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2]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12회)
이토히로부미, 기실 특사단 일행이 장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헐버트가 러시아영사와 프랑스영사를 따로 만나 두 나라 정부에 한국특사 알선을 청하자 프랑스영사는 우행이라며 거절했고, 통감부에 밀고까지 해버렸다.
'일찌감치 먹어 치울 수 있었던 이씨조선, 그동안엔 떨떠름해하는 비협조 각국에다 폭도들의 난동으로 통감부에 그쳤지만, 인제 숨 고르기는 끝났다.' 이토히로부미는 곳곳에 심어둔 밀정의 보고를 받아가며 특사단에 한발 앞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이 좋아 만국평화, 식민지를 두고 싸워봤자 서로가 손해라는 교집합 아래 강대국 간 이해 조정의 장으로 출발한 만국평화회의였다. 몇몇 강대국 외 나머지 약소국들은 들러리에 불과했고, 대한제국은 진작에 암묵적 공인 일제식민지였다.
헐버트가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인 겸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영국인 스테드와 사전교섭, 본회의와는 별개로 이위종이 각국 기자단 앞에 열변을 토하고 몇몇 신문에 실린 게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 그게 다였고 특사단의 모든 노력은 만사휴의였다.
<헐버트의 사전 교섭으로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스테드가 주선, 기자단의 협회보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6월 30일 자에 대한제국의 성명서 '공고사'를 싣고, 7월 5일 자에 이위종의 '기자회견형식의 연설'을 싣고, 또 7월 9일 한국특사 초청연설회가 국제기자협회에서 열렸으나, 어찌 된 셈인지 이위종의 열변 '한국의 호소'와 각국 기자단의 '일본 반대 결의문(수정안 채택)' 등은 정작 만국평화회의보에는 실리지 못하고,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 등 다른 신문들에만 실렸다고도 전한다.>
△특사 3인의 숙소 바겐스트라트(Wagenstraat) 124번지 융 호텔(Hotel De Jong) 오늘날의 모습과 당시 모습이다. 이곳 3층의 한 방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로써 억울함을 호소한 이준 열사, 이후 열사는 세계평화의 다른 이름이 되었고, 호텔도 이제 이준 열사 기념관이 되어 'YI JUN PEACE MUSEUM'이 부착돼 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네덜란드) 및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프린세스그라트(Princessgracht) 6A 번지(지금의 7번지) 국제기자협회 오늘날의 모습과 당시 모습이다. 헐버트의 사전 교섭으로 기자단의 협회장이 주선, 한국특사 초청연설회가 7월 9일 밤 바로 여기서 열렸고, 부사 이위종 각국 기자 앞에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 열변, 각국 기자들은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네덜란드) 및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위종이 부친 이범진의 급한 연락으로 러시아에 다녀온 며칠 새 이준은 7월 14일 자결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한, 이준의 한, 분노에 치를 떨던 이상설과 이위종은 장례마저 미루고(임시매장)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제외하고 국제사회의 영향력이 제일 컸던 미국에 호소하려던 마지막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을사늑약 직후 헐버트를 외면했던 루스벨트였다. 새삼스레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만나 줄 이유는 없었다. 즉 '문명국(강대국)의 위세'였다.
이준 열사 장례식은 이상설과 이위종이 돌아온 후 9월 6일에야 치러졌고, 고국에선 이미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이토히로부미는 본국 정부와 사전에 조율한 미리 짜인 각본대로 작업을 시작, 6월에 들어서자 우선 이완용내각을 출범시켰다.
이후 헤이그의 상황 보고를 받아가면서 7월 12일의 본국 내각 결정(한국 내정 장악 방침)에 따라 특사단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7월 19일(03시) 강제로 퇴위케 하고 바로 다음날 융희황제를 즉위시켰다. 융희라야 다음 단계 작업이 수월할 듯했다.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내각이다. 앞줄 중앙 흰옷이 이토히로부미이며 옆에 앉은 이완용은 다리를 꼬았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어서 7월 24일 밤엔 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정미칠조약을 체결했고, 이튿날 황제를 겁박하여 재가를 얻었다. 그리고 7월 31일 밤, '황제 명의로' 군대해산 조칙을 내려 8월 1일~9월 3일 해산을 끝냈다.
<군대해산(軍隊解散)∥☞…황제의 조칙이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②…이토히로부미 온갖 움직임 파악하고… ☞조선왕조실록-순종 즉위년 7월 31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고종시대사>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칭만 남게 되었다. 그 허울마저 사실상 시간문제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식민지시대의 시작,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도적의 수괴 이토히로부미의 술책으로 비롯됐고, 희대의 매국적 이완용이 있어 가능했다.
△일본군에게 접수된 한국 황실 및 한국군 병사(兵舍)∥일문 요약/1907년 7월 19일 아침, 궁궐을 향해 배치된 일본군 포차/7월 20일 오후 2시 30분에 열리는 융희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