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16]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6. 18. 23:46

(16회)

 

제2부 귀국 후 거사준비

 


△사진을 합성한 포스터(?)로 보이는 '1900년대 하와이 이민선'이다. 왼쪽 아래로 흰옷을 입은 한국인 이민자 한 사람이 몹시 피곤한 듯 무릎을 감싼 두 팔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애처롭게 보인다. 그냥 짐 더미일 수도 있는데 별생각을 다 해본다. 아쉽게도 이재명 의사의 귀국선 '시베리아 선편' 사진은 암만 찾아봐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이미지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하와이 파인애플농장의 이민 한국인의 모습이다. 바로 위의 포스터(?) '1900년대 하와이 이민선'의 왼쪽 윗부분의 원본이다.∥이미지 왼쪽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오른쪽 출처: 인천 내리교회 역사자료실(하와이이민사)

 

귀국 후 거사준비

 

재명은 하와이 동경 나가사키를 거쳐 근 한 달 만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3년 만에 포구는 어지간히 달라졌다. 일본 조계지의 3층 대불호텔 말고도 각국 조계 어디라 할 것 없이 벽돌로 지은 2~3층 건물이 눈에 띄게 늘었고, 대로변은 더욱 번잡하다.

 

딸가닥 딸가닥…, 방정맞은 게다짝이 비위를 거스른다. 미국에 있을 때나 귀국길 배에서는 아무 때나 마주쳐도 다툴 일만 없다면 청인이나 마찬가지, 그냥 그렇게 봤거늘 막상 우리 땅에 사는 일인들을 마주치자 이건 영 달랐다. 배알이 곤두선다.

 

참 많이도 변했다. 서울은 말할 것도 없겠다. 평양은 얼마나 변했을까. 저쪽 윗동네 동서개발회사와 용동-웨슬리교회(현 내리교회)는 3년 전 그대로 여전하다. 김기범 목사와 교인들 그리고 조원시(G. H. Jones) 목사는 어떻게 잘들 지내고들 있을까.

 

함께 온 동포 정정근, 이젠 헤어질 시간이다. 정정근은 충남 청양사람, 그도 또한 의병전쟁에 참여할 차 귀국했다. 집안이 온통 쑥대밭이 됐다고 한다. 의병전쟁에 참여한 집안 형제가 여럿 순국한 모양이다. 여의치 않으면 연해주로 간다고 했다.

 

재명도 처음엔 의병참여를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젠 임무가 있다.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탈출하면, 일단 연해주로 갔다가 청나라 거쳐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다. 하나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임무내용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정정근에게는 자신도 어쩌면 연해주 쪽으로 갈 거라고만 했다. 정정근은 고향으로 곧바로 먼저 가고 재명은 웨슬리교회(내리교회) 출신 동포소식도 전할 겸 교회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무운장구를 빌며 굳은 악수로 작별을 고했다.

 


1903년 무렵의 제물포항과 제물포 일본 조계지∥서울과 연결되는 뱃길 종착이던 제물포는 침탈의 서막 불평등조약 강화도조약(1876)으로 개항장이 됐으며 제물포조약(1882) 이후 더욱 급속히 변모해 갔다. 오른쪽 사진 속 우뚝한 건물이 곧 대불호텔이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1908년~1910년 무렵의 제물포 수도국산(송림산)∥본문에 묘사한 저쪽 윗동네 전경이다. 수도국산을 배경으로 왼쪽은 자유공원(옛 각국, 서, 만국공원), 오른쪽은 답동 언덕이다. 대불호텔 등은 왼쪽으로 더 가야 한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1900년~1910년 무렵의 제물포항 월미도∥옹기종기 초가 마을은 지금의 신포동 일부로 왼쪽으로 답동이 이어지고 오른쪽 아래의 샛길로 뒤로 조금 올라가면 내동 용동 경동의 접점, 동서개발회사와 웨슬리교회 동네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지금의 기상대, 전동 쪽에서 바라본 1910년 무렵의 현 내리교회 초창기 십자가형 용동-웨슬리교회(1900년 6월~1901년 12월 신축) 등의 모습이다. 세 건물 모두 서쪽 방향으로 제물포항과 월미도 등을 내려다보고 서 있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답동 언덕에서 전동 쪽 언덕 기상대를 바라본 1948년 무렵의 사진 속에 동서개발회사와 현 내리/용동-웨슬리교회 모습이 담겨있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1901년 12월 25일 봉헌된 내리교회 초창기 십자가형 용동-웨슬리교회의 1928년 무렵과(좌) 김구 선생이 방문했던 1946년의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 보기)

 


△한때는 예식장으로 쓰이기도 했던 동서개발회사의 1948년 무렵과(좌) 1973년의 모습으로 지금의 경동 사거리 내동 입구에 있었다. (이미지 출처: ☞원본1/☞원본2)

 


△제물포 용동-웨슬리교회(내리교회)를 처음 세운 초대 목사 아펜젤러와 2대 목사 조원시의 모습이다. 교세가 확장되자 조원시는 지금의 내동, 당시 용동에 십자가형 교회를 신축했으며, 또한 데쉴러가 세운 동서개발회사의 하와이 노동이민 모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미지 출처: ☞인천 내리교회 역대담임목사)

 


△한국 기독교 최초 목사 2인 중 김창식은 1893년 의료선교사 홀(W. J. Hall)과 함께 이재명 의사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감리교 남산현교회를 세웠다. 1901년 서울 감리교 상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 1894년 청일전쟁 평양전투 당시 민간인 부상자들을 치료하다 과로에 말라리아로 순직한 홀의 뒤를 이어 2대 목사로 취임했다. 김기범은 제물포 용동-웨슬리교회 초창기 초대교인으로 김창식과 함께 상동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역시 2대 목사 조원시의 뒤를 이어 3대 목사로 취임했다. (이미지 출처: ☞서울 감리교 남산교회 교회역사-남산역사갤러리)

 


△1897년 경인선 철도 제1차 기공식 장면의 부분확대본이다. 동서개발회사를 세운 은행가 후손 데쉴러(D. W. Deshler)와 그를 적극 후원한 알렌(H. N. Allen)의 모습이 담겨있다. 알렌은 데쉴러의 계부 내쉬(G. K. Nash)의 친구로 1902년 데쉴러의 동서개발회사의 하와이 노동이민 사업 독점권을 확보해주었으며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알렌은 또 자신의 친구 조원시를 설득, 주도적으로 참여케 한다. 사진상 데쉴러의 오른쪽은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특허받은 모스(J. R. Morse)로 처음부터 자금난에 허덕이다 결국 1899년 일본인에게 부설권을 넘긴다. (이미지 출처: ☞원본1/원본2)

 

그즈음의 전국은 한마디로 을사년스러웠다. 군대가 해산되기 시작한 지난 8월 1일 박승환 참령의 자결로 격발된 경성시위대(京城侍衛隊) 의거, 그러나 끝내 무참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추적에 나선 일본군은 (그저 조금 수상한) 민간인까지 학살했다.

 

사실 고급 장교 일부는 군대해산 조짐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이제 곧 지금의 병력으론 감당할 수 없는 큰 국변이 있을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한 제중원학생 김필순은 (모종 계획으로) 당시 평양에 있던 안창호에게 급히 사람을 보냈다.

 

<당시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은 숭례문(남대문) 밖 복숭아골, 지금의 서울역 건너편 연세빌딩 자리에 있었다.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1908년 제1회 졸업생 김필순은 1911년 12월 31일 서간도로 망명,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이상촌' 건설에 매진한다.>

 

그리하여 3,000여 청중의 '평양 연설회'를 잘 마치고(7월 8일) 학교설립에 분주하던 안창호는 서둘러 상경(7월 18일경), 제중원 바로 앞 김형제(필순과 형 윤오)상회에 있었다. 애국지사 후원에 온갖 힘을 다하는 두 형제, 상회는 신민회 회합장소였다.

 

한편 안중근 의사는 당시 국외로 나가 의병부대를 창설하여 독립전쟁을 벌이기로 망명을 계획하고 일단 상경하여 명동성당 근처에 있었다. 당일 안중근 의사도 경성시위대가 의거를 일으키자 김형제상회로 달려갔고, 시가전 현장에서 이를 갈았다.

 

안중근 의사도 그렇게, 인근 마을 주민 외 제중원 의사, 학생, 안창호 등과 더불어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 적십자표식 하나 달고, 빗발치는 총탄 속에 쓰러진 사상자를 소달구지에 태워 제중원으로 날랐다. 지옥이 따로 없는 참으로 처참한 광경이었다.

 

이 의거는 (모종 계획은 실패) 안창호가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시절 여운형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하게 된 계기가 된다. 안중근 의사 역시 바로 이때부터 이미, 도적의 수괴 '즉결심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三年 前부터(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자료 6권 안중근편Ⅰ. 二. 被告人 訊問調書)>

 

이후 서울을 위시해서 나라 전체가 지금껏 내내 그렇게, 싸늘하고 스산하여 1905년 을사늑약 체결되던 바로 그해 을사년 같은,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군대해산(軍隊解散)∥☞…황제의 조칙이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②…이토히로부미 온갖 움직임 파악하고… ☞조선왕조실록-순종 즉위년 7월 31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고종시대사>

 

웨슬리교회(내리교회)서 하루 묵은 재명은 다음날 오전 철도편으로 서울로 향했다.

 


△왼쪽은 1897년 3월 22일 인천 제물포 우각현에서 찍은 경인선 철도 제1차 기공식 장면이다. 경인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이며 서울 노량진에서 인천 제물포 사이 총연장 33.2㎞이다. 1896년 미국인 모스(J. R. Morse)가 부설권을 특허받아 1897년 3월 공사를 시작, 1899년 4월 일본의 합자회사가 인수하여 동년 9월 18일 완공 개통됐다. 사진은 근대적 교통기관 도입과 함께 구미 열강 및 일제의 본격적인 침탈의 구체적 발판이 마련되는 그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오른쪽은 노량진 앞 노들강 노들철 전경이다. 백로(白鷺)가 노닐던 징검돌 로돌(鷺梁)-노돌-노들은 노들섬을 이르며 아울러 지금의 노량진 일대를 말한다. 여기에 있던 나루터를 노들나루라고 불렀고 노들나루를 한자로 적어서 노량진(鷺梁津)이라 했다. 노들섬은 원래 용산 쪽 한강 변에 붙어있던 모래톱이었다. 한강이 범람하여 수위가 높아지면 모래톱 가운데로 물이 흘렀고 오랜 세월에 섬이 되었다. 그리하여 용산 쪽은 용호 또는 용산강이라 하고 노량진 쪽은 노들강이라 했으니, 한강철교 한때 노 또는 노철도로 불렸었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숭례문(崇禮門)과 광화문(光化門)의 1900년대 모습이다. 창건 당시부터 속칭을 남대문으로 정했던 숭례문은 지난 2008년 2월 방화로 전소, 2012년 6월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광화문 또한 이미 두 차례 불에 타고(임진전쟁 및 한국전쟁) 일제가 총독부 신청사가 완공되자 근대양식 청사에 어울리지 않고 협착하여 불편하다는 등의 이유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버렸던 뼈아픈 역사가 담겨있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서울성곽의 정남 숭례문의 속칭 남대문 관련 기록보기: ☞한국고전종합DB 조선왕조실록 태조 5년 병자(1396년) 9월 24일 '성 쌓는 일이 끝나자 인부들을 돌려보내다. 각 문의 이름'>

 


△경복궁 내 총독부 청사 항공사진과 동십자각 사진 속에 옮겨진 광화문의 모습이 담겨있다. 일제는 총독부 청사 정문이 된 고색창연한 광화문이 근대양식의 청사와 서로 흘겨보는 듯하여 어울리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경회루 북편으로 옮기려다 동편에서 입구를 마주하게 설계 변경)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버렸다. 그리하여 광화문은 '총독부 박물관 구역 정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경복궁 동북쪽 삼청동에서 바라본 옮겨진 광화문과 총독부 청사 후면(성균관대박물관 소장 유리원판) 및 옮겨진 광화문에서 바라본 건춘문과 동십자각 일대 모습이다. 두 사진 속 개울은 백악산(북악산)에서 발원, 건춘문을 지나 동십자각을 끼고 중학다리(조선 시대 사부학당의 하나인 중부학당 앞 다리)를 거쳐 개천(開川/청계천의 원래 이름)으로 흘러드는 '삼청동천/중학천'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

 

<그동안엔 잘 몰랐던 례문의 수난사토막, 일제는 1907년 10월 요시히토 태자 방한 무렵 숭례문 안 우측 성곽을 헐고 새로 길을 냈다. 예를 우러러 소중히 한다는 숭례문이 영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대일본의 황태자가 고개를 숙이면서 숭례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하는 괴상한 논리를 내세웠다. 일제는 그렇게 숭례문을 시작으로 골골샅샅, 전국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산하의 정기를 끊어서 민족혼을 없애겠다며 금수강산 곳곳에 쇠말뚝에 식칼로 혈침을 박았다. 아산의 현충사 충무공의 묘역도 그냥 두지 않았다. 충무공의 셋째 아들 면의 묘역 등 덕수이씨 선영 또한 그냥 둘리 없었다. 일본의 야욕은 멈출 줄을 모른다. 오늘도 계속된다.∥(☞현해탄, 천 년…)>

 

(계속)

 

참고:
고종·순종실록으로 본 숭례문 성곽 훼손과 일본 태자의 방한

 

#1. 서울은 임금과 백성이 한데 어울려 살던 도성,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매우 드문 일이다. 서울의 사대문과 보신각의 명칭엔 사람이 갖춰야 할 다섯 가지 덕목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들어있다. 이렇듯 서울성곽에는 조선왕조의 정치이념이 담겨있었다.

 

<정북 숙정문(肅靖門)-처음 명칭은 숙청문(肅淸門), 본래 소지(昭智)-홍지(弘智)로 했다가 숙청(肅淸)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어찌 됐든 명칭에 지(智)를 넣지 않은 이유의 기록을 찾지 못해 정확히 알 순 없으나, 그릇된 일 따위를 엄하게 바로잡는다는 뜻의 숙청(肅淸)은, 또한 궁극적인 의미로 '지(智)'와 통한다고도 볼 수 있다.>

 

#2. 을사늑약으로 한국 병탄의 9부 능선을 넘은 일제는, 이제 자신들의 입맛대로 식민지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여, 겉으론 교통 운수의 편리를 내세워 조선왕조의 상징이기도 한 서울성곽을 훼손하였고, 그 첫 삽질이 곧 숭례문 안 우측 소의문 쪽 훼손이었다.

 

#3. 일본 태자 요시히토친왕(嘉仁親王)의 방한은, 을사늑약 이후 이토히로부미의 한국 접근 방식에 불만을 품은 일본 내 강경파의 비판에 시달리던 이토히로부미가 정치적인 고려로 기획하였으며, 요시히토 방한을 목전에 둔 시점에 숭례문 성곽을 훼손하였다.

 

#4. 1907년 3월에 획책한 것으로 보이는 '서울성곽 훼손 계획(?)'을 태자 방한 무렵 급히 서둘러 앞당긴 이유는 '예를 숭상하는 문'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대일본의 황태자가 '문을 통과하면서 예를 우러러 고개를 숙이면' 대일본의 굴욕이라고 하는 괴이쩍은 논리로 비롯됐다.

 

#5.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철종까지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고종·순종실록은 일제가 편찬하여 오류와 왜곡이 많고 실록 편찬 규례에도 맞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에서 배제되었다. 이 고종·순종실록에 '서울성곽 훼손 계획(?)' 등이 기록돼 있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고종·순종 편에서 옮겨온 관련 내용이다.

 

ㄱ) 고종 48권, 44년(1907 정미/대한 광무(光武) 11년) 3월 30일(양력) 1번째 기사

동, 남 두 대문의 좌우 성첩을 각각 8간씩 헐어 버리다

 

의정부 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군부대신(軍部大臣) 권중현(權重顯)이 아뢰기를, “동대문과 남대문은 황성(皇城) 큰 거리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붐비고 수레와 말들이 복잡하게 드나듭니다. 게다가 또 전차(電車)가 그 복판을 가로질러 다니기 때문에 서로 간에 피하기가 어려워 접촉사고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통 운수의 편리한 방도를 특별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루(門樓)의 좌우 성첩(城堞)을 각각 8칸씩 헐어버림으로써 전차가 드나들 선로(線路)를 만들고 원래 정해진 문은 전적으로 사람만 왕래하도록 한다면 매우 번잡한 폐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삼가 도본(圖本)을 가져와 성상께서 보실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裁決)을 기다립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
【원본】 52책 48권 18장 B면
【영인본】 3책 462면
【분류】 *교통-육운(陸運)/*건설-건축(建築)/*군사-관방(關防)

 

ㄴ) 고종 48권, 44년(1907 정미/대한 광무(光武) 11년) 6월 22일(양력) 4번째 기사

이완용 등이 나머지 성벽을 헐어버릴 것을 아뢰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內部大臣) 임선준(任善準),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고영희(高永喜), 군부대신(軍部大臣) 이병무(李秉武)가 아뢰기를, “동쪽 문루와 남쪽 문루의 좌우 성첩을 헐어버릴 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이미 주청하여 재가를 받았습니다. 그 나머지 성벽은 교통 중심 도로에 있어 장애가 될 뿐이고 유사시를 미리 방비하는 데는 실로 유익할 것이 없으니 속히 내부(內部)와 탁지부(度支部)에게 책임지고 헐어버리도록 함으로써 한없이 큰 폐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52책 48권 27장 A면
【영인본】 3책 467면
【분류】 *교통-육운(陸運)/*군사-관방(關防)

 

ㄷ)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대한 융희(隆熙) 1년) 10월 16일(양력) 1번째 기사

일본국 황태자가 서울에 오다

 

일본국(日本國)의 황태자 요시히도친왕〔嘉仁親王〕이 방문차 왔으므로 인천항(仁川港)에 거둥하여 만나보았다. 황태자가 따라가서 만나보았으며, 동반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원본】 2책 1권 21장 A면
【영인본】 3책 497면
【분류】 *왕실-국왕(國王)/*외교-일본(日本)/*왕실-종친(宗親)

 

#6. #5.의 ㄱ)의 성첩은 몸을 숨겨 적을 쏘거나 치기 위해 성벽 위에 낮게 덧쌓은 요철형 담 성가퀴를 말한다. 이러한 성첩을 헐어서 교통 운수의 편리를 도모한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ㄴ)에 와서야 성벽 헐기를 주청한다. ㄱ)과 ㄴ)은 오류와 왜곡이 겹쳐있다. 이에 따라 필자는 서울성곽 훼손 계획의 시안(試案) 정도로 한번 생각해 본다. 숭례문의 나머지 왼쪽과 흥인지문의 좌우 양쪽 성곽 훼손은 이듬해인 1908년으로 넘어가 진행됐으며 본격적인 서울성곽 훼손은 1913년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성곽 관련 서울시 보도자료 링크:

○오세훈 시장, 서울성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2009.09.03)☜

○서울 한양도성(서울성곽)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본격화(2012.01.16)☜

※서울성곽 관련 Daum 검색 기사 링크:

○박원순, 2015년까지 한양도성(서울성곽) 전 구간 연결…유네스코 최종 등재☜

○기타 '서울성곽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관련 기사 보기☜

 

2012.06.18(월)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