동회에 동네어른들을 따라갔었는데, 세월이 흘러 다른 사람들 연설은 다 잊었어도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하고 재밌게 시작한 안창호 연설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으며, 그날 저녁 집에서 쾌재정에 못 가신 몸져누워계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낮에 보고 들은 걸 말씀드리면서 자신도 공부 많이 해서 안창호 같은 훌륭한 사람 되겠노라 다짐을 했었고, 아버지는 사실 계부이며 생부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고, 쾌재정서 연설 듣고 온 며칠 뒤 어머니는 끝내 눈을 감으셨으며 성이 다른 이부동생 하나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계부가 자신의 이름을 재명으로 고쳐주었는데 이민 떠나오면서는 원래 이름으로 왔노라, 무시로 어머니가 생각나면 쾌재정 연설이 떠올랐고 안창호가 생각나면 또한 늘 어머니가 그리웠노라…속내를 털어놓는 수길의 목소린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동안 유달리 정말 친하게 지내며 교회까지 함께 다녔던 양주은도 이제야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선생님을 뵈니까…어머니를 뵌 것 같은 느낌에 그만…죄송합니다…"
"아하…그랬었구나…아차, 양 선생, 미리 얘기해놨으니까 오늘은 저의 집으로 가십시다. 수길이, 우리 긴 얘기는 집에 가서 하기로 하고. 자, 가자고."

 

(계속)

 

참고1:

도산 안창호의 쾌재정 연설

 

(3. 스타탄생! 안창호) 평양 쾌재정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는 1898년(1897년의 오류) 7월 25일(음력) 평양 쾌재정(快哉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이 행사는 광무황제 탄신일을 기념하고 자주독립과 부정부패의 척결을 만민에 호소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약관 20세의 청년 안창호가 연사로 나와 탐관오리의 부패상태를 통쾌하게 고발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도산은 수만의 군중이 모여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말로 휘어잡은 뒤, 이들 군중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그는 먼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다.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오늘은 황제 폐하 탄신일인데,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한데 모여 축하를 올리는 것은 전에 없던 처음 보는 일이니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어찌 쾌재가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자리를 같이 하였으니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가 아닐 수가 없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고 하리니, 이것이 쾌재정의 3쾌라 하는 것입니다."

 


△갓을 쓴 청년 안창호 사진(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자료 내용(사진 설명)은 별다른 부연설명 없이 청년 시절 갓을 쓰고 사진을 찍은 안창호를 비롯한 3형제라고만 하면서 가운데가 안창호라 한다.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 온라인 기념관 자료 역시 독립협회 관서지부 평양지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시기(1897년)의 모습이라고만 한다. 하여 필자는 3남 1녀의 셋째 안창호(초명 치삼)의 사진상 왼쪽이 둘째 형 치명, 오른쪽이 큰형 치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태복의 도산 안창호 평전 외 기타 자료에 의하면 둘째 형 치명은 어려서 사망해 치호 창호 신호의 2남 1녀가 됐다고 한다. 적어도 10세 무렵 초명인 치삼을 창호로 개명하기 전의 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할 무렵 저 사진을 함께 찍은 두 인물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도무지 의문을 풀 길이 없었다. 누군진 알 순 없지만 아마도 의형제를 맺은 인물들로 독립협회 관서지부 발기인들일 수도 있겠거니 하는 정도에 그쳤었다. 그러다가 필자는 필대은 안창호 등과 더불어 독립협회 관서지부 평양지회 회원이던 길선주 그와 함께 한국 기독교 장로교 최초 목사 7인 중 한 분인 이기풍 목사의 증손자 이준호 목사의 연락을 받았다. 사진상 왼쪽 인물은 아무래도 자신의 증조부가 틀림없다고 하면서 위 사진을 본 지인들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여 필자는 이준호 목사가 보내온 이기풍 목사 자료들을 필두로 제주성안교회 100년사, 길선주 및 안창호 평전, 흥사단 도산 연보 외 기타 자료들을 6개월여 긴 시간 비교 검토, 심사숙고 끝에 결론을 내리고 텍스트를 수정한다. 독립협회 관서지부 회원명부로 추정되는 작은 수첩을 양손에 모아 쥔 사진상 왼쪽 인물은 '이기풍 목사'가 확실하고 오른쪽 인물은 '필대은 선생'으로 추정된다.

 


△1907년 조선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 7인 모습, 앞줄 왼쪽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인서, 뒷줄 왼쪽부터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출처: 제주성안교회 100년사 원문☜)∥앞줄 왼쪽 두 번째, 1897년 무렵의 갓을 쓴 청년 안창호 사진 속 이기풍과 가장 비슷한 10년 뒤의 이기풍 목사의 모습이다. 이기풍 목사는 1907년 첫 사역지 제주도로 파송된 뒤에도 안창호 선생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하며, 길선주 목사 역시 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1897년 '쾌재정 만민공동회 연사'였다고도 한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자 도산은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것은 말뿐"이라고 지적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크게 비판하였다. 이에 자리에 참석한 군중들은 '옳소, 옳소'하고 소리치며 박수를 쳤으며, 같이 있던 관리들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고 한다. 소설가 김동인은 당시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 수천의 군중이 옷깃을 바로잡고 고요히 연설을 듣고 있는 것이 퍽이나 엄숙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한 귀퉁이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그의 열변에 감격한 것이리라. 그 울음소리는 순식간에 다른 한 귀퉁이로 옮아갔고 또 다른 한 귀퉁이로 옮아갔다. 그래서 조금 뒤에 그 넓은 장내는 흐느낌으로 가득 찼고, 곳곳에서 군중들은 팔소매로 눈물을 씻고 있었다. 그리고 부인들은 머리에 꽂았던 비녀와 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어서 바쳤고, 남자들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어 놓았다. 아마 이제부터 잘 살자면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연사의 말에 학교 기부의 일조(一助)가 되라고 그 돈을 내어 놓는 것 같았다."

 

또한 지나가다 이 자리에 잠시 쉬면서 연설을 들었던 유기장사 이승훈은 그의 연설에 감동하여 학교를 세울 결심을 하였고, 이후 오산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출처: 안성결(1996).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도산기념사업회, 서울: 한국문화사.|한승인(1980). 『민족의 빛 도산 안창호』|이광수(1998). 『도산 안창호』, 서울: 흥사단출판부)∥출처: 도산 안창호 온라인 기념관∥이미지보완<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어: 갓을 쓴 청년 안창호)>

 

덧붙임:
전해지는 목격자 증언 추가 외 오류 정정 및 기타

 

#1. 도산의 쾌재정 연설(주요한의 안도산전서 초록 추정 요지 전문☜)

 

"…세상을 바로 다스리겠다고 새 사또가 온다는 건 말뿐이다. 백성은 가뭄에 구름 바라듯이 잘 살게 해주기를 쳐다보는데 인모망건(人毛~)에 탕건 쓴 대관 소관들은 내려와서 여기저기 쑥덕거리고 존문(存問狀/존문장-예전에, 고을의 수령이 민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그 지방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이르던 말)만 보내니 죽는 것은 애매한 백성이 아닌가. 존문 받은 사람은 당장에 돈을 싸 보내지 않으면 없는 죄도 있다 하여 잡아다 주리를 틀고 돈을 빼앗으니 이런 학정이 또 어디 있는가. 빼앗은 돈으로 허구한 날 선화당(조선 시대 관찰사가 직무를 보던 관찰부, 즉 감영의 본채 건물)에 기생을 불러 풍악을 잡히고 연광정에 놀이만 다니니 이래서야 어디, 나라 꼴이 되겠는가. 진위대장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책임인데 보호는커녕 백성의 물건 빼앗기를 일삼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

-이날 청년 도산은 소위 '쾌재정 연설'을 통해 18 조목의 쾌재와 18 조목의 불쾌를 설파, 탐관오리의 행적을 샅샅이 들어 성토하여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2. 당시 쾌재정에 앉아서 19세 안창호의 연설을 들었던 평안남도 감사 조민희는 매국 역적 이완용의 처남으로, 또한 경술국적(庚戌國賊) 여덟 명 중 한 명이다.

 

#3. 위 본문 중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이 묘사한 내용은 '쾌재정 연설' 묘사가 아니다(김동인은 1900년생, 쾌재정 연설은 1897년). '삼천리 1932년 여름호'에 실린 김동인의 '안창호회상기'의 일부 내용으로, 이는 1907년 7월 8일에 있었던 3,000여 청중의 평양 연설회, 즉 명륜당 '여자교육연구회' 초청연설회 묘사로 보인다. 이날 모금된 의연금은 630여 원이라고 한다.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외 이승훈이 세운 강명의숙 오산학교 등의 설립 또한 바로 이 '평양 연설회'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김동인의 글 전문으로, 1932년 안창호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폭탄투척 의거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자, 안창호의 지난날을 회상하여 기리는 내용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에서 옮겨왔다.

 

安昌浩回想記 [李光洙・金東仁] (『三千里』1932. 하절/여름)

(이미지 뷰어-김동인의 글 전문은 1쪽 3단~2쪽 4단☜)

 

「간다 간다 나는 간다」/金東仁(김동인)

 

내가 일곱 살 때 일인 줄 안다. 平壤(평양) 孔子廟(공자묘에) 있는 明倫堂(명륜당)에서 하루 저녁은 演說會(연설회)가 열린다고 여러 사람들이 무리들 지어 몰려갔었다. 나도 틈에 끼어 演說會場(연설회장)으로 갔더니 웬 삼십 남짓한 靑年(청년) 한 분이 壇上(단상)에 올라서서 熱辯(열변)을 吐(토)하고 있었다.

 

하도 어린 때 일이 되어 演說(연설) 內容(내용)이야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 數千(수천)의 群衆(군중)이 옷깃을 바로잡고 고요히 演說(연설)을 듣고 있는 것이 퍽으나 嚴肅(엄숙)하게 보였다. 그러다가 한 귀퉁(이)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그의 熱辯(열변)에 感激(감격)한 것이리라. 그 울음소리는 瞬息間(순식간)에 다른 한 귀퉁이에 옮아가고 또 다른 한 귀퉁이에 옮아가고 그래서 조금 뒤에는 그 너른 場內(장내)가 느껴 우는 소리와 팔소매로 눈물 씻는 光景(광경)뿐이었다.

 

그리고 婦人(부인)들은 머리에 꽂았든 비녀와 손가락에서 가락지를 빼어서 바치며 사내들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어 내어 놓는다.

 

아마 이제부터 잘 살자면 新學問(신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演客(연객)의 말에 學校(학교) 寄附(기부)의 一助(일조)가 되라고 그 돈을 내어 놓는 듯하였다.

 

그 靑年(청년)이란 뒤에 알고 보니 島山(도산)이었다.

 


△삼천리 1932년 여름호 본문에 실린 대성학교 사진 (평양 대성학교와 교장 도산)

 

島山(도산)에게 누이 한 분이 있었는데 그때 時節(시절)에 新女性(신여성)으로 치는 美貌(미모)의 才人(재인)이었다(백범 김구와 혼담이 오갔던 동생 안신호). 新學問(신학문)을 닦고 演說(연설) 잘하고 구두 신고 머리를 三八(삼팔)로 가르고~. 三十(삼십) 年(년) 前(전)에 이만하였다면 여간 깬 新女性(신여성)이 아니었다.

 

그이가 只今(지금)은 鎭南浦敎會(진남포교회)의 牧師(목사)로 있는 金聖澤(김성택) 氏(씨)의 안해가 되어 바로 우리 뒷집에 新接(신접)살림을 차리고 살았다. 그이 집에서도 無時(무시)로 우리 집에 出入(출입)하거니와 우리 집에서도 無時(무시)로 그 집에 출입하는 퍽으나 가까운 사이였었다. 그때 島山(도산)은 가끔 그 누이를 찾아 우리 洞里(동리/장대재)에 온다. 그러면 우리들 동리의 어린아해들은 늘 島山(도산)에게 안기기도 하고 島山(도산)과 같이 씨름도 하고 달음내기(달리기)도 하고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하는 창가도 배우고…. 하루를 정말 유쾌하게 보낸다. 島山(도산)은 어린兒孩(아해)를 퍽으나 좋아한다. 어린아해들을 만나면 아무리 急(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걸음을 멈추고 自己(자기)도 어린아해가 되어 한바탕 어울려 놀고야 만다.

 

우리들은 늘 島山(도산) 어른을 정든 동무나 같이 기다렸다.

 

島山(도산)이 米國(미국)으로 떠날 때에 每日新聞(매일신문/대한매일신보)에 노래를 지어 發表(발표)하였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내가 가면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영 잊을쏘냐」

 

우리들 젊은 少年(소년)들은 정든 어른 동무 한 분을 잃은 대신에 깨쳐 두고 간 그 노래를 불렀다.

 

그 뒤 半島(반도)에는 이 노래가 널리 퍼져서 靑年學生(청년학생), 少年(소년)들로 이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이가 별로 없었다.

 

○원제는 '去國行(거국행/조국을 떠나며)'이다. 안창호가 1910년 4월 8일 행주에서 배편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기고 갔다. '간다 간다…한반도야'는 대한매일신보 순 한글판 1910년 5월 12일 자 2면 7단에 필명 신도의 독자투고 시사평론으로 제목 없이 실려있으며, 전체 네 꼭지 중 두 번째 마지막 구절 '나 간 후에 더 힘써라…'가 去國行 제목이 있는 국한문판에서는 '내가 가면 영 갈쏘냐…'로 돼 있다. 원문으로 추정된다. (국한문판 去國行 新島 이미지 뷰어☜/순 한글판 시사평론 신도 PDF☜)


○평양 공자묘의 명륜당 위치를 잠깐 한번 짚어본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3일 자 4면 1단~7단 '명승고적 순회탐방 4천 년 구도 평양의 위관'에 실린 숭령전을 보면 명륜당 남편 약 4정가량(남쪽 약 436m가량) 되는 곳에 있다고 했고, 숭인전을 보면 명륜당 동편에 있다고 했다(☜). 또한, 한국고전종합DB의 조선왕조실록 '중종 32년 정유(1537) 3월 4일 연위사 소세양이 평양에서의 천사(중국사신)들의 행적을 보고하다'를 보면 기자묘(숭인전)와 단군묘(숭령전) 가는 길이 문묘(공자묘) 앞을 통과한다고 했다(☜). 하여, 실제 길 하나 건너 가까이 있던 두 곳 다 명륜당 남동쪽임을 유추할 수 있고, 명륜당 연설회 이후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 역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명륜당은 오늘날의 '평양학생소년궁전' 북서쪽 436m 근처로 추정된다(☜).

 

참고2:
1) 평양 쾌재정의 정확한 위치 정보

 

<모란봉 쾌재정>, 모란봉에 있는 걸로 흔히들 얘기한다(☜). 다음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안창호 김덕근 장현근 등 세 사람이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연루혐의로 체포돼(1932.04.29) 서울로 압송된(1932.06.07) 직후 안창호의 약력기사 셋이다.

 

<동아일보 1932년 6월 9일 자 2면 6단/내외 풍상 40여 년 도산 안창호 내력/도산은 본시…평양에 내려가 지금 종로 공보터 안에 있는 쾌재정에서 게천(계천)기원 축하회에서 연설을 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참모격인 고 필대은과 더불어 각처에 유세하고 또 그 고향인 강서에 교회와 점진학교를 세웠다. 이 점진학교는…(전문보기☜)>

 

<신한민보 1932년 7월 7일 자 3면 2단/안도산의 해내외 풍상 30여 년 약관시대부터 각 방면에 활동/안도산은 본시…평양에 내려가 지금 종로 공보터 안에 있는 쾌재정에서 개천(계천)기원 축하회에서 연설을 한 것을 비롯하여 그의 참모격인 고 필대은 씨와 더불어 각처에 유세하고 또 그 고향인 강서에 교회와 점진…(전문보기☜)>

 

<신동아 1932년 7월호/망명의 도산으로 영어의 안창호/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그의 총각임을 멸시하였으므로 도산은 총각이면서 자작 성관하여 망건 쓰고 갓 쓴 어른 행세를 하였다. 정유년(1897년)에 평양으로 내려가 독립협회 지회를 설치하고 지금 종로 공보구(公普構) 내에 있던 쾌재정에서 계천기념 축하 연설을 하였다. 이것이 처녀연설이었지만 그 웅변은 청중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그 고향에 교회를 세우고 또 점진학교라는 소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전문보기☜)>

 

<모란봉 쾌재정>이 아니다. <평양 종로 쾌재정>이다. 위 기사 셋을 보면 그렇다.

 

<공보터/공보구(公普構)>, 관청에서 (어떤 일을 백성 일반에) 널리 알리던 집의 터 또는 그러한 장소를 말하므로,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이 축하식에 자리를 같이 하였으니 관민동락…> 하는 구절과 함께, 쾌재정의 성격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평양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린 날의 기타 정보

 

1898년 7월 25일(음력/양력 9월 10일)은 오류로 보인다. 1897년 7월 25일(음력/양력 8월 22일)에 열렸다. (도산은 1878년 11월 9일생, 만 19세가 채 안 됐었다.)

 

광무황제(고종)의 탄신일이었다./1852년(철종 3년) 음력 7월 25일(양력 9월 8일)~1919년 (양력) 1월 21일(음력 전년 12월 20일)

 

계천기원(繼天紀元) 축하회, 즉 광무 연호제정 시행(양력 8월 17일) 축하행사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날은 (양력) 10월 12일로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이라 한다.

 

독립협회 관서지부 회원 도산은, 협회가 만민공동회로 발전함에 따라 필대은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 관서지부를 발기한 다음, 쾌재정에서 (계천기원 축하회 명목으로 혹은 축하회 자리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생애 첫 대중연설을 하였다.

 

광무(光武)는 (양력) 1897년 8월 17일부터 1907년 8월 11일까지 사용된 대한제국의 첫 번째 연호이다. 두 번째 융희(隆熙)는 1907년 8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2일까지(한일병탄조약 체결까지) 사용되었다. (병탄조약 공포는 8월 29일-경술국치)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 1897년(고종 34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2일) 국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고쳐 선포하고 고종(高宗)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날이다.

 

함께 보기:

아, 어머니! 아이고, 여보!/공무도하(1909) 연재일기

 

<한(韓)민족 우리는 한(恨)민족

 

단군 이래 우리는 늘, 쫓기며 살아왔고, 뜯기며 살아왔고, 굶주리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울면서 살아왔다. 태평성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나 대체로 그래 왔다. 안녕하냐, 그러니까 간밤에 아무 탈 없이 편안했느냐고 묻는 게 인사다. 밥은 먹었냐는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밥은 먹었느냐, 눈물 나게 서글프다.

 

어디 그뿐이랴, 사람이 죽으면 저승 가면서 배곯지 말라고 망자 입에다가 한 움큼 쌀을 물리고는 곡을 한다. 노잣돈까지 올린다. 가락을 살려서 곡을 잘해야 효녀요 효자다. 눈물이 말라 오죽하면 그래, 서럽게 곡 잘하는 사람을 따로 사기까지 할까.

 

그런가 하면 우리는 또, 촛불이 눈물(촛농) 흘린다 하고, 으악새(억새)가 슬피 운다 하고, 문풍지가 운다 하고, 가야금이 운다고도 한다. 풍경 소리에 방울 소리까지도 울려버린다. 청아하게 들리는 저 새 소리마저 노래가 아니라 곧 울음이니 소쩍새가 서럽게 운다. 슬스리 시르렁 쿵덕, 슬스리 시르렁 쿵덕, 흥겹게 돌아가는 물레방아 바퀴를 보고서도 깊은 시름 속에 흐느껴 돌아가는 사람의 한세상을 생각해 낸다.

 

무언가 서럽고 애달파서, 혹은 몹시 아파서 우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기쁨이나 감격에 겨워서도 부족함 없이 실컷 운다. 이렇듯 정말이지 우리는 참으로 눈물이 많다. 한이 맺힌 사연이 많아 눈물로밖에는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전무후무할 큰 한으로 뒤범벅됐었다. 외세의 힘겨루기 속에 허망하게 힘없이 나라를 빼앗겼었다. 또한, 그 연장선에서 동족 간 상잔을 했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피를 뿌리고, 나라는 둘로 나뉘고 말았다.

 

뭔가 좀 잘못된 것, 이건 좀 잘못됐으니 고쳐야 하지 않겠냐고, 누군가는 그저 그런 말 한마디 했다고 밉보이는 바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가던 세상을, 어이없는 이유로 쫓겨 다녀도, 아무런 내력 없이 맞아 죽어 나가도, 내 가진 것을 터무니없이 뜯어내 가도, 한없이 배가 고파 꼬부라져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던 세상을, 숨죽여 웅크리고 그저 그냥 모르쇠로, 할 말 못 해 마른 울음 꺽꺽대며 두 주먹 그러쥐고 가슴만을 쳐대며 살아내야 했던, 그런 세상을 우리는 지나왔다. -하략->

 

위의 글은 내가 전에 썼던 어떤 글 일부이다.

 

겁 없이 덤벼든 공무도하(1909) 연재, 조금 전 또 이재명 의사와 오인성 여사 꿈을 꾸다 잠이 깼다. 비몽사몽 중에 이재명 의사가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 선생을 만나 어머니를 떠올리며 우는 장면과 이 의사가 교수형을 당한 후 오 여사가 통곡하는 장면이 겹쳐 흘렀다.

 

잠이 깨면서 나도 모르게 위의 글과 멕시코 민요 '제비'가 떠올랐다.

 

하와이 노동이민이 중단된 후 우리 민족은 또 멕시코 유카탄의 밧줄 만드는 선인장 에네켄(애니깽) 농장으로 흘러갔다가, 나중에는 중남미 각처로 흩어지게 된다.

 

스페인과의 악연 속에 스페인어를 국어(공용어)로 사용하게 된 서럽디서러운 나라 멕시코, 그들의 독립운동도 우리의 독립운동 못지않게 아주 처절했었다.

 

스페인 총독 관할령에 편입됐던 멕시코는 1821년 독립(반란)군이 스페인과 마지막 독립 협상을 벌였고, 1823년 공화국을 선포했다.

 

공화국으로 새로 출발한 멕시코는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엎치락뒤치락 여러 차례 반란 또는 혁명 시도가 있었고, 1934년 마침내 혁명이 완성돼 오늘에 이른다.

 

'제비'는 원래, 스페인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 왕국이 1492년 무너지게 되자 유리방황하던 한 왕족이 망국의 한을 읊은 노래(詩)라고 한다.

 

이 노래는 멕시코로 전해지면서 1883년 멕시코의 작곡가 나르시소 세라델 세비야(1843~1910)가 곡을 붙여 널리 알려지게 됐다.

 

매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의 '제비'는, 세찬 바람 속에 갈 곳 없어 방황하는 가사 속 제비가, 풍찬노숙하며 농민혁명을 이끌던 남부혁명군 지도자 에밀리아노 자빠따(1879~1919)를 연상케 한다 하여, 그를 추모하여 부르는 노래가 됐다.

 

말 나온 김에 동영상 '제비'도 한번 올려 본다.

 

Los Caballeros - La Golondrina(제비)

다운로드, 유튜브(2009.10.18.님이 올린 동영상)

http://www.youtube.com/watch?v=fqUeAwMXAFA&feature=related

 

연재 자료 재검토, 수정, 정리가 이제 겨우 끝나간다. 다 끝나게 되면 연재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한 두어 시간밖에 안 된 조각 잠을 설친데다 횡설수설하느라 살짝 피곤하다. 눈 좀 더 붙여야겠다.

 

2012.01.05(목)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