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12]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4. 29. 02:32

(12회)

 

이토히로부미, 기실 특사단 일행이 장도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헐버트가 러시아영사와 프랑스영사를 따로 만나 두 나라 정부에 한국특사 알선을 청하자 프랑스영사는 우행이라며 거절했고, 통감부에 밀고까지 해버렸다.

 

'일찌감치 먹어 치울 수 있었던 이씨조선, 그동안엔 떨떠름해하는 비협조 각국에다 폭도들의 난동으로 통감부에 그쳤지만, 인제 숨 고르기는 끝났다.' 이토히로부미는 곳곳에 심어둔 밀정의 보고를 받아가며 특사단에 한발 앞서 손을 쓰기 시작했다.

 

게다가 말이 좋아 만국평화, 식민지를 두고 싸워봤자 서로가 손해라는 교집합 아래 강대국 간 이해 조정의 장으로 출발한 만국평화회의였다. 몇몇 강대국 외 나머지 약소국들은 들러리에 불과했고, 대한제국은 진작에 암묵적 공인 일제식민지였다.

 

헐버트가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인 겸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영국인 스테드와 사전교섭, 본회의와는 별개로 이위종이 각국 기자단 앞에 열변을 토하고 몇몇 신문에 실린 게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 그게 다였고 특사단의 모든 노력은 만사휴의였다.

 

<헐버트의 사전 교섭으로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스테드가 주선, 기자단의 협회보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6월 30일 자에 대한제국의 성명서 '공고사'를 싣고, 7월 5일 자에 이위종의 '기자회견형식의 연설'을 싣고, 7월 9일 한국특사 초청연설회가 국제기자협회에서 열렸으나, 어찌 된 셈인지 이위종의 열변 '한국의 호소'와 각국 기자단의 '일본 반대 결의문(수정안 채택)' 등은 정작 만국평화회의보에는 실리지 못하고,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 등 다른 신문들에만 실렸다고도 전한다.>

 

△특사 3인의 숙소 바겐스트라트(Wagenstraat) 124번지 융 호텔(Hotel De Jong) 오늘날의 모습과 당시 모습이다. 이곳 3층의 한 방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로써 억울함을 호소한 이준 열사, 이후 열사는 세계평화의 다른 이름이 되었고, 호텔도 이제 이준 열사 기념관이 되어 'YI JUN PEACE MUSEUM'이 부착돼 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네덜란드) 및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프린세스그라트(Princessgracht) 6A 번지(지금의 7번지) 국제기자협회 오늘날의 모습과 당시 모습이다. 헐버트의 사전 교섭으로 기자단의 협회장이 주선, 한국특사 초청연설회가 7월 9일 밤 바로 여기서 열렸고, 부사 이위종 각국 기자 앞에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 열변, 각국 기자들은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네덜란드) 및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위종이 부친 이범진의 급한 연락으로 러시아에 다녀온 며칠 새 이준은 7월 14일 자결하고 말았다. 우리 민족의 한, 이준의 한, 분노에 치를 떨던 이상설과 이위종은 장례마저 미루고(임시매장)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일본 제외하고 국제사회의 영향력이 제일 컸던 미국에 호소하려던 마지막 시도도 실패로 끝났다. 을사늑약 직후 헐버트를 외면했던 루스벨트였다. 새삼스레 자국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만나 줄 이유는 없었다. 즉 '문명국(강대국)의 위세'였다.

 

이준 열사 장례식은 이상설과 이위종이 돌아온 후 9월 6일에야 치러졌고, 고국에선 이미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난 후였다. 이토히로부미는 본국 정부와 사전에 조율한 미리 짜인 각본대로 작업을 시작, 6월에 들어서자 우선 이완용내각을 출범시켰다.

 

이후 헤이그의 상황 보고를 받아가면서 7월 12일의 본국 내각 결정(한국 내정 장악 방침)에 따라 특사단 책임을 물어 광무황제를 7월 19일(03시) 강제로 퇴위케 하고 바로 다음날 융희황제를 즉위시켰다. 융희라야 다음 단계 작업이 수월할 듯했다.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내각이다. 앞줄 중앙 흰옷이 이토히로부미이며 옆에 앉은 이완용은 다리를 꼬았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어서 7월 24일 밤엔 통감 이토히로부미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정미칠조약을 체결했고, 이튿날 황제를 겁박하여 재가를 얻었다. 그리고 7월 31일 밤, '황제 명의로' 군대해산 조칙을 내려 8월 1일~9월 3일 해산을 끝냈다.

 

<군대해산(軍隊解散)∥☞…황제의 조칙이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②…이토히로부미 온갖 움직임 파악하고… ☞조선왕조실록-순종 즉위년 7월 31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고종시대사>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칭만 남게 되었다. 그 허울마저 사실상 시간문제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식민지시대의 시작, 일제강점기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도적의 수괴 이토히로부미의 술책으로 비롯됐고, 희대의 매국적 이완용이 있어 가능했다.

 

△일본군에게 접수된 한국 황실 및 한국군 병사(兵舍)∥일문 요약/1907년 7월 19일 아침, 궁궐을 향해 배치된 일본군 포차/7월 20일 오후 2시 30분에 열리는 융희황제 순종 즉위식에 가는 각국 영사 등 이토 통감 일행의 행렬/일본군에게 접수된 한국 반란병의 병사(兵舍/兵營)1907년 7월 19일 오후 4시 50분경, 황태자 대리의 소식 즉, 대황제 폐위의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격분한 전동(전의감골/지금의 견지동)에 있던 경성시위보병 제1연대 제3대대 100여 명과 제2대대 일부 병력이 봉기, 동우회 등이 앞장선 군중과 함께 종로 일대에서 일본경찰과 일전을 벌였고, 이후 8월 1일 군대해산 당일 오전 8시경, 서소문에 있던 경성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군인 된 자 나라를 지킬 수 없고 신하 된 자 충성을 다할 수 없으니 만 번을 죽어도 애석함이 없노라(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군불능수국 신불능진충 만사무석)> 하는 유서를 남기고 할복한 다음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결하자 이에 격분한 제1연대 제1대대 및 제2연대 제1대대 소속 전 장병이 들고일어나 남대문에 있던 일본군 제51연대 제3대대와 남대문 부근에서 이른바 '남대문전투'를 벌였다. '한국 반란병의 병사' 사진은 점령군 일본군 및 제1연대 제1대대 또는 제2연대 제1대대 병영 모습이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이 막 시작될 무렵 벌어진 '남대문전투'에서 포로가 된 한국군목에 포승이 감겨있거나 맨발에 손이 묶인, 참으로 처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장교로 보이는 다부진 얼굴의 우측 포로가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먼저 간 전우들 잊지 말도록 하고. 우리에게 남은 건 고문 아니면 회유뿐일 것이다. 우리 끝까지 잘 버티자. 부디 살아서 훗날을 기약하자) 무언가 말을 하고 다른 포로들이 그를 돌아다본다. 프랑스 주간지 '일뤼스트라시옹(현 파리-마치)' 1907년 9월 7일 자에 실린 사진이라고 하며, 1904년 '런던 데일리 메일' 특파원으로 방한하여 러일전쟁을 취재했던 매켄지 기자가 1906~7년 2차 방한 때 찍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진 못한다. 매켄지는 1908년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펴냈다.∥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KBS 역사스페셜 잊혀진 전쟁 1907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07년 8월 1일 벌어진 '남대문전투' 현장을 1903(좌/1902 측도) 및 1908(우/1907 측도) 지도로 한번 짚어본다. 소의문 일명 서소문 안 흰색 원 내에 시위제1대대가 보인다. 경성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있었다. 그 왼쪽으로 감옥에는 제2연대 제1대대가 있었다. 흰색 원 내에는 적어도 1901년까지는 선무사 태평관 선혜신창 등이 있었다. 숭례문 일명 남대문 안 금색 원 내엔 시장 바로 옆의 시위제2대대가 병영으로, 일본군 제51연대 제3대대가 있었다. 적어도 1901년까지는 선혜청이 있었다. 전투는 흰색 원 안팎의 생사당동과 태평동 일대에서 시작, 한국군 병영이 점령당하면서 끝났다. 갈색 원은 한국군 부상병 50여 명을 치료했던 1902~1904년 새로 지은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위치이며, 숭례문 밖 청색 점은 일제가 1907년 10월 성곽을 훼손하며 메워버린 '남지'의 위치다.∥지도 출처: ☞1903 원본/☞1908 원본



△1904년 호주 사진가 조지 로스(1861~1942)가 러일전쟁 취재차 방한하여 찍었던 여러 장의 숭례문 사진 중, 멀리 찍은 바로 이 사진 속에 '남대문전투' 현장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눈에 훤하다. 인왕산 등을 배경으로 숲에 둘러싸인 경운궁(덕수궁)도 선명하게 다가온다. 경운궁의 남서쪽이자 서소문 안 남동쪽으로 이어진 가로 혹은 세로의 큰 건물들이 곧 한국군 병영, 병영 바로 앞은 사진상 숭례문 기준 왼쪽으로 성벽까지 생사당동, 오른쪽은 태평동이다. 숭례문 안 남쪽 성벽 바로 옆 얼마 전엔 한국군의 병영, 가로 혹은 세로의 큰 건물들에는 일본군이 있었고, 일본군은 당일 아침 일찍부터 이미 혹 모를 '반란'에 대비, 숭례문 2층 누각과 성벽 위에 기관총을 거치하고 있었다. 숭례문 밖으로 남대문통 도로와 칠패 갈림길 공터 어딘가엔 '남지'가 있을 터이다.∥이미지 출처: ☞원본/참조: ☞당시의 교전상황도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이 목판본 수선전도를 보완하여 소개한 1902 한양도(좌/청색 원) 및 1908(우/1907 측도, 숭례문 밖 청색 점) 지도로 짚어보는 '남편연못 남지(南池)'의 위치, 세종대왕 연간에 조성한 인공 못이다. 흥인지문 즉 동대문 밖 오간수문 앞엔 동지, 돈의문 즉 서대문 밖 한성부 근처엔 서지가 있었으며, 사대문 안엔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 즉 이토히로부미가 세웠던 대한의원 자리의 경모궁 앞쪽에 궁지가 있었다. 연꽃이 없어도 연못이라 하고, 동지 서지 궁지 등에도 연꽃이야 심었겠지만, 숭례문 즉 남대문 밖 남지의 연꽃이 특히 유명하여 남지를 연지(蓮池)라고 했다고도 한다. 이에 덧붙이면, '남대문전투'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디 주르날' 1907년 8월 4일 자는 '한국군 100명, 일본군 30명이 사망했다. 그 밖에 시민들도 적잖이 참살됐다. 서소문 인근 연지학당 여학생들과 주민들도 탄약을 나르고 사상자를 간호(수습/후송)하다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라 했다. 하여, 연지학당의 연지는 곧 '남지'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지도 출처: ☞1902 원본/☞1908 원본


△좌-이기룡필 남지기로회도(李起龍筆 南池耆老會圖), 조선 중기 도화서 화가였던 이기룡이 70세 이상의 원로사대부로 구성된 기로소 (남인) 회원들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모임 광경을 그린 것이다. 숭례문 밖 남지에서 열린 모임을 그렸다. (이미지 및 텍스트 출처: 문화재청/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우-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사진첩(1885~1900)에 들어있는 숭례문 밖 남지로 추정되는 '서울에 인접한 연못'이다(사진 아래 영문 메모: Lotus pond near Seoul.). 남지기로회도와 꽤 비슷한 분위기다. (이미지 출처: 한국기독교회사▷자유게시판 49번▷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진 13) 한편, '남대문전투'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디 주르날'이 언급한 연지학당은 어쩌면, 조선 중기의 문신 김안로의 집터이기도 했고, 주로 남인 출신 기로소 회원들이 모여 놀았던 저 남지 바로 옆의 기로소 회원 홍첨추(홍사효)의 집 별채일 수도 있겠다. 참조, 연로한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로소 청사는 육조거리 남쪽 끝머리 농부(農部) 아래, 지금의 교보문고 광화문점 위치에 있었다.


△1904년~1905년 러일전쟁 취재차 방한하여 미국공사관 부영사까지 지낸 로이터 통신원 윌러드 스트레이트가 1904년에 찍은 '숭례문 입경 일본군(사진 하단 영문 해석-남대문 입경의 일본군, 일문 해석-한국 남대문외 일본병 입경의 경)' 사진 속 남대문통 도로와 칠패 갈림길 공터 한쪽에 타원 모습 '남지'의 반이 담겨있다. 남지기로회도 등과 비슷한 분위기다. 숭례문에서 우측 소의문 쪽으로 조금 벗어난 성곽 위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1907년 10월 일본 태자 방한에 즈음하여 바로 이 사진을 찍은 위치쯤의 성곽을 헐어내고 '남지'를 메웠으며, 또한 숭례문 바깥쪽 바로 이 사진 속 어딘가에 일본인 거류민단이 태자 봉영문을 세웠고, 역적 이용구 등의 경성 일진회 역시 헐어낸 성곽 안쪽 어딘가에 봉영문을 세웠다. 저 멀리 남대문통 끝에는 남대문정거장이 흐리게 보이고, 그 왼쪽으로 경사면 조금 위 첫 번째 숲 왼쪽 뒤에 우뚝한 건물은 '남대문전투' 당시 한국군 사상자를 거두었던 이제 막 새로 지은 복숭아골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본관 건물이다.∥이미지 출처: ☞원본


이준 열사 등의 추도회를 겸한 총회 공동회

 

헤이그와 고국에서 전해지는 처참한 소식들, 미주 한인사회를 강타했다. 곳곳에서 일인들과 충돌이 빚어졌다. 이재명의 충격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일마저 팽개치고 두문불출, 며칠을 고민하던 그에게 8월 초 어느 하루 김병록이 찾아왔다.

 

(계속)

 

참고:

헤이그 특사 관련 통감부문서 넷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옮겨왔다. 서울과 동경, 한국통감 이토와 일본외무대신 하야시가 주고받은 전문이다. 프랑스영사 등이 한국의 특사 파견을 밀고, 방해공작을 시작한 흔적 및 공작원을 통해서 한국특사단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감시한 흔적 등을 엿볼 수 있다. (검색어: 헤이그 밀사☜/이위종 연설☜)

 

#1. 프랑스영사 등의 밀고와 방해공작:

統監府文書 3권 > 一五. 秘書雜件 一·二 (12976∼12977) >

(15) [한국 황제 密使 헐버트의 헤이그평화회의 파견에 관한 件]

 

문서제목 (15) [한국 황제 密使 헐버트의 헤이그평화회의 파견에 관한 件]
문서번호 往電第三一號
발신일 明治四十年五月十九日 午後零時三○分 發 (1907년 05월 19일)
발신자 伊藤 統監
수신자 林 外務大臣

 

(15) [한국 황제 密使 헐버트의 헤이그평화회의 파견에 관한 件]

 

往電第三一號
明治四十年五月十九日 午後零時三○分 發
伊藤 統監

 

林 外務大臣
한국황제가 외국에게 운동한다는 음모는 작년 이후 항상 계속되고 있는 바인데, 전적으로 러시아와 프랑스에 의지하여 독립을 회복하려는 계책을 하고 있음. 양국의 총영사는 황실로부터 교섭이 있을 때마다 이 사실을 본국 정부에 전보하여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이 일을 거부하거나 혹은 이것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증적이 현저함. 전에 李容翊을 개입시켜 교섭했을 때에도 프랑스(佛國)는 이를 거부하였으나 러시아영사는 이 요청을 받아들인 형적이 있음. 이때 평화회의가 개최되면서 미국인 헐버트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불하여 파견하게 되었을 때에도 러시아와 프랑스영사에게 의뢰하여 본국 정부의 알선을 요구하였음.

 

프랑스영사는 그것이 졸렬한 계책이라는 것을 고하며 이를 거부한 것이며, 이것은 그 본국의 훈시에 입각한 것임. 러시아는 이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헐버트는 전적으로 러시아에 의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계획하에 모든 자료를 수집하여 이것을 지참하고 이미 敦賀(츠루가), 블라디보스토크(浦鹽)를 거쳐서 시베리아철도로 유럽으로 향하였음. 황제의 자금 대책 및 기타 계획을 명료하게 알게 된 것은 프랑스총영사가 본관에게 밀고한 바인데, 또 다른 외국통에서도 동일한 밀보를 접수하였음. 현 프랑스영사는 프란손과의 교의가 친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협의가 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정부는 확실히 동정을 표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정부는 매우 괴이하다고 인정하였다는 뜻도 덧붙이고 있음. 이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 기회에 러시아 및 프랑스와도 아직까지 협약을 끝맺지 못하였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 특히 프랑스만이라도 평화회의 전에 친밀해진다면 매우 좋은 형세가 될 것임. 더구나 프랑스와의 협상은 단순하므로 프랑스 외상의 최후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좋은 계책이 될 것으로 사료됨. 이 일은 매우 기밀에 속하는 것이지만 내각과 원로들에게도 알려주시기를 희망함. (원문과 국역 비교☜)

 

#2. 특사단 감시:

統監府文書 5권 > 一. 海牙密使事件及韓日協約締結 (12707) >

(7) [한국 황제 밀사 헤이그(海牙)에서의 행동 內探 件]

 

문서제목 (7) [한국 황제 밀사 헤이그(海牙)에서의 행동 內探 件]
문서번호 來電第一二五號
발신일 明治四十年七月四日 午後四時四五分 東京發 (1907년 07월 04일)
발신자 林 外務大臣
수신일 明治四十年七月四日 午後六時五○分 京城着 (1907년 07월 04일)
수신자 伊藤 統監

 

(7) [한국 황제 밀사 헤이그(海牙)에서의 행동 內探 件]

 

來電第一二五號
明治四十年七月四日 午後四時四五分 東京發
明治四十年七月四日 午後六時五○分 京城着
林 外務大臣

 

伊藤 統監
都筑의 來電 제35호는 다음과 같음.

 

往電 제33호에 관한 3명의 한국인은 그 후 계속 당국 外務大臣과 각국 위원을 방문하였음. 그러나 아무도 상대하지 않음.

 

어제 그의 거처를 알았으므로 곧 사람을 보내서 내탐시켰던바, 그는 前 議政府參贊 李相卨, 前 判事 李俊, 前 公使館書記官 李瑋鍾 3명으로 同人들이 말한 것에 따르면, 李相卨은 한국황제를 알현한 후, 4월 20일경 李儁(俊)과 함께 한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浦鹽)로 나왔으나 병으로 잠시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서쪽 러시아 국경까지 와서 李瑋鍾과 만나, 3인이 함께 6월 25일 이곳에 도착한 듯함. 또한 그들은 한국황제의 전권위임장을 갖고 있다고 하므로 계속 은밀히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니는 중임. (원문과 국역 비교☜)

 

#3. 이위종의 연설과 기자단의 결의안:

統監府文書 5권 > 一. 海牙密使事件及韓日協約締結 (12707) >

(14) [한국 황제 密使의 일본 공격 연설에 관한 보고]

 

문서제목 (14) [한국 황제 密使의 일본 공격 연설에 관한 보고]

문서번호 來電第一三六號

발신일 明治四十年七月十日 午後○七時二○分 東京發 (1907년 07월 10일)

발신자 外務大臣

수신일 明治四十年七月十日 午後一一時一○分 京城着 (1907년 07월 10일)

수신자 伊藤 統監

 

(14) [한국 황제 密使의 일본 공격 연설에 관한 보고]

 

來電第一三六號

明治四十年七月十日 午後○七時二○分 東京發

明治四十年七月十日 午後一一時一○分 京城着

外務大臣

 

伊藤 統監

都筑 大使의 전문 제51호

어젯밤(9일) 스테드가 주재한 반공개 집회에서 어느 정도 만원을 이룬 군중들에게 李瑋鍾이 연설을 하였음. 그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일본의 정책을 맹렬하게 공격했음. 청중 한 사람이 한국인들에게 동정을 표시하고 일본인들을 비난하는 결의안에 동의하자, 스테드를 포함한 또 다른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비난에는 반대하였음.

 

마지막으로 채택된 결의안은 한국인들을 동정은 하되, 일본에 대해서는 비난은 하지 말고, 장차 어느 때에, 한국황제가 주변의 말에 휘둘리지 않은 채, 국가 상실과 같은 문제를 계속 조사하고 심리할 수 있도록 국제사법재판소 설치를 희망한 것이었음. (원문과 국역 비교☜)

 

#4. 헐버트의 연설:

統監府文書 5권 > 一. 海牙密使事件及韓日協約締結 (12707) >

(16) [한국 황제 密使 미국인 헐버트 헤이그(海牙)에서의 언동에 관한 件]

 

문서제목 (16) [한국 황제 密使 미국인 헐버트 헤이그(海牙)에서의 언동에 관한 件]

문서번호 來電第一四二號

발신일 明治四十年七月十二日 午後○五時五○分 東京發 (1907년 07월 12일)

발신자 外務大臣

수신일 明治四十年七月十二日 午後一二時○○分 京城着 (1907년 07월 12일)

수신자 伊藤 統監

 

(16) [한국 황제 密使 미국인 헐버트 헤이그(海牙)에서의 언동에 관한 件]

 

來電第一四二號

明治四十年七月十二日 午後○五時五○分 東京發

明治四十年七月十二日 午後一二時○○分 京城着

外務大臣

 

伊藤 統監 제142호

다음 전문은 都筑으로부터 받은 제55호임. 헐버트는 7월 10일 표면상은 한국인들에 대한 자신의 배후조종설을 부인하기 위해 이곳에 왔음. 그는 그들이 스테드의 권고로 일본정부를 공격하는 음모를 꾸밀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 그는 저녁에(도착 당일 10일 저녁) 클럽회관에서 이야기하면서 전날 밤(도착 전날 9일 밤) 한국인들이 말한 내용을 사실상 시인하였음. 그는 어젯밤(도착 이튿날 11일 밤) 헤이그(海牙)를 떠날 것이라고 확언했음. 그가 친지들에게 한 또 다른 이야기 중, 그는 파고다사건에 매우 강력히 반대하였음. (원문과 국역 비교☜)

 

<파고다사건은 1907년 1월 황태자 순종 가례식에 축하사절로 방한한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카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일본군을 동원해 약탈해간 사건'을 말한다.>

 

2012.04.29(일)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