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07]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7회)
생각이 깊어지면 습관적인 자세다. 양주은은 또 팔짱을 끼고서 고개를 흔들어 여덟 팔자를 그린다. 그러다가 안창호가 그를 향하자 고개를 바로 하고 팔짱을 풀었다.
"부끄럽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귀국하려고만 했으니…이제부터라도 심기일전해서 동포들이 하나가 되게 하는데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안창호가 양주은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고맙습니다, 고맙고요. 우리가 시방 당장은 먹고살기 급급해서 아무 일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지만…예…불원장래 기회는 반드시 옵니다. 차근차근 한번 해봅시다."
안창호의 말 마디마디, 하나라도 놓칠세라 숨죽여 듣는 수길의 두 눈은 마치 부삽으로 숯을 한가득 떠 넣은 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살면서 정든 고향 평양성을 피로 적신 남의 나라 전쟁, 남부여대 피난길에 북청까지 흘러갔던 유년 시절 그 이래, 갈피를 잡지 못한 뒤엉킨 실타래가 술술 풀리고 있었다.
'일청전쟁, 왜 우리 땅에서 벌어졌는가. 내력 없이 우리가 죽어 나가도 저항은커녕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라에선 뭘 했나. 무섭다. 우린 힘이 없다. 동학은 대체 무엇이고 서학은 또 무엇인가. 우리네 삶은 왜 이렇게 고단한가. 쾌재정에 가서 연설을 들었다. 아, 알았다. 아는 게 힘이다. 배워야 산다. 일신학교 마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난 지금 뭘 하고 있는가. 영문 몇 줄 배워서 공부도 아니고. 일본은 또 우리 땅에서 러시아와 싸웠다. 청나라를 이기더니 러시아도 이겼다. 우리와는 무슨 의정서네 협정서네 협약이네. 아아, 망해가는 대한제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그래, 가자. 본토로 가자. 쾌재정의 안창호, 안 선생님 계시는 본토로 가자.'
오늘 밤 그야말로, 오뉴월 뙤약볕에 가물가물 드러누운 검붉은 황톳길을 정처 없이 터벅거리던 외로운 나그네가, 마침내 이정표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렇듯 안창호는 단숨에 두 사람을 사로잡았다. 조곤조곤한 말투였으나 그에게는 남다른 카리스마가 있었다. 무르익은 대화는 두런두런 계속됐고, 이따금 소리죽여 웃기도 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에게 매우 특별한 밤이었다.
이후 수길은 야학을 다니며 정규학교 준비를 착실하게 했다. 이름 또한 다시 재명으로 고쳤고 집에는 편지도 보냈다. 안창호의 권유로 구해지는 대로 다양한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공립협회를 통해 여러 동포와 만나 교분을 나누고 토론을 즐기면서 신념을 다져나갔다. 바로 그즈음 만난 함동철로부터는 각자 서너 달 앞뒤로 귀국한 다음 평양에서 다시 만나 오인성을 소개받았다. 함동철과 오인성은 사제간이었다.
△공립신보 1906년 7월 14일 자 6면 1단∥경계자(삼가 말씀드리는 사람)는 본인의 이름을 수길(壽吉)로 통행이옵더니 다시 [在明]으로 고쳤사오니 지구(地區) 첨(僉) 동포는 아시압 노생길이스 류(로스앤젤레스 체류) 이재명(李在明) 고백(알림)∥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안창호와 의기투합한 양주은은 안창호가 역설한 우리 동포사회의 대동단결은 물론 공동체적 유대감을 강화하고 경제력을 키우는데 진력하게 된다. 공립협회 가입에 이어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신도가 되고 대동보국회도 가입해 국민회 합류에 일조도 한다(대한인국민회). 아쉽게도 삼포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악화로 이젠 같은 동양인에겐 빌려줄 땅이 없다고 하는 사회기류 때문이었다.
△공립신보 1906년 7월 30일 자 4면 2~3단∥入會請願人(입회청원인)∥상항(샌프란시스코)지방회에 입회하기를 청원한 제씨의 성명을 좌에 기재함∥윤경학 하상옥 임학수 정국신 손운선 신영해(?) *** 현진문 오문여 김형관 맹성기 김치옥 탁수봉 김창률 이현세 이명섭 이억만 이순오 조진옥 강순오 양주은 박순언 신봉세∥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수길과 양주은이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를 만날 무렵의 공립협회는 이미 미국 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영사관에 다름없었다. 그러한 인식은 멀리 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내로 반입되는 공립신보 등을 통해 협회의 위상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에 앞서 광무황제의 측근 헐버트는 1905년 11월 12일 공립협회를 방문하여 을사늑약의 조짐을 알려주기도 했었다. (5일 후 늑약 당일엔 늑약의 부당성과 원천무효를 알리는 황제의 친서를 미국 대통령에 전하려고 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체결은 했으나 광무황제가 인준을 거부한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 직후엔 공립협회의 위상과 역할을 추량할 수 있는 다음 일들이 있었다.
(계속)
참고:
함동철에 관한 간추린 자료와 그 해석
함동철(咸東喆)은 이재명 의사에게 오인성 여사를 소개(또는 중매)해 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이재명의 유족 조사(계부 임씨, 동생 임재호)> 연재 기사에 짤막하게 언급돼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 끝 글자가 거의 100% 렴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한자 喆(밝을 철)을 簾(발 렴)으로 임의대로 바꾸어 함동렴(咸東簾)으로 기록하는 이도 있다. 누구라고 말하긴 좀 그렇고, 모 유명 소설가의 글에서 발견했다.
그래서 추적해 봤다. 함동렴은 없고 함동철만 있다. 교사, 독립투사, 친일파가 등장한다. 喆, 哲, 轍이 나온다(喆과 哲은 同字 밝을 철/轍은 바퀴 자국 철). 喆과 哲은 우리 자료, 哲과 轍은 일본 자료에 나온다. 이 의사 원명의 수를 보면 본인의 알림 기사는 壽(목숨 수)인데 상당수 자료가 秀(빼어날 수)인 것처럼 그저 단순한 오류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동명 2인이다. 단, 일본 쪽 자료 轍은 오류가 확실해 보인다.
함동렴 함동철 검색 전 이재명 검색으로, 동아일보 기사에 언급된 함동철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원문을 최대 크기로 확대해서 봐도 럼 아니면 렴이다. 얼른 보면 그렇다. 그러나 찬찬히 보면 역시 ㅌ의 첫 획은 기울어있어 붙어 보이는 것일 뿐, ㅕ의 한 획은 지워져 있고, ㄹ의 왼쪽은 붙어있고 끝 획이 생략 또는 지워져 있다. 텰이 맞다. 텰은 철로 읽는다. 따라서 철이다. 한자 또한 밝을 철, 喆로 돼 있다.
<주요 도움말: ㅁ으로 보이는 ㄹ의 원형은 '사람과'의 ㄹ을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12일 자 2면 9단(5~9단 상자)∥絞殺 된 李在明의 遺族 調査<아내를 잃은 뒤에…(讀者課題 記者記事 二)>∥(재명이가) 미국 다녀 나와서도 또 로국(露國/러시아)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니 길이 막혀서 못 들어가고 그때에 미국 갔다 와서 성모여학교(聖母女學校/평양)에서 교사 노릇 하던 함동철(咸東喆)이라는 사람과 전 중화군수(前中和郡守)의 아내 소개로 당시 성모여학교에 다니든 오인성(吳仁星)과 혼인을 하였답니다. 얼마 후에 재명이가 또 서울로 간다고 하기에 그 후로는 경성에 있는 줄만 알았더니 어떤 날 순검이 나를 잡으러 왔기에 경찰서에 잡혀가서 보니 뜻밖에 그 애가 총리대신인가 누구인가를 죽이려고 하였다고 말합디다. 그때에 일주일을 갇혔다 나왔는데 얼마 후에 들으니 그 애가 목 잘려 죽었다고요.∥잘리다: (어떤 대상이) 1. 날카로운 연장 따위로 베여 동강이 나거나 끊어지다 2. 잘록할 정도로 단단히 동여매어 지다 <이재명 의사의 교수형은 명백한 위법이었다.>∥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전 중화군수의 아내에 관하여
추계 최은희(1904~1984) 유고집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문이재, 최은희 2003)'의 오인성 편을 보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귀국한 이재명이 평양 성모여학교 교사 함마리아를 방문하여 오빠의 소식을 전해주었다고 하면서 함 선생이 오인성의 어머니에게 '이재명을 인성의 신랑으로' 권했다고 한다. 따라서 함동철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함마리아가 바로 '전 중화군수의 아내'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재명 의사가 '평양부 중화군 상원면 윤 도사의 집 사환'이었으니만큼, 윤 도사가 중화군 군수를 지냈었다면 윤 도사의 부인 또한 '전 중화군수의 아내'일 수 있겠다.
<윤 도사의 도사는 도를 닦아 경지에 이른 사람 道士일 수도 있으나, 성씨를 붙여 도사라 이르면 1882년(고종 19) 폐지된 종오품 都事로 봐야 한다. 조선 시대 都事는 각 도의 관찰사(감사)를 보좌하거나, 의금부 등에 소속되어 관리의 감찰 등을 맡아보던 벼슬이었다. 윤 도사는 전 도사, '관찰사보좌관'을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검색
#1. 문서 일본외무성기록 7건 중 2번 1건
<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西…12월 16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지방 조선인의 동정 1911-01-11 鳥居(블라디보스토크 通譯官) 원문이미지>는 토리이(鳥居) 통역관이 1910년 12월 23일 작성하여 1911년 1월 11일 발송한 보고서 색인어 목록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보고서 원문 이미지 뷰어☜)
'색인어/이름: 安昌浩, 崔鳳俊, 李甲, 白元甫, 金晩植, 金秉學, 金顯土, 李剛, 金秉學, 張景根, 咸東哲(咸東轍), 金成元, 金奎涉, 高昌俊, 趙昌鎬, 李尙雲, 黃公道, 韓日成, 李鍾浩, 李範錫, 金炳喆, 李學權, 俊昌號, 李宗勝, 李相卨, 朴齊範, 尹炳翶, 宋太衛, 安定根, 姜順琦, 徐相琦, 高ꝣ範, 金起龍, 金락시, 吳周赫, 金學萬(조선인민회 회장), 鄭在寬, 金致甫(慈善共濟會 위원장)/지명: 浦潮斯德(블라디보스토크), 烟秋(크라스키노)/단체: 三十人派, 慈善共濟會, 朝鮮人民會/사건: 신문 재발간운동, 李範允 체포, 慈善共濟會 창립위원회 개최, 朝鮮人民會 재선거/기타: 러일조약'
#2. 문서 통감부문서 16건 중 16번 1건
<16 (343) [主犯 安應七의 2월 1일부터 6일까지의 진술 개…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 (哈爾賓事… 통감부 7권 국역>은 1910년도 문서(안응칠은 안중근 의사의 아명)이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보고서 원문 이미지 뷰어☜)
'一. 鄭順萬·咸東哲·金顯土에 관해서는, 鄭順萬은 앞서 말한 것과 같고 咸東哲은 천주교도로 무직자이다. 金顯土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李鎔翊을 살해하고자 한 자로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 사이에서는 일본인의 사주를 받은 親日黨이라는 평이 있는데 지금은 러시아 東洋大學校의 교사로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3. 문서 한국근대사자료집성 5건 중 5번 1건
<5 (38) 排日的韓人名簿送付ノ件 1910-01-13 在浦潮總領事 大鳥富士太郞 要視察韓國人擧動 3>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가 작성한 '배일적 한인 명부 송부의 건'으로 307인의 명부에 함동철이 들어있다. 폭도가입자로(의병) 못박고 있다.
'咸東哲 暴徒加入者目下浦潮韓人町ニ居住シ大東共報社ニ關係アリト云フ'
#4. 문서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0건 중 9번 1건
<9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8 의병편XI (三) 六月, 咸鏡道 韓國駐劄軍參謀部>는 접경지역 함경도의 일본군 참모부가 명치 43년(1910년) 5월 조사한 간도지역과 연해주지역의 정보 '청 노령 내의 적도와(의병) 배일파 약력'이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二. 徘日派/淸 및 露領에 居住하는 韓人은 모두가 排日派에 屬하는 者라고 볼 수 있어 일일이 그 姓名을 調査하기는 어렵다고 하지마는 알려진 主要한 結社 및 人名을 列擧하면 대략 左와 같다./大東共報/浦鹽에서 李剛 愈鎭律 金起烈 趙尙元 등의 經營下에 發行되는 新聞으로 今年 一月 中旬 經濟上 理由로 廢刊하였으며 그 發行 名義人이었던 「미하일로푸」는 安重根 救濟를 위하여 募集된 金錢을 消費한 것과 實績이 오르지 않은 것으로 因하여 信用을 잃었으며 또 編輯長이었던 李剛(安重根과 親交가 있음)은 廢刊 後 「니코리스크」에 있다가 三月頃 西北學會에 投身하기 위하여 京城으로 왔다고 함./그 후 同 新聞은 有志들의 運動으로 四月 二十五日 다시 大東共報의 名義로 再刊行되기에 이름(每週 木 日)./……/會員의 主要한 人物은 左와 같다./王長東(舊名 鄭淳萬)/今年 二月 浦鹽에서 前 居留民 會長이었던 梁成春을 殺害한 罪로 현재 投獄 中/田明雲 「스티븐」 暗殺事件의 連累者로서 保釋出獄 後 踪跡不明/咸東哲 李鴻基 金龍煥 韓景鉉 金延龍/孫某/備考: 同義會는 前에 李範允을 會長으로 하여 日露戰爭 當時에는 我軍에 對하여 反對 行動을 취하였던 組織으로서 한때 解散한 듯하였으나 昨年 三月頃부터 復興하였음.'
#5. 편년자료 고종시대사 1건
<1 露國 및 上海 等地에 있는 1909년 12월 10일 고종시대사 6집>은 재합이빈 일본총영사가 통감부 총무장관에게 올리는 합이빈사건(하얼빈사건) 보고서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 이토히로부미 저격사건 후 취조한 배일적 한인 명단과 함께 취조 사실만 알리는 간단한 내용이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露國 및 上海 等地에 있는 排日的 韓人 崔在衡 李範允 金起龍 李瑋鍾 李範晋 嚴仁燮 田明雲 崔鳳俊 李相卨 金仁洙 姜鳳俊 李利俊 咸東哲 金錫永 車錫甫 王昌東 許益 姜宅善 金允京 方德漢 鄭在寬 奇山道 金國甫 柳麟錫 金濟昇 尹日炳 兪眞律 李崗 金成年 李致權 禹連俊 金顯土 등에 關하여 取調한 事實을 在哈爾賓日本總領事가 統監府總務長官에게 報告하다. [출전]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9年 哈爾賓事件書類機發 第37號 明治 42年 12月 10日'
#6. 연속간행물 신한민보 2건
<1 신한민보 1909-02-17 무 01 07 상항지방회 보고 원문이미지>
<2 신한민보 1909-02-17 무 01 07 해삼위지방회 보고 원문이미지>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국민회로 통합한 직후의 국민회 기관지, 공립신보 지령을 이어받은 신한민보의 2건이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도 함동철(신입회원)이 있고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도 함동철(회원)이 있다. 상항과 해삼위, 동명이인이다.
그래도 혹시, 아직은 미래형인 '해삼위항에 지방회를 조직하고자'로 미루어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 상항 신입회원 함동철이 가입하자마자 곧 해삼위로 갈 예정이라거나 이미 가있는 상황이라 해삼위 회원 함동철로도 기록한 것은 또 혹시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엔 좀 억지스럽다. 기사 작성자 직접취재 여부, 국제통신 여부 및 제삼자 기사재료 전달 시 지역 간 거리와 물리적 이동시간, 날짜 등을 고려하면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냥 전자로 볼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원문을 한번 살펴보자.
<주요 도움말: 국민회 특파원 두 사람, 이강은 1907년 8월(공립협회 시절) 귀국하여 해삼위에 먼저 가 있었고 김성무는 1908년 1월 귀국하여 해삼위에는 12월에 갔다.>
△신한민보 1909년 2월 17일 자 1면 6단~7단(國民會報)∥상항지방회 보고, 해삼위지방회 보고∥본월(2월) 11일…/동일(11일) 상항지방회 〃장 허승원 씨 보고 내에 본월 통상회에 경과한 사항은 여좌하니 신입회원은 이상설…함동철…/본월 14일 아령 해삼위에 파송한 본회 대리원 김성무 이강(본명 이정래/이명 이필래) 양 씨의 보고를 거(據)한즉 본원 등이 본회 통용장정(通用章程)을 의하여 거(去) 2월 7일에 해삼위항에 지방회를 조직하고자 이 보고라 하다./동일(14일) 해삼위지방회 회장 오주혁 씨 보고 내에 본회 위임원 김성무 이강 양 씨의 인도함을 인하여 본회 장정을 의하여 지방회를 설립하고 임원급 회원 명록을 좌기, 앙보라 하다.…회원…함동철…∥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1907년의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국민회 상항지방회 신입회원으로 올라있어 잠깐 짚어본다. 정사 이상설과 부사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가 차석보의 아들인 귀화 러시아인 차고려(니콜라이)의 안내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노어 불어 영어 등 7개국어에 능통한 약관의 부사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때 이동녕 윤병일(혹은 윤일병) 김현토(혹은 김현도) 등 세 명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수행했다고 한다. 통감부문서(밀정의 보고서)엔 '이준 이상설과 이곳의 부가 차석보의 아들 모 외 3명(☜)'으로 기록돼 있다. 수행원 이동녕은 처음부터 선정됐던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두 명은 만일을 몰라 경호차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이준 열사 서거 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를 순방하며 특사활동의 연장선에서 외교활동을 펼친 다음, 이위종이 먼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908년 4월 동의회 창설에 참여했고, 이상설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다 1909년 4월에야 정재관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다. 회원 가입은 본명 이상설로 했지만 이내 이름을 '이당'으로 바꿨으며, '국민회 전권 특파위원'이 돼 파견됐다. 한편, 위 신문 2면 5~6단에 '헐버트 교사 내상(來桑)' 기사가 있고, 통감부문서 1909년 9월 2일 자 '미국인 헐버트의 來韓 목적과 그 행동에 관한 보고'에 주의 인물 미국인 헐버트가 8월 31일 밤에 입경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역시 통감부문서 1909년 9월 14일 자 '미국인 헐버트의 행동에 관한 追報'에 약 10년 전 도미했던 (실제론 7년 전 안창호와 함께 도미했던) 정재관이 이번에 헐버트와 함께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이상설과 헐버트 및 정재관 등 3인은 적어도 1909년 2월부터 8월까지 서로 긴밀한 관계로 함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디에도 기록은 없지만, 1907년 10월 귀국 직후부터 1909년 12월 22일 거사 이전 동년 여름 8~9월 초 무렵까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오가며 안중근 의사와도 만나 친분을 쌓았던 이재명 의사 역시 이들 3인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안중근 의사와 이재명 의사의 친분에 관하여는 2부 초반부에서 좀 더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7. 연속간행물 한국근현대잡지자료 1건
<1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14호 1897-06-15 鐵鑛論 잡저 원문제공>은 순 한문 잡지 대조선독립협회회보에 실린 철광론이다. 여기서는 含錬鐵, 전혀 다른 얘기다.
'…不含錬鐵(불함동철/鍊鐵/練鐵/연철은 포함하지 않는다)…'
[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검색
#1. 원문정보 독립운동가 자료 5건
<1. 저명한 애국자들인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동지들을 추억하면서>는 만주·노령 방면 독립유공자로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이인섭(1888~미상/일명 강보국)의 수기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그리고 덕창국에서 같이 종사하였다는 함동철, 의사 현용주라는 자는 1920년 4월 정변 후에 소황령(소왕령,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노골적으로 일본 헌병대 지도하에서 조직되었던 “간화회” 간부들이었는데 놈들은 우리가 그 도시를 해방하니 중국 지방으로 도망하고 없었다. 당시 일반 여론은 함가(함동철) 놈이 김이직 선생을 없애고서 덕창국 재정을 잠식하려고 왜놈들에게 그를 무고하여서 김이직은 희생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진정한 내막은 사실이 좀 더 복잡하였다. 왜놈들은 당시 덕창국을 근거하고 공작하는 반일기관을 연구하기 위하여서 덕창국 근방에다가 여러 가지 이상에 간단히 지적한 바와 같이 정탐 망을 벌려 놓았으나 자세한 사정을 알기 위하여서는 평양에서 많은 금전을 주어서 함가(함동철)를 덕창국의 주인으로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왜병들은 발광하였던 것이다.'
<2. 안창호일기(1920.1.10~1920.4.27)>는 상해 임시정부 노동총판 시절의 일지로 중요한 일정은 번호를 매겨 예정사항으로 미리 적어두고 일과를 진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일지는 그때그때 수첩 등에다 적었다가 나중에 다시 한꺼번에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료의 제목은 일기로 돼 있지만 겪은 일이나 생각 등을 적은 일기가 아니라 그날그날의 일을 적은 일지다. 선생 자신도 일지를 기록했다. 3월 18일 자를 보면 두 번째 예정사항 '二, 日誌 記錄할 것'이 있고 여덟 번째 기록 '積日 未記 日誌(여러 날 쓰지 못한 일지)를 記錄하다'가 있어 확인된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民國 二年 一月 十五日 木 晴) 九時頃에 함동철(咸東哲) 氏 來訪하여, 明日 發程하여 海港(해삼위 항/블라디보스토크)으로 向하노라고 함에 서로 告別하다.'
<3. 旅順監獄에서의 安重根 陳述內容[1909.11.27](『統監府文書』 7)>에는 13항에 단지(斷指)의 목적과 의미, 이토히로부미 살해의 목적과 의미 등이 들어있다. 아명 안응칠로 돼 있는 진술서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함동철(咸東哲)은 평안도(平安道)의 사람이고, 사용인 박영갑(朴永甲), 김석용(金石用)은 수청(水靑)에서 한동(韓童)교육에 종사한다. 김낙훈(金洛勳)은 ′하보르포(ハボルポ)′(하바로프스크(ハバロフスク)를 말한다)까지 러시아어 통역을 하였으며 박대성(朴大成)도 러시아어 통역을 하였고 …(원본판독불가)…는 러시아(露國)사범학교 졸업자로서 한국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친다. 양성춘(楊成春)은 포석(浦汐)한인 거류민장(居留民長)을 하는 사람이다. 김치보(金致甫)는 포석(浦汐)의 상인이며 인사를 나눈 정도의 사람이다. 조창호(趙昌鎬)는 포석(浦汐)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 이상' (포석=포염=포조=포염사덕=포조사덕=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
[위 안중근 의사 진술 내용상 식당을 하는 조창호와 이재명 의사의 동지 조창호는 동명이인일 수 있으나 필자는 같은 사람으로 추정한다. 일단 해삼위지방은 이재명 의사의 제2의 거점, 2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청년권장회의 일부 동지는 도장조각 측량사무소 이발소 등을 하면서 연락처로 삼았고, 다른 일부 동지는 약장수 행상 등으로 각 지역 간 연락을 도맡았기 때문이다. 하여, 이재명 의사는 결결이 신분을 감춘 동지들의 도움으로 서울 평양 간도 연해주 등지를 무사히 왕래할 수 있었다.]
<4. 朝鮮人ニ關スル情報進達ノ件 (別紙 ; 共濟會設備委員會) [機密韓제81호 ; 1910.12.28] (『日本外交史料館資料』)>는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가 1910년 12월 28일 작성한 조선인에 관한 정보 진달의 건이다. 다음 내용은 1항 전문이다.
'1. 12월 22일 밤, 안창호(安昌浩)의 숙소에서 공제회 설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그 위원으로는 아래 5명이 개선(改選)되었다. 김상헌(金商憲), 김규섭(金奎涉), 조창호(趙昌鎬), 함동철(咸東轍), 한영근(韓永根)/김병학(金秉學)…(원본판독불가)…2명은 원래와 같고 백원보(白元甫)는 위원을…(원본판독불가)…'
[위 문건에 들어있는 이재명 의사 추도회를 잠깐 짚어본다. 두 명 이상 다른 밀정이 올린 서로 다른 정보, 추도회 날짜와 연설 내용 등을 비교 기록했다. 안창호 선생이 한민학교(개척리)에서 열린 이재명 의사 추도회에서 이 의사의 약력을 연설했다고 하는 정보의 24일 정보는 추도회를 26일에 할 것이라 했는데 문건 작성 당일 28일 정보는 지난 일요일(25일)에 했다고 한다(3항). 모국의 달라진 교과서와 한국민의 독서, 모국의 역사와 지리 등을 언급한 연설 정보를 기록하면서는 26일 밤이라고 했다(6항). 또한, 나라가 없으면 국민이 없다, 오늘날 한국이 있는지 없는지, 삼천리강산은 일본의 식민지 등을 언급한 연설 및 학생들의 국권 회복 대토론회 정보를 기록하면서는 제6항 연설의 다른 밀정의 보고라고 하면서 26일 오후 3시라고 했다(12항). 각 정보를 하나로 묶어보자. 이 의사 추도회는 1910년 12월 25일 일요일에 열렸고, 학생 대토론회는 추도회 다음날 26일 월요일에 열렸으며, 안창호 선생은 추도회 연설은 물론, 대토론회 개회 연설에 폐회 연설까지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12월 16일 以降 浦潮斯德地朝鮮人ノ動靜 (安昌浩ノ動靜・新聞在興企圖・慈善共濟會) [憲機 제68호 ; 1911.1.11] (『日本外交史料館資料』)>는 1910년 12월 16일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지역 조선인의 동정으로 [가] #1.의 블라디보스토크 토리이 통역관이 1910년 12월 23일 작성한 보고서의 국역이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12월 18일 자선공제회는 창립위원회를 개최하여 하기와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 위원장 김교보(金敎甫) (또는 김병학(金秉學) 안창호(安昌浩)의 2인)/위원 안창호(安昌浩) 김병학(金秉學) 백원보(白元甫) 장경근(張景根) 함동철(咸東哲) 김성원(金成元) 김현토(金顯土) 김규섭(金奎涉) 고창준(高昌俊) 조창호(趙昌鎬) 이상운(李尙雲) 황공도(黃公道)/이 회의의 목적은 첫 번째 자선사업을 할 것, 두 번째 블라디보스톡에 살고 있는 동인들을 상호 구제할 것, 세 번째 각자 개인의 일치단결을 내용으로 하고 내홍을 일소할 것 등으로 귀화청원에 관한 일을 취급하는 것이다. 상기의 자선공제회는 정보와 러시아 신문의 기고 기타 기사 등을 참작해 볼 때 신뢰할 수 있고 조합적인 성격의 것으로 조선인들 사이의 생활상태 개선을 목적…'
#2. 원문정보 신문류 44건
<1 권업신문 廣告(광고)…신한촌 하바로프스크 울리차 十一호家 德昌局 主人 崔錫●(최석●), 咸東哲(함동철) 告白 1912>
………
<4 권업신문 단군 대황조어진촬영…한 본을 구하여 얻은 지라. 일전에 본존거 김태봉, 함동철 씨와 상의하고 개이성 중국인 이완… 1912>
<5 권업신문 布告…제六四 채성하제五一 박희평제五二 김연호제四九 김병흡제四八 강택희제四七 함동철一千九百十三年… 1913>
………
<44 권업신문 덕창호 德昌號…미곡, 각종 잡화가 구비하오. 소왕령 덕창국 상점주인 #함동철_# #오봉화_# #정보리스_#… 1914>
44건 모두 연해주지역 의병계열 인사들과 귀화 한인들이 조직한 권업회(勸業會)가 발행한 권업신문이다. 4번 기사와 5번 포고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덕창국(약국) 덕창호(상점) 광고다. 咸東哲(함동철) 함동철이 나온다. (내용발췌 생략)
#3. 원문정보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건
<1 서명: 제16권 1910년대 국외 항일운동Ⅰ- 만주·러시아/절명: 2. 연해주 의병의 편성과 항일전>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60권 중 한 권이다. 다음 내용을 발췌했다.
'그 뒤 1908년이 되면 동의회는 최재형이 회장을 직접 담당하였으며, 그 휘하에 안중근과 엄인섭이 평의원으로 실제 업무를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었던 엄인섭은 경술국치 후 변절, 1911~20년 일제의 밀정으로 암약) 그밖에 백규삼白圭三·이경화李京化·김기룡金基龍·강창두姜昌斗·최천오崔天五 등의 의병장들을 비롯해 함동철咸東哲·정순만鄭淳萬·전명운田明雲·이홍기李鴻基·김룡환金龍煥·한경현韓景鉉 등 총 20~30여 명이 주요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회원 총수는 2~3천 명에 달하였을 만큼 방대한 규모의 결사였다. 그 가운데 정순만은 『대동공보』 주필로 활약하던 인물로 그가 의병 노선에 동조하고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던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또한, 전명운은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제의 대한침략을 옹호 찬양하던 스티븐스를 처단하여 한민족의 의기를 천명한 의사로 1908년 7월 출옥 후 베를린·모스크바를 경유하여 연해주로 건너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동의회가 언제 해제(해체의 오기 추정)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망 직전까지 활동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4. 소장도서 단행본 1건
<1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VII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8 단행본>에는 <해제(解題): 일본과 만주, 연해주지역 조선인 친일에 대한 접근> 명단에 咸東哲이 들어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2009) 러시아(6명) 함동철(咸東哲)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내용발췌 생략)
#5. 소장도서 전기류 2건
<1 최재형 박환 역사공간 2008 전기>
<2 최재형 박환 역사공간 2008 전기>
2건 모두 같은 책으로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전기다. 함동철이 들어있다. (내용발췌 생략)
[다] 함동철은 동명 3인/독립투사와 친일분자
[가] [나]의 연대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동명 3인이다. 미국에 있는 함동철, 미국 갔다 와서 이재명 의사에게 오 여사를 소개한 후 연해주 간도 상해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함동철, 그리고 처음부터 소왕령(우수리스크)으로 간 친일분자 밀정 함동철로 구분된다. 그 이해를 돕고자 연대를 중심으로 한 번 더 요약한다.
#1. [가]의 #6. 연속간행물 신한민보 2건, '1909년' 2월 17일 자 신한민보에 나오는 상항지방회 신입회원 함동철과 해삼위지방회 회원 함동철은 동명이인이 맞다.
#2. 이재명 의사는 '1907년' 10월 9일 귀국길에 올랐다. 따라서 '1909년' 2월의 상항지방회 함동철은 이 의사 이미 귀국하여 직접적인 연관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3. 이재명 의사는 1907년 10월 귀국 이후 1909년 여름까지 서울 평양 간도 연해주 등지를 오가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 2월의 해삼위지방회 함동철이 바로 오인성 여사를 소개한 '미국 갔다 와서 성모여학교에서 교사 노릇 하던 함동철'로 보이며 나아가 이 의사와 함께 해삼위를 왕래하다 아예 거기 눌러앉은 것으로도 보인다.
#4. [나]의 #1. <1. 저명…>에 나오는 1920년 4월 이후 소황령(소왕령)의 함동철과 #2. <44 권업신문…소왕령…1914년>의 함동철은 동일인물로 변절자가 틀림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그곳으로 갔다고 볼 수 있으며, 덕창국(약국) 덕창호(상점)에서 일하다가 어느 한순간 일제의 회유 감언이설에 넘어가 변절했던 게 아닌가 싶다.
#5. 분명한 것은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안창호 이강 이상설 최재형 전명운 등과 함께 활동한, 이재명 의사의 동지로 매국적 처단 의거를 함께 도모했으나 체포되지 않고 망명에 성공한 조창호와 함께 활동한 독립투사 함동철이 있었고, 또한 아울러 같은 평양 출신이긴 해도 전혀 다른 인물 친일분자 함동철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함께 보기1:
이재명 의사의 결혼 시기에 관하여
함동철의 소개로 오인성 여사를 알게 된 시기와는 또 좀 다른, 어렴풋이나마 실제 결혼 시기 추론이 가능한 단서들을 모았다. 발췌자료 중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 신민회 사건, 이른바 '105인 사건'은 고문도 악랄하게 확대 날조한 사건이긴 하지만 부분적으론 어느 정도 참고할만하다고 보아 '단서'로 삼았다. 이와 아울러 신민회 색출 와해가 목표였던 105인 사건 '발단 내막'까지 별도로 간략하게 한번 짚어본다.
[가] 단서
#1. 추계 최은희 여사는(1904~1984) 1970~80년대 초 집필한 유고집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문이재, 최은희 2003)'의 오인성 편에서 '1907년 겨울, 21세의 청년 이재명과 17세의 규수 오인성이 길일을 가려 동방화촉을 밝혔다.'고 하였다.
#2.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지성문화사)에 이 의사를 말하여 하와이 건너가서 공부하다가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두어 달 전에 귀국한 이재명이 아내 오인성과 다투는 소란 통에 이재명을 불러 만났는데 '그 후 한 달이 못 되어…'라고 하였다.
#3. 이 의사의 계부 임씨는 '미국 다녀 나와서도 또 로국(러시아)으로 들어간다고 하더니 길이 막혀서 못 들어가고 그때에 미국 갔다 와서 성모여학교에서 교사 노릇 하던 함동철이라는 사람과 전 중화군수의 아내 소개로 당시 성모여학교에 다니든 오인성과 혼인을 하였답니다.'라고 하였다. (길이 막혀 못 들어간 그때 결혼 유의)
#4. 다음은 이재명 의사의 동지 김용문(김중화/김동산)이 신태양 1958년 9월호에 김동산으로 발표한 <이완용 암살 의거 수기(월간중앙 2004년 8월호 역사발굴-정리 김종욱 서지연구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남녀 학생들의 교제는 자유롭고 떳떳하진 못했다. 남녀유별이라는 옛날 풍습은 그대로 완고하여…여학생은 흡사 수녀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자유로 만날 수도 없었고 자유롭게 연애편지 한 장 왕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청춘남녀의 사랑이란 극히 신비스러운 것이어서 이러한 철장막 속에서도 사랑은 사랑대로 장미꽃을 피울 수 있었다. 사랑의 신은 그들에게 사랑의 축복을 내려주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랑을 속삭이게 된 두 청춘은 결혼을 했고 백 소사의 집 하숙방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오인성은 학교를 계속 다녔다.…'
이재명 의사를 동지 이응삼이 소개하여 1909년 여름 평양에서 처음 만난 김용문이 두 사람의 연애와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시기에 있어 #2. #3.과 좀 비슷하다.
#5. 다음 내용은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05인 사건 신문조서 Ⅱ 중 오대영 신문조서에서 발췌했다. 이재명 의사 아직 미혼임을 암시한다. (전문보기☜)
'…(1909년) 여름휴가로 들어갈 즈음…답 처음에 尹致昊가 「첫째 五賊·七賊을 살해하면 된다, 그 이유로는 인민도 죽이고 토지도 빼앗아버리게 되므로 민심을 격동시키기 위해서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즉 安昌浩가 「그대로이다, 살해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도 없고 집도 없고 아무런 관계할 일도 없는 담대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데 그러한 사람은 없느냐」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입구에 있던 李在明이 「내가 담당하여 실행하겠다, 나는 이전부터 그런 생각으로 있었다, 그에 관하여는 나 혼자가 아니라 京城에도 있다.」…'
明治 45년(1912년) 4월 15일에 작성된 조서이며, 위 발췌한 대목은 '1909년' 여름의 일로 추정된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1908년) 安昌浩가…그해 음력 8월 18일인가 20일경에 대성학교 예비과에 입학…다음 해(1909년) 음력 5월…그 후 음력 6월인가 7월경 하여튼 여름휴가로 들어갈 즈음에…' 등이 이어진 다음에 나오기 때문이다.
<오대영은 이재명 의사 귀국 7일 후, 그러니까 1907년 10월 16일 차이나 선편으로 귀국했다. 공립신보 1907년 10월 18일 자 동포귀국 기사에 함께 나와 있다. 따라서 인용한 대목의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은 '햇수로 5년 전'인 1908년으로 봐야 한다.>
#6. 다음 내용은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권 105인 사건 신문조서 Ⅱ 중 옥성빈 신문조서에서 발췌했다. 이재명 의사 이미 기혼임을 암시한다. (전문보기☜)
'…답 그것은 3년 전(1909년) 음력 7월경…安昌浩가 「…암살을 할 자는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부모나 재산관계로 걱정이 없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와 같은 사람은 없느냐」고 말한즉, 「부모·처자·재산이 있다 하여도 결심을 하면 못할 일은 없으니 그런 관계가 있는 자도 담대하면 지장이 없지 않은가」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랬더니 李在明이 자기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므로 자기에게 허가하여 달라고 자원을 했다. 그리하여 安昌浩가 지금 듣는 바와 같이 李在明이 자원을 하니 어떠냐고 일동에게 묻자 일동은 그것이 좋겠다고…'
明治 45년(1912년) 4월 22일에 작성된 조서이며, #5.와 마찬가지로 '1909년' 여름의 일로 추정된다. 이재명 의사 자원 내용은 비슷하나 '기혼 미혼 뉘앙스'가 다르다.
'…문: 평양 대성학교 운동회를 기억하는가? 답: 한 연병장에서 열렸던 대회를 기억한다. 문: 윤치호가 그 대회에 참석한 것을 아는가? 답: 그를 두 번 보았다. 한번은 운동회 때이고 또 한 번은 여름 방학식 때이다. 이 방학식은 태극서관에서 열렸던 것 같다. 문: 그때 피고는 참석한 사람들에게 李完用과 李容九가 암살되어야 하며 그들을 죽일 지원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李在明이 자기는 아직 미혼이라며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는데 기억하는가? 답: 모른다. 문: 피고는 이재명 혼자에게는 너무 벅차다고 생각해서 그를 도와 줄 2~3명을 더 지명했다. 이승훈도 마찬가지…'
제10회 공판은 1912년 7월 11일에 열렸다. #5. #6.과 마찬가지로 '1909년' 여름의 일로 추정된다. 한 연병장은 대성학교 근처 어디쯤의 '진위대 연병장'을 말한다.
[나] 추론
핵심은 [가] #3.의 내용이다. 이재명 의사가 결혼한 시기는 러시아로 들어가려다 길이 막혀서 못 들어간 그때였다고 한다. 언제였을까. #1.의 결혼 시기는 나머지 단서들에 비추어 '어떤 기억이 뒤섞인' 착각으로 보인다. #5.와 #6.의 암시는 약혼 시기쯤일 수도 있다. 이제 이재명 의사가 1909년 여름까지 서울 평양 간도 연해주 등지를 오가고 있었음을 염두에 두고 각 단서를 하나로 묶어보자. 그때가 보인다.
이재명 의사 '무슨' 일로 해삼위를 한 번 더 가려다 길이 막혀 못 간 바로 그때 결혼했다, 이재명 의사 결혼 직후 해삼위 다녀왔다, 이재명 의사 해삼위 간 사이 오인성 여사 진초학교 임시교사로 갔다, 이재명 의사 해삼위서 귀국하던 길로 곧 진초학교 오인성 여사한테 갔다가 크게 다퉜고 김구 선생 만났다…하여 김구 선생을 만났던 11월 말 이전 9월~10월 어느 때가 바로 그때, 실제 결혼 시기라는 결론이 나온다.
○105인 사건 발단 내막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 신민회 사건, 이른바 '105인 사건'은 완전한 날조 모략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일제는 대한신민회 취지서 및 통용장정 등을 입수, 1909년 3월 초부터 요시찰 내사, 양기탁 안창호 등 주요 임원들을 특별 감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프랑스교회 명동성당 대주교 뮈텔이 대한신민회 회원으로 추정되는 안명근을 밀고했었다. 뮈텔 주교 일기에 의하면 빌렘 신부가 본인에게 일단의 한국인들이 총독에 대한 음모를 꾸미는데 그 중심에 야고보 안명근이 있다고 편지로 알려와서 (아마도 안중근 의사 사촌 동생 안명근이 1910년 '총독 처단에 1차 실패하고 2차 시도' 과정에서 빌렘 신부에게 고해성사) 이 내용을 일제의 아카시 장군에게 알리고자 눈길을 헤치고 그를 직접 찾아갔다고 한다(1911년 1월 11일). 뮈텔은 토마스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 직전 '최후미사' 집전도 거절했었다. 뮈텔로 비롯된 105인 사건, 신민회는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사실 뮈텔 이전에 이미 프랑스영사부터 일제의 밀정 노릇을 했으니 1907년의 '헤이그 특사 파견' 또한 사전에 알게 된 프랑스영사 밀고로 끝내 실패했었다. 그저 한 개인이라면 또 혹 몰라도 프랑스 일국 외교관과 '하느님의 종 성직자'가 짜장 밀정 노릇을 했다. 자유 평등 박애의 3대 이념이 기조가 돼 피지배 민족의 자주독립 쟁취 의식을 고취케 했던, 프랑스 대혁명(1789년)이 영 무색하다.
<당시 뮈텔은 소송에서 두 차례 패한 명동성당토지 '수녀원 입구 진고개 땅' 소유권 문제를 안명근을 밀고하여 일거에 해결하고 오솔길에 불과했던 성당 진입로까지 확장할 수 있었고, 이재명 의사가 역적 이완용을 처단한 지점은 진입로 확장 전의 동쪽 고개 아래 동쪽 몇 걸음, 따라서 지금의 '이재명 의사 의거 터' 기념비 위치는 잘못된 위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3부 중반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함께 보기2:
이재명 의사의 '청년권장회' 동지규합 관련 내용
위의 [가] #5. #6.의 오대영 옥성빈의 신문조서 발췌내용은 이완용 처단을 위한 이재명 의사의 '청년권장회' 동지규합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발췌한 내용의 전후 내용을 조금 더 살펴보자. 동지 추가규합으로 추정된다.
#1. 오대영 신문조서
'…문 그때 李在明이 자원하자, 安昌浩인가가 「너 혼자서는 안 된다, 그밖에 희망하는 자는 없느냐」고 말했다는데, 어떠한가. 답 과연 그것은 安昌浩가 말한 것인데, 그리하여 방금 전에 진술했던 것처럼, 자기 혼자가 아니라 京城에도 釜山에도 동지가 있다고 李在明이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또 趙昌浩·李學泌·崔昌善·金炳西 日新學校의 학생 2명 등, 하여튼 6·7명이었다고 생각된다. 李在明이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우리도 결심하여 함께 실행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랬더니 尹致昊였는지 安昌浩였는지는 잘 기억할 수 없으나, 이 두 사람 중(누가) 「아무래도 이 일을 하는 데는 10여 명이나 20명 정도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밖에는 이에 적당한 자가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때 安州에서 安奭이 와 있었는데, 그렇다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2·3명을 선발하여 보내겠다고 말하였고, 李昇薰 자기도 定州 방면에서 4·5명을 선발하겠다고 말하여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로부터 李在明은 京城에 가기까지 太極書館 2층에 숨어 있었으며, 그 후 安昌浩에게 우유를 가지고 왔던 太極書館의 사환이 마침 내가 학교 숙직을 할 때에, 李在明이 전날 밤에 와서 安泰國으로부터 돈을 얻어 갔다고 말하였으므로 이것은 분명 살해의 준비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오후에는 太極書館 2층에 가서 李在明이 安泰國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리고 처음 尹致昊 등이 살해에 관한 상의를 하고 나서부터 8·9일 후였다고 생각된다. 太極書館에 갔다가 釜山에 있는 金丙祿을 만나게 되었으므로, 釜山에 가 있다가 언제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저께 와서 하룻밤은 여관에서 하룻밤은 太極書館에서 잤다는 것이었다.…답 그로부터 李昇薰이 선발한 4·5명, 安奭이 3명인가를 선발해 보내 주었다. 太極書館에서 만났으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과 平壤의 자원자가 자주 太極書館에 모이고, 李昇薰·安泰國의 지시로 단총과 칼을 준비하였으며, 음력 7·8월경에 모두 헤어져 京城에 갔고, 그 후 그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그동안 李完用을 암살하고자 했던 것이다.…明治 45년(1912년) 4월 15일…'
#2. 옥성빈 신문조서
'…답 그것은 3년 전(1909년) 음력 7월경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더운 때로서, 大成學校가 휴가 할 때였는데, 尹致昊·李東暉·柳東說·李甲·李鍾浩, 기타 梁起鐸도 왔었다고 생각된다. 문 어디로 왔는가. 답 大成學校에 와서 鎭衛隊 練兵場에서 운동회를 개최하고, 箕子廟에서 演說會를 개최하며 6·7일간 체재하였는데, 어느 날 밤 太極書_에 이상 말한 자는 전부, 아랫사람들도 4·50명. 모두 6·70명이 모여, 처음에 尹致昊가 「나는 다망하여 자주 올 수가 없으니 일동이 신민회에 진력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비밀을 지키고, 이 회의 목적인 五賊·七賊을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한편으로는 회비를 모아 西間島에 보내 무관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관하여는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건대 시대가 절박하여 그대로 버려둘 수가 없으니 시급히 암살을 하여 민심을 격동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자 일동은 지당한 말씀이라고 찬성하였다. 安昌浩가 「회장이 자주 와서 말을 듣게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회원은 열심히 시급하게 진행하여 주기 바란다, 암살을 할 자는 담대하지 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부모나 재산관계로 걱정이 없는 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와 같은 사람은 없느냐」고 말한즉, 「부모·처자·재산이 있다 하여도 결심을 하면 못할 일은 없으니 그런 관계가 있는 자도 담대하면 지장이 없지 않은가」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랬더니 李在明이 자기는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므로 자기에게 허가하여 달라고 자원을 했다. 그리하여 安昌浩가 지금 듣는 바와 같이 李在明이 자원을 하니 어떠냐고 일동에게 묻자, 일동은 그것이 좋겠다고 대답하며 李在明을 칭찬하였는데, 安昌浩가 「李在明 한 사람으로서는 안 된다, 회원은 이 결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즉, 李在明은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자가 그밖에도 있다고 했으나, 그 성명도, 있는 곳도 지금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趙昌浩·李學泌·曺某, 하여튼 7·8명이 실행하겠다고 자원하고, 安泰國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실행할 자는 20명 정도로 정하고 차차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으며, 李昇薰이 자기가 담대한 자 4·5명, 安奭이 2·3명 대담한 자를 선발하여 파견하겠다고 말하였다. 尹致昊가 그와 같이 정하였으면, 거기에는 財錢과 기계(무기)의 준비도 필요할 것이니, 李昇薰·安泰國이 주관하여 준비하고, 20명은 점차 모집하여 지시를 하라고 한즉, 두 사람이 2명만으로는 大任인 관계로 주관할 자를 더 정하여 줄 필요가 있다고 하므로, 尹致昊가 회원에게 물어, 安泰國에는 新民會 평의원이 도와주고, 財錢은 金鎭厚가 담임하여 준비하며, 李昇薰에게는 北道의 주관자가 보조하여 주기로 정하고 헤어졌다.…明治 45년(1912년) 4월 22일…'
<오대영과 옥성빈의 진술로 미루어, 이 의사의 동지규합 및 자금준비 등은 1909년 여름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거사는 동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경이었다.>
2012.04.01(일)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