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6]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16회)
제2부 귀국 후 거사준비
△사진을 합성한 포스터(?)로 보이는 '1900년대 하와이 이민선'이다. 왼쪽 아래로 흰옷을 입은 한국인 이민자 한 사람이 몹시 피곤한 듯 무릎을 감싼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애처롭게 보인다. 그냥 짐 더미일 수도 있는데 별생각을 다 해본다. 아쉽게도 이재명 의사의 귀국선 '시베리아 선편' 사진은 암만 찾아봐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이미지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하와이 파인애플농장의 이민 한국인의 모습이다. 바로 위의 포스터(?) '1900년대 하와이 이민선'의 왼쪽 윗부분의 원본이다.∥이미지 왼쪽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오른쪽 출처: 인천 내리교회 역사자료실(하와이이민사)
귀국 후 거사준비
재명은 하와이 동경 나가사키를 거쳐 근 한 달 만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3년 만에 포구는 어지간히 달라졌다. 일본 조계지의 3층 대불호텔 말고도 각국 조계 어디라 할 것 없이 벽돌로 지은 2~3층 건물이 눈에 띄게 늘었고, 대로변은 더욱 번잡하다.
딸가닥 딸가닥…, 방정맞은 게다짝이 비위를 거스른다. 미국에 있을 때나 귀국길 배에서는 아무 때나 마주쳐도 다툴 일만 없다면 청인이나 마찬가지, 그냥 그렇게 봤거늘 막상 우리 땅에 사는 일인들을 마주치자 이건 영 달랐다. 배알이 곤두선다.
참 많이도 변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겠다. 평양은 얼마나 변했을까. 저쪽 윗동네 동서개발회사와 용동-웨슬리교회(현 내리교회)는 3년 전 그대로 여전하다. 김기범 목사와 교인들 그리고 조원시(G. H. Jones) 목사는 어떻게 잘들 지내고들 있을까.
함께 온 동포 정정근, 이젠 헤어질 시간이다. 정정근은 충남 청양사람, 그도 또한 의병전쟁에 참여할 차 귀국했다. 집안이 온통 쑥대밭이 됐다고 한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집안 형제가 여럿 순국한 모양이다. 여의치 않으면 연해주로 간다고 했다.
재명도 처음엔 의병참여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임무가 있다.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탈출하면, 일단 연해주로 갔다가 청나라 거쳐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하나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임무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정정근에게는 자신도 어쩌면 연해주 쪽으로 갈 거라고만 했다. 정정근은 고향으로 곧바로 먼저 가고 재명은 웨슬리교회(내리교회) 출신 동포소식도 전할 겸 교회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무운장구를 빌며 굳은 악수로 작별을 고했다.
△1903년 무렵의 제물포항과 제물포 일본 조계지∥서울과 연결되는 뱃길 종착이던 제물포는 침탈의 서막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1876)으로 개항장이 됐으며 제물포조약(1882) 이후 더욱 급속히 변모해 갔다. 오른쪽 사진 속 우뚝한 건물이 곧 대불호텔이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1908년~1910년 무렵의 제물포 수도국산(송림산)∥본문에 묘사한 저쪽 윗동네 전경이다. 수도국산을 배경으로 왼쪽은 자유공원(옛 각국, 서, 만국공원), 오른쪽은 답동 언덕이다. 대불호텔 등은 왼쪽으로 더 가야 한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1900년~1910년 무렵의 제물포항 월미도∥옹기종기 초가 마을은 지금의 신포동 일부로 왼쪽으로 답동이 이어지고 오른쪽 아래의 샛길로 뒤로 조금 올라가면 내동 용동 경동의 접점, 동서개발회사와 웨슬리교회 동네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지금의 기상대, 전동 쪽에서 바라본 1910년 무렵의 현 내리교회 초창기 십자가형 용동-웨슬리교회(1900년 6월~1901년 12월 신축) 등의 모습이다. 세 건물 모두 서쪽 방향으로 제물포항과 월미도 등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답동 언덕에서 전동 쪽 언덕 기상대를 바라본 1948년 무렵의 사진 속에 동서개발회사와 현 내리/용동-웨슬리교회 모습이 담겨있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1901년 12월 25일 봉헌된 내리교회 초창기 십자가형 용동-웨슬리교회의 1928년 무렵과(좌) 김구 선생이 방문했던 1946년의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한때는 예식장으로 쓰이기도 했던 동서개발회사의 1948년 무렵과(좌) 1973년의 모습으로 지금의 경동 사거리 내동 입구에 있었다. (이미지 출처: ☞원본1/☞원본2)
△제물포 용동-웨슬리교회(내리교회)를 처음 세운 초대 목사 아펜젤러와 2대 목사 조원시의 모습이다. 교세가 확장되자 조원시는 지금의 내동, 당시 용동에 십자가형 교회를 신축했으며, 또한 데쉴러가 세운 동서개발회사의 하와이 노동이민 모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미지 출처: ☞인천 내리교회 역대담임목사)
△한국 기독교 최초 목사 2인 중 김창식은 1893년 의료선교사 홀(W. J. Hall)과 함께 이재명 의사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감리교 남산현교회를 세웠다. 1901년 서울 감리교 상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1894년 청일전쟁 평양전투 당시 민간인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과로에 말라리아로 순직한 홀의 뒤를 이어 2대 목사로 취임했다. 김기범은 제물포 용동-웨슬리교회 초창기 초대교인으로 김창식과 함께 상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역시 2대 목사 조원시의 뒤를 이어 3대 목사로 취임했다. (이미지 출처: ☞서울 감리교 남산교회 교회역사-남산역사갤러리)
△1897년 경인선 철도 제1차 기공식 장면의 부분확대본이다. 동서개발회사를 세운 은행가 후손 데쉴러(D. W. Deshler)와 그를 적극 후원한 알렌(H. N. Allen)의 모습이 담겨있다. 알렌은 데쉴러의 계부 내쉬(G. K. Nash)의 친구로 1902년 데쉴러의 동서개발회사의 하와이 노동이민 사업 독점권을 확보해주었으며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알렌은 또 자신의 친구 조원시를 설득, 주도적으로 참여케 한다. 사진상 데쉴러의 오른쪽은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특허받은 모스(J. R. Morse)로 처음부터 자금난에 허덕이다 결국 1899년 일본인에게 부설권을 넘긴다. (이미지 출처: ☞원본1/원본2)
그즈음의 전국은 한마디로 을사년스러웠다. 군대가 해산되기 시작한 지난 8월 1일 박승환 참령의 자결로 격발된 경성시위대(京城侍衛隊) 의거, 그러나 끝내 무참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추적에 나선 일본군은 (그저 조금 수상한) 민간인까지 학살했다.
사실 고급 장교 일부는 군대해산 조짐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이제 곧 지금의 병력으론 감당할 수 없는 큰 국변이 있을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중원학생 김필순은 (모종 계획으로) 당시 평양에 있던 안창호에게 급히 사람을 보냈다.
<당시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은 숭례문(남대문) 밖 복숭아골, 지금의 서울역 건너편 연세빌딩 자리에 있었다.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1908년 제1회 졸업생 김필순은 1911년 12월 31일 서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이상촌' 건설에 매진한다.>
그리하여 3,000여 청중의 '평양 연설회'를 잘 마치고(7월 8일) 학교설립에 분주하던 안창호는 서둘러 상경(7월 18일경), 제중원 바로 앞 김형제(필순과 형 윤오)상회에 있었다. 애국지사 후원에 온갖 힘을 다하는 두 형제, 상회는 신민회 회합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