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8]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18회)
표정이 어두워진 재명은 고개를 수그리며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우리의 대적은 일본인데…그러나 사실은…우리 민족 내부에 똬리 틀어 들앉은 우리 내부의 적이 더 큰 문제…이런 현실이…괴롭고…피곤하고…그렇습니다…"
"…자네가 생각이 깊구나…그래…결국은 우리 동포…하지만 어쩌겠나…후유…"
재명의 한탄에 김필순의 입에서도 장탄식이 흘렀고 안창호가 또 그 뒤를 이었다.
"…맞는 말이야. 미망에 빠져서 노예 되기를 무슨 벼슬로 여기고 민족의 고통으로 사리사욕을 탐하는 분별없는 자들이…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지…그래도 이렇게 넘어져 자빠진 채 주저앉지 않고…일어나 달리는 사람들이…또 많이 있으니까…"
△좌, 김필순∥우,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생 7명과 허스트 교수. 뒷줄 왼쪽부터-김필순 홍석후 신창희/주현측 허스트 박서양(백정출신)/김희영 홍종은∥김필순을 비롯한 신창희 주현측 박서양 김희영 등 다섯 명은 졸업 후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편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은 안창호는 제6회 졸업생 김창세의 손위 동서였고 김구는 신창희의 손아래 동서였다.∥이미지 출처: 연세대학교/세브란스병원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1908년 제1회 졸업식 광경∥한국 황실 가족대표, 한국 및 일본정부 고관, 각국 공사관 대표, 각 교육기관 및 기독교회 대표, 외국인사회 대표, 그리고 졸업생 가족 외 비상한 관심을 둔 일반인 등 모두 합쳐 1,0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참관했다고 한다. 당시로선 꽤 보기 드문 일대사였다. 그런데 뜻밖의 아이러니는 우리나라 최초로 의사면허를 받게 된 졸업생 7명의 졸업장 수여를 하필이면 이토히로부미가 했단 사실이다. 일제는 당시 서울의 일본 거류민을 위한 한성병원 외 인천 부산 원산 등지의 일본인 거류지에 서양식 병원을 세우고 한국인도 치료를 받게 하여 의료혜택으로 일본에 대한 호감을 사려고 하고 있었다.∥이미지 출처: Daum KBS 프라임-한국 최초의 의사 7인, 독립투사가 되다.∥참조: 황상익 서울대 교수-이토히로부미의 병원, '대한의원'을 아십니까? (프레시안 2010.08.30)
△세브란스의 도움으로 1904년 숭례문(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새로 세워진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전경과 외래환자 대기실의 모습이다. 지금의 서울역 앞 연세빌딩 자리에 있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인상적인 왼쪽 사진은 1908년 6월 3일에 있었던 제중원-세브란스의학교 제1회 졸업식을 참관하고 돌아가는 귀빈들의 마차 행렬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런 상관없는 도적의 수괴로부터 받는 졸업장은 또한 당시 우리가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이미지 출처: 연세대학교/세브란스병원
식사가 끝난 뒤 재명은 안창호와 함께 석정동 신문사를 다녀왔다. 협회에서 가져온 국채보상헌금 공립신보 등을 전달하고 돌아왔다. 양기탁은 재명에게 아무나 할 수 없는 위국헌신의 결단을 치하하며 평양 다녀오면 신문사부터 들리라 당부했다.
그러나 재명은 뜻밖에도 다음날 새벽, 평양 집이 아니라 연해주지역 해삼위로 먼저 향하게 되었다. 신문사를 다녀오면서 안창호로부터 그동안 숨어지내던 해산군인 몇 명이 또 연해주 망명길에 오른단 얘길 듣고, 그들을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내일이면…선생님…저…아무래도 평양 집보다 해삼위부터 갔다 오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 제가 어차피 본격적인 활동 시작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이강 형님을 먼저 만나 뵙기로 공동회 할 때 미리 약속도 돼 있고 해서 말입니다. 겸사겸사…"
뭔가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듯했다. 안창호도 말리진 않았다.
"그래…그래도 아무리…누구나 사람은 휴식이 필요한 법인데…"
"아직은 괜찮습니다…한 달 내로 되도록 빨리 오겠습니다…"
평양에서의 연락처는 대성학교로 정했다. 지난 7월 안창호가 평양 군민의 기부금과 신민회 회원 이종호 등의 후원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개교(예비과)'를 불과 달포 앞두고 사달이 벌어져 '개교일' 무렵 며칠 다녀온 외 안창호는 내내 여기에 있었다.
이준의 자결 비보를 접한 광무황제는 일순 낙담에 빠졌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일본과 일전을 불사할 계획을 세우고 이완용내각-친일각료부터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친일분자 매국적 군부대신 이병무의 방해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었다.
대기하고 있던 경성시위대병력은 황제의 명령 대신 퇴위발표 소식에 손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고, 분을 참지 못한 일부 병력이 무장탈영을 감행하여 종로 일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는데 그치고 말았었다. 이준 열사 순국 이후 단 5일 만이었다.
또한, 군대해산 직전 상당수 장교가 경기 일원 의병부대와 손잡고 일본군과 일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이마저도 일제에 찰싹 달라붙은 일부 장교의 농간에 실패로 끝났고, 이는 박승환 참령의 자결로 이어져 경성시위대 의거가 일어나게 됐었다.
이후 수많은 장병이 전국 각지의 의병부대로 합류했고, 상당수는 국외망명을 단행했다. 안창호는 부상병 간호에 몰두하는 틈틈이 전국의 의병장들에게 격려편지도 보내면서 해산군인 망명을 돕고 있었다. 이제 곧 대성학교로 돌아갈 거라고 한다.
재명은 행장을 새로 꾸렸다. 도붓장수 행색으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무예도보통지와 언해본은 대성학교 군사교육 교재로 사용케 했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은 로스앤젤레스 떠나기 전에 이미 모두 외워버리고 있었고 필사도 몇 벌 해두었다.
무명씨 어르신에 안창호 역시 감격해 마지않으며 그 어르신 얼굴을 알 것 같다고도 한다. 철도편 북상이라면 평양 집에 잠깐 들리면 되는데 별도리가 없어 책 몇 권에 군복, 옷가지 등속 트렁크 남은 짐은 안창호가 맡아 대성학교에 갖다두기로 했다.
△경의선 철도 공사 모습과 경의선 사천 가교 공사 현장의 일본군이다. 경의선은 용산에서 개성 사리원 평양 거쳐 신의주까지 총연장 499km로 일제가 대륙침략을 주목적으로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부설했다. 이후 경부선과 함께 평상시엔 지하자원 및 특산품 등을 수탈해가는 데 이용했으며 중일전쟁 등에 침략노선으로 이용하였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경의선 철도 시운전 현장과 대동교(대동강인도교) 모습이다. 대동교도 그렇지만 양각도 제1 제2 철교 역시 1905년 3월경 일단 준공은 했으나 수도국 관련 설비 외 기타 여러 문제로 누차 재부설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기사: 황성신문 1909년 5월 12일 鐵橋敷設, 동년 5월 30일 平壤行의 減票價 및 신한국보 1909년 6월 22일 대동강의 쇠다리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호남선 본선은(총연장 263.3km) 경부선(총연장 444.5km) 지선으로 부설되었으며 군산선 강경선 등과 함께(호남선 지선) 역시 식량 수탈이 주목적이었다. 호남선은 당시 대전역에서 서울 방향이 아닌 김천 부산 방향으로 연결돼 있었다. 김해평야의 쌀은 부산, 호남평야의 쌀은 목포, 또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만경평야(징게맹게외배미들)의 쌀은 군산항에서 실어가면서 철도를 이용한 육로수송으로 시간을 단축하여 '가일층 빠르게 더 많이' 수탈해가기 위해서였다.>
<국민보 1937년 8월 25일 자 1면 1단∥식량에 급급한 일본, 일본은 중국전쟁(중일전쟁)을 일으켜 놓은 후에 식량 부족을 우려하여 한국 안에서 아직 추수가 먼 곡식을 미리 추수를 예상하여 겨우 그 농작자에게 식량 할만치만을 제하고 미리 방곡(防穀)한다더라.∥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안창호가 이강 등에게 보내는 창호지에 잘게 쓴 편지들을 노끈으로 꼬아 허리춤에 넣고 꿰매는 걸 마지막으로 행장은 모두 마무리되었다. 그로부터 서너 시간이 지나 첫 닭이 홰를 치기 직전 재명은 늦저녁 무렵 미리 와있던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계속)
참고:
이재명 의사 의거 당시 대동강의 경의선 철교 및 기타 철교
이재명 의사가 자주 이용했을 경의선 철교는 양각도철교였다. 관련하여 잘못 알려지거나 잘 알지 못했던 몇 가지를 지금의 사진과 옛 사진 등을 통해 잠깐 짚어본다.
당시 대동강엔 '쇠다리'로 부설한 다리가 상류 쪽 능라도부터 하류 쪽 양각도까지 총 4개 있었다. 능라도 북쪽 끝머리쯤 철교는 명칭이 확인되지 않고, 부벽루 남쪽에 전금문 앞 청류벽과 능라도를 잇는 벽라교(능라도에서 취수하고 정제한 수돗물을 평양성 내외로 공급하는 대형 수도관을 함께 부설한 통칭 수도국다리), 대동문에서 양각도 사이 중간쯤에 대동강철교(대동교), 그리고 양각도에 양각도철교가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대동강철교, 즉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부서졌던 대동강철교의 당시 명칭은 대동교(대동강인도교)로, 지금도 역시 대동교라고 한다. 양각도철교는 당시 명칭도 양각도철교, 지금은 양각다리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각종 신문 등에서는 두 철교 모두 '대동강철교'를 혼용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양각도철교는 양각도 기준, 대동강역 쪽과 평양역 쪽을 제1, 제2 철교로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 오늘날의 대동강철교(대동교/대동강인도교)와 양각도철교(양각다리)
△주체탑에서 바라본 오늘날의 대동강철교와 양각도철교 모습으로, 두 철교 모두 일제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병참 목적에 황급히 부설할 당시와 거의 같은 위치로 추정된다. 양각도철교 부설엔 집을 잃게 된 양각도 주민들의 반발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각사등록 근대편-평양 양각도 철교 건설 등과 관련하여 일본공사관과 협상을 청하는 조회 1905년 10월 12일 (이미지 출처: 원본-한국의 사라진 대표다리 (1) - 고구려 대동강 대목교 (평양)☜)
(나) 엽서로 본 대동강철교(대동교/대동강인도교)
△처음 세울 때는 교각과 교각 사이에 시렁을 얹어 이은 듯한 사각형 가교(架橋)로 세웠다고 전하며, 일제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때 양각도철교와 함께 병참 목적에 황급히 부설해 얼마나 허술했는지 개통식 시운전에 일반인은 아무도 타지 않았고 승무원은 결사대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수리 또는 재부설했으며, 전찻길 목적이 우선했던 것으로 보이는 지금의 아치형 트러스교는 1905년 처음 세웠던 가교 하류 쪽 바로 옆 37m 위치에 새로 세운 다리라고 전한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이미지 뷰어 38쪽☜)
(다) 연광정과 대동강철교(대동교/대동강인도교)
△연광정 아래로 덕암 바위 성벽을 돌아 나오는 강변 오솔길이 너럭바위 암반이라 그런지 다소 거칠어 보인다. 연광정 앞 북쪽에서 찍은, 즉 바로 앞에 보이는 덕암소 이쪽의 빨래터 혹은 나루터쯤에서 남쪽으로 연광정과 함께 찍은 대동강철교 모습이다.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대동강철교'는 1905년 첫 개통 이후,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에 지점문제(위치), 수도국, 근황, 서울 한강철교와 같이 다리 가설하다 조수가 밀려 인부참사, 개통식, 도교식, 부설 등의 기사가 계속 이어져 여러 번 재부설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자료: 한국역사정보 및 미디어가온 검색어-띄어 쓴 대동강 철교, 양각도 철교 (이미지 출처: 원본-평양 전금문☜)
(라) 오늘날의 옥류교와 능라다리 및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옛터
△주체탑에서 바라본 옥류교와 청류벽 쪽 능라다리 일대 모습이다. 청류벽이 올라가다 잠깐 쉬어가는 전금문 앞 화살표는 지금은 사라진 통칭 수도국다리 벽라교가 올라서던 위치로 추정된다. (적어도 이재명 의사 의거 무렵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능라다리쯤이 그 끝이었던) 퇴적으로 길어진 능라도 끝에 졸아든 반월도가 다리로 이어졌다. 길어진 능라도 왼쪽 어디쯤 고구려 동명성왕이 청류벽 아래 '기린굴에서 기린마를 타고 나와 승천했다'고 하는 '조천석'이 있겠고, 퇴적 전의 능라도 끝에서 침식으로 호를 이룬 옥류관까지는 백은탄 여울로 추정된다. 예전에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외적이 쳐들어오게 되면, 스스로 울려 경사를 축하해주거나 적을 물리치게 도와주었던 신비로운 하얀 은종을 감춰뒀었다는 옛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하여 여울 이름을 백은탄이라 했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원본-북한의 풍경 57번☜)
(마) 청류벽 위의 오늘날의 청류정 및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옛터
△파인 김동환은 대동강과 청류벽을 묘사해 '일보에 참일경하고 오마장에 참일루하며 한참 올라가노라니, 능라도의 실버들은 강가에 머리 잠그고 섰고 수백 간의 철교는 고기 찾는 백로같이 물 가운데 간 듯이 올라서고 있는데, 단청 칠한 부벽루 을밀대 모란봉의 그림자가 강 위에 가로 박히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그 백로와도 같던 수백 간의 철교 즉 벽라교는 시절 따라 긴 세월 풍상을 겪고 쓰임새가 사라져 온데간데없으니, 화살표는 곧 벽라교가 '올라서고 있던' 바로 그 위치로 추정되는 곳을 가리킨다. 한편 청류정은 원래 지금의 중구역 서문동에 있던 서문의 누각, 즉 평양성 내성에서 중성으로 통하는 내성의 서문 정해문의 문루였다. 1927년 일제가 흔히들 서문이라고 부르던 정해문을 없애고, 그 문루를 이곳으로 옮겨 세워 청류정이라 새로 이름을 했다. 하여, 이재명 의사 의거 당시엔 '청류정'이 '서문 제자리'에 있었단 얘기다. (이미지 출처: 원본-사진으로만 보는 북한 평양의 명승지☜)
(바) 연광정 엽서로 본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연광정 앞 남쪽 빨래터 바로 아래 나루터쯤에서 바라본 연광정 사진 속에 모란봉 바로 밑에 청류벽과 능라도를 잇는 벽라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연광정 앞 북쪽에도 덕암소 위쪽으로 빨래터가 있고 또 나루터가 있으며, 양 나루터는 대동문 나루터 및 육로문 나루터와 더불어 대동강의 황포돛배 내륙 수운 물류항(物流港)을 겸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조선 시대에는 새로 부임하는 평안감사의 환영잔치 뱃놀이가 해가 진 뒤에 대동문과 연광정을 중심으로 저 위 능라도까지 열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이미지 뷰어 46쪽☜)
(사) 청류정 엽서로 본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및 능라도 북단 다리
△청류정과 모란봉을 함께 찍은 사진 속에도 전금문 앞에 벽라교가 보인다. 저만큼 능라도 북쪽 끝머리쯤에도 벽라교 비슷한 다리 하나가 어슴푸레하다. 목교일 수도 있으나 필자는 철교로 추정한다. 딱히 부설과 해체가 손쉬운 부교가 아니라면 황포돛배 등이 통과할 수 있도록 벽라교와 같은 철교라야 할 터이다. 명칭은 확인되지 않지만, 평양성 내외로 수돗물을 공급하는 통칭 수도국다리 벽라교처럼 평양성 외 즉 기타지역으로도 수돗물을 공급하는 벽라2교쯤으로 추정된다. 그 위치에서 상류 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황포돛배 내륙 수운 물류항을 겸했던 나루터와 마을 등이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오른쪽 화살표/19회 본문에 보충 예정). 능라도를 벗어나 또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대동강 지류 합장강이 흘러드는 합수머리가 금방이다. 화살표 다리 아래 양쪽 별표는 1995년에 완공한 청류벽 북쪽구간 금릉2동굴 터널과 능라도 5·1경기장 바로 아래 청류다리 2단계 아치교 650m 구간 일부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이미지 뷰어 68쪽☜)
(아) 경의선 철교로 오인된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및 능라도 북단 다리
△청류정의 북쪽 끝쯤에서 바라본 (사) 사진 속의 모란봉 일대 모습으로, 황포돛배 두 척이 유유한 가운데 전금문 앞 벽라교가 손을 쭉 뻗치면 닿을 것만 같다. 하반영(1917~) 노(老) 화백이 1940년 9월에 직접 찍었다고 하며, 화백은 김천태생에 군산에서 자라선지 오랜 추억에 경의선 철교로 잘못 알고 있었다. 경의선 본선 철교는 양각도 남쪽 대동강역과 성내 평양역을 잇는 양각도철교라고 하는 평양 출신 인사 이재천 선생의 증언도 있다. 능라도 북쪽 끝머리쯤의 다리 등의 모습도 (사) 사진 속과 같은 모습으로 훨씬 가까워 좀 더 선명하다. 한편, 모란봉 북동쪽 저만큼 그리 멀지 않은 합장강이 남동쪽으로 흘러 능라도 북단 오른쪽 건너편 추남허 언덕 아래 금강사터를 끼고 돌아 대동강과 합류하게 되는 합수머리 능라도 쪽은 강물이 급히 여울져 흘러 금강탄 여울이라 한다고 전한다. 능라도 남쪽엔 백은탄이, 또 북쪽엔 금강탄이 있는 셈인데, 이 금강탄은 하 오랜 세월 능라도 형성에 어떤 작용을 하진 않았을까 하고도 한번 생각해 본다. (이미지 출처: 오마이뉴스-96세 노 화백…☜)
△모란봉과 을밀봉 사이 능선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부벽루 뒤로 고구려 시절 광개토대왕 초기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 영명사가 있다. 영명사는 원래 오른쪽 아래로 뒤쪽에 있었으나 청일전쟁으로 훼손됐다가 일제강점기에 복원하면서 저 위치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저마저도 한국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사라져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원래 위치의 영명사터 뒤로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왕궁 구제궁이 있었다곤 하는데, 구제궁 옛터에 영명사를 지었다고도 한다. 어쨌거나 영명사 혹은 구제궁터 뒤편 왼쪽 위에 있는 '기린굴'은 청류벽 밑으로 옛 왕궁문터 즉 장경문터 밖 강가 바위까지 관통돼 있다고도 하며, 동명성왕이 기린굴에서 '기린마'를 타고 나와 능라도 남쪽 끝머리 반월도 앞의 썰물에만 보이는 조천석 바위에서 승천했다고 하는 옛 얘기도 전한다. 부벽루도 원래는 지금의 부벽루와 오른쪽에 세로로 서 있는 지금의 전금문 사이 '두 그루 나무' 옆쯤에 있던 평양성 북성의 원래 남문 전금문(혹은 영명사 산문) 누각으로, 조선 중기쯤 지금의 위치로 옮기며 부벽루를 이고 있던 문은 막아버린 다음, 원래 위치 옆에 있던 누각이 없는 암문(暗門/혹은 원래 전금문)에 누각을 새로 얹고, 이후 바로 안쪽 득월루 바로 옆에 영명사 산문도 새로 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원본-일제강점기 우리 도시의 모습☜)
(차) 전금문과 대동강 엽서로 본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교각과 교각 사이에 시렁을 얹어 이은 듯한 사각형 가교(架橋)로 세워진 벽라교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다가온다. 청류벽과 능라도를 잇는다 하여 벽라교라 이름을 했다. 능라도 남쪽 끝머리에 걸린 반월형 섬은 반월도이고, 두 섬 사이 바로 앞에는 썰물에만 보이는 조천석 바위가 있으니, 동명성왕이 '기린굴'에서 '기린마'를 타고 나와 내려앉았다가 승천했다고 하는 전설이 스며있다. 굴의 위치는 반월도 오른쪽 청류벽 남쪽 끝머리쯤 길 아래 강가로 추정된다. 사진 위쪽 저 멀리 하류 쪽엔 희미하게나마 대동강철교(대동교/대동강인도교) 대동문 등이 보인다. 출처를 클릭하여 이미지 뷰어를 확대해서 보자. 어렴풋하긴 하지만 그런대로 연광정 건너편 둑 너머 마을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카) 대동강철교로 오인된 1910년의 대동강다리 즉 벽라교(통칭 수도국다리)
△전금문은 용마루만 힐끗, 금수산 최고봉인 모란봉의 최승대쯤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차) 사진과 다를 바 없는 청류벽과 능라도를 잇는 전금문 앞 벽라교 모습이다. 대동강의 철교이긴 하지만 대동강철교는 아니다. 부연설명 없이 대동강다리라고만 하면 재부설하기 전의 대동강철교나 양각도 제1 혹은 제2 철교로 오인하기 쉽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굴(窟) 남쪽 백은탄(白銀灘)에 바위가 있는데 밀물에는 묻히고 썰물에는 드러난다. 이름을 조천석(朝天石)이라 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을 타고 굴속에서 나와 조천석에 올라서 천상(天上)에 주사(奏事)하였다."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