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19]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10. 31. 17:03

(19회)

 

△연해주지역 해삼위, 블라디보스토크 첫 한인 거주지역 구 개척리 일대 오늘날의 모습∥현재의 포크라니치나야 거리 1번지로부터 '둔덕마퇴'라 부르던 아무르 만에 접해 있는 남쪽 언덕과 '웅덩마퇴'라 부르던 그 아래 저지대 일대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한인 거주지)라 불리던 개척리 마을이 있던 곳이다. 1911년 5월 러시아 당국은 콜레라예방을 이유로 마을을 폐쇄하고 한인들을 모두 신한촌으로 이주시켜 기병대의 주둔지로 삼았다. 이후 이곳은 '구 개척리'라고 했고, 교외의 새로 형성된 신한촌은 '신 개척리'라고 했다. 이곳 구 개척리는 을사늑약 이후 경술국치 전후로 신채호 장지연 이강(이정래) 홍범도 유인석 등 저명한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거점이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1쪽~2쪽)

 

연해주지역은 간도지역과 함께 우리의 고대사 부여 북옥저 고구려 발해 등의 영역이었다. 고려 시대 이후엔 여진·만주족이 차지, 이후 역사의 굴곡 따라 17C 중반에 이르면 간도는 청나라 영역의 봉금지(封禁地)로 남고 연해주는 러시아가 차지한다.

 

이 두 지역에 우리 민족의 재유입이 시작된 것은 1860년대부터였고, 을사늑약 이후 절정에 달한다.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 거듭되는 대흉작 등을 피한 농민들로부터 시작돼제의 흉계로 땅을 빼앗긴, 나아가립투쟁을 위한 이주 행렬이었다.

 

<1881년 청나라가 간도지역 이주동포를 추방하려 하자 우리 정부는 변계경무서를 설치했고, 간도시찰원(1902) 간도관리사(1903)를 파견했다. 이는 실효지배를 통한 고토회복의 실현이었다. 간도관리사 이범윤(주러 한국공사 이범진의 동생-헤이그 특사 이위종의 숙부)은 정부의 병력지원이 여의치 않자 사포대(私砲隊-관리병)를 조직하고 행정자치를 꾀하면서 청나라에 납세를 거부했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엔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으며 일본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국내소환을 거부, 사포대병력을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하여 최재형 이위종 김두성 안중근 유인석 등과 함께 (동의회-창의회-의군부대 창설) 독립전쟁에 헌신했다. 이범윤, 왕년에 의형제를 맺었던 이완용과는 삶의 행로가 극명하게 갈린다.>

 

1907년 후반 무렵의 연해주지역 한인 동포는 벌써 10만 명을 웃돌고 있었고, 당시 동포사회의 중심엔 군납으로 러시아의 거부가 된 연해주 연추(안치헤, 크라스키노) 도헌(지방행정관),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실질적인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좀 있었고, 이강(이정래)은 이 무렵 최봉준 차석보 최재형 등의 후원으로 대동공보의 전신 해조신문(해삼위 조선인의 신문) 창간준비에 몰두하고 있었다. (1908년 2월 창간, 석 달 뒤 5월 제호 변경)

 

△독립운동 유적지,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지 대동공보 사옥이 있던 한인거류지의 오늘날의 모습과 옛 모습∥자료의 소실, 지형의 변화 등으로 현재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포크라니치나야 일대(구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거류지 600호에서 창간했으며(1908년), 이후 469호 67호를 거쳤다(1910년 폐간). 주요 임원은 차석보 최재형 유진율 윤필봉 이강(이정래) 및 러시아인 미하일로프 등이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1쪽~2쪽)

 

여정은 열흘, 예상외로 꽤 순탄한 편이었다. 재명을 포함한 '도붓장수' 일행은 양양 청호(청초호, 속초)에서 배를 타고 원산으로 이동, 원산에서 다시 러시아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일행은 일단 동포가 운영하는 여관을 잡아 들었다.

 

이강의 숙소는 외길로 쭉 뻗은 한인촌 거리 초입에 있었다.

 

"풍찬노숙이라더니…참…자네도 고생은 타고났네…"

"그러시는 형님은 또 어떻고요…"

 

두 달 반 만에 다시 만났다. 이미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걸어버린 두 사람이지만 서로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재명은 행장을 풀고 갖고 온 편지 등속을 꺼냈다.

 

"검문은 어떻게, 심하지 않던가?"

"예, 두어 번 있었지만, 길잡이 하신 분이 워낙 담대하고 언변까지 좋아서…"

 

인사를 끝내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었던 그간의 일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재명은 서너 달 앞서 귀국한 함동철의 소식도 들었다. 평양 성모여학교 선생으로 있다고 한다. 연해주지역 한인학교서 필요로 할 만한 책들을 한 보따리 가져왔었고, 북간도지역 몇 군데 더 들렀다가 지금쯤은 평양 돌아가 있을 거라고 한다.

 

두 사람의 속마음은 한가지, 재명의 블라디보스토크 여정은 사실 임무를 마친 후의 국외탈출 노정 사전 학습에 다름없었다. 이강은 그동안 파악하고 전해 들은 수많은 이주민 외 망명인사들의 경험을 토대로 서너 군데 경로를 약도로 그려 설명하면서 신신당부하여 절대로 서두르지 말고 탈 없이 임무 끝내면, 미국 다시 가라 이른다.

 

이강의 임무 진행 상황은 공립협회 지회설립은 아직 일러서 신문발간을 통해 동포들의 의식을 깨우는 일이 급선무, 유지인사들을 만나 논의 중이라고 한다. 그런데 동포사회 일각에 뭔가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고 한다. 한탄이 지나쳐 나라가 망해도 싸지 하는 인사도 있고, 노골적인 친일파에 밀정으로 의심되는 자도 있다고 한다.

 

여러 얘기 끝에 이강은 신문창간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평남 용강 고향 집에 며칠 다녀올 텐데 소개해 줄 사람이 있다며 그때 다시 대성학교서 만나자고 했다.

 

재명은 그날 밤 이강을 방문한 의병계열 인사 몇 사람을 소개받게 된다. 그중에는 안중근도 있었다.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연해주를 왕래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사흘 뒤에 재명은 다시 국경을 넘었다.

 

△왼쪽-개화기 무렵 대동강 건너 동쪽에서 바라본 평양 모습이다. 189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출처를 클릭하여 이미지 뷰어를 확대해서 보면 대동문과 연광정 모습이 한눈에 훤하고 오른쪽 끝머리 구릉에는 을밀대로 추정되는 누대도 보인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오른쪽-대동 어느 곳의(두루섬 또는 능라도) '평양 물류항(物流港)' 모습이다. 끊리 하나 저만큼, 기와지붕 잇닿은 이쪽 마을과 초가지붕이 섞여 있쪽 마을 사이에는 마을을 가르는 길 난간도 또렷보인다. 양지역은 근대에 접어들어 상업부문에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폐쇄적 성향이 강했던 이남 지역 대비, 서구문물수용에 개방적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화파 인물이 많이 나올 수 있었으며, 미국 상선 너럴셔먼호 사 등 서양세력의 침략적 위협에 강력 대항하기도 했고, 또한 예로부터 평양은 대구 및 강경과 더불어선의 3대 시으로 상업으로 번창, 1898년 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되었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왼쪽-1866년 8월경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무장을 갖추고 황주목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신장포에서 약탈까지 하고, 또 만경대 일대에서 행패를 부리다 평안감사 박규수 이하 평양성 군민에 의해 소각 침몰당한 바로 그 일대, 양각도 서편 두루섬 일대 지금의 지도이다. 금색 별표는 지금의 '만경봉 만경각/만경대 정각'치를 표시하고 흰색 별표는 '평양 물류항' 사진 속 끊긴 다리의 위치로, 화살표는 마을로 추정되는 곳이다. 끊긴 다리 아래 저편으로도 추정할 수 있는 만경봉의 동쪽 아래에는 '만경대 화촌 10경'의 하나로 동림송객으로 유명한 동림선창 나루터 지금도 있다고 전한다. 오른쪽-능라도 북단 일대 지금의 지도이다. 두루섬 일대와 더불어 주변 형세가 사진 속과 꽤 닮아있어 같이 한번 추정지로 꼽아보았다. 금색 별표는 지금의 청류정 위치를 표시하고 실제로도 한때는 다리가 있었던 흰색 별표는 끊긴 다리의 위치로, 화살표는 마을로 추정되는 곳이다. 대동강 일대에는 황포돛배 내륙 수운 물류항 나루터가 여러 군데 있었다. (이미지 출처: 국토부 브이월드-평양)

 

△내륙 수운의 물류항을 겸했던 육로문 나루터 건너편으로 추정되는 한 나루터와 대동문 나루터의 선교(배다리/줄줄이 배를 띄워 상판을 깔고 밧줄로 고정한 부교) 모습이다. 옹성이 사라진 대동문에 강기슭의 석축과 주변 건물들의 모습에서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1900년대 중후반 모습으로 추정된다. 전엔 지금의 대동교 조금 아래 선교가 있어 선교 근처 마을은 선교리였다. 금도 선교구역 1~2동(원 선교리) 등이 남아다. 한편 선교리 일대는 대동문 보통문 모란봉 일대와 함께 이재명 의사 유년 시절에 벌어진 청일전쟁 최대의 격전지, 이른바 평양전투 격전지였다. 의사 가족은 청국군 본영이던 연광정을 일본군이 점령하기 직전에 피란을 떠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원본-일제강점기 우리 도시의 모습☜)

 

△왼쪽은 두루섬 왼쪽의 고노섬쯤에서 찍'만경봉의 만경각/만경대 정각'오늘날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능라도쯤에서 찍은 모란봉 남쪽 청류벽 위 청류정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모르는 사람은 설명 없이는 쉽게는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대동강과 어우러진 절벽의 형세가 매우 흡사하다. '모란봉 만경대에는 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만경각이 대동강을 굽어보고 있습니다.'라고 잘못 서술한 책까지 판매되고 있다. 평양 하면 그저 '모란봉'인가 보다. '종로 쾌재정'을 '모란봉 쾌재정'으로 잘못 알고 전파하는 사람 또한 많다(5회 참고2 참조, 20회에 추가 예정). 하여, 내친김에 잘못 전파된 정보를 바로잡아 '만경봉의 만경각'과 '모란봉 남쪽의 청류정'을 함께 대조하여 올린다. (이미지 출처: 원본-사진으로만 보는 북한 평양의 명승지☜)

 

(계속)

 

참고:

이재명 안중근 양 의사의 친분에 관하여

 

흔히들 역적을 처단할 '기회를 엿보던 시기'로만 알았던 이재명 의사 1907년 10월 귀국 이후 1909년 여름까지의 행적을 조사하다 희미하긴 하지만, 유의미한-결정 두 분 의사의 친분에 관한 단서들을 찾았다. 2부 중반부 행적서술에 앞서 이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재명 의사는 당시 서울 평양 간도 연해주 등지를 오가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와 가족사진∥1909년 10월 27일 찍어서 안중근 의사에게 전달했다고 하며 서거 순간까지 품속에 간직했던 사진이라고 한다. 부인 김아려 여사가 안고 있는 아이는 차남 준생(만 2세), 서 있는 아이는 장녀 현생(만 7세)이다. 장남 분도(만 4세)라고도 하나, 머리는 짧아도 옷차림은 여아다. (이미지 출처: 원본)

 

#1. 안중근 의사의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의하면 1907년 8월 1일 군대해산 직후(즉 남대문전투 직후) 행장을 꾸려서 북간도로 망명, 서너 달 동안 각 지방을 시찰한 다음, 연해주 연추를 지나 해삼위항에 도착하여 청년회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대강 짐작으로 11월 초~중순, 이재명 의사와 조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 이재명 의사의김용문(김중화/김동산)은 징역을 마치고 동지 두 사람과 동행, 길림(길림성 길림현 연길도/국자가 추정)에서 오인성 여사를 만나 목릉으로 함께 갔다고 한다. 목릉에는 안중근 의사의 자당과 부인, 계씨 등이 살고 있었으니 동병상련 두 유가족 상 암시, 두 분 의 친분에 관한 의미 단서이다.

 

#3. 신한민보 1910년 1월 19일 자 기사에 이재명 의사의 일방적 진술이긴 하지만 두 분 의사의 친분에 관한 결정적 단서가 들어있다. 거사 직후에 받은 이재명 의사 심문 내용 일부이거나, 예비신문 직전 담당 변호사 안병찬 혹은 이면우에게 사전 진술한 내용 일부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12월 말쯤에 진술한 내용이다.

 

△신한민보 1910년 1월 19일 자 3면 5~6단(연결)∥이씨쾌담 옥중에 있는 이재명 씨는 상처를 조금도 괴로워하지 아니하고 가끔 이완용의 생사를 물으며 말하되 이완용은 단기의 유업을 한 손에 들어 일본에 주었으니 국가에 대역부도라 옛말에 난신적자는 인〃득이주지라 하였으니 여사한 역적을 주륙코자 하는 내 몸에는 마땅히 법률을 쓰지 못하리라 하며 또 말하되 나는 이등을 암살한 안중근 씨와 친한 터이나 그 일에는 관계가 없고 금년 二月에 해삼위로부터 귀국하여 十月달에도 대한의원 낙성연에와 또 정거장에서 이완용을 잡으려고 수차 엿보았노라 하였으며 당일에 행사하던 칼은 아라사 군인의 쓰는 창끝이라더라.∥행리수삭 이재명 씨는 평일에 품은 뜻이 있는 고로 그 행리는 기생 난희 집에 두었는데 경시청에서 난희 집을 수가하여 이재명 씨의 행리를 들쳐 내었는데 그 안에는 단총에 쓰는 탄환과 五조약 七조약의 원문과 그때에 서명한 五 七적 대신의 성명을 기록하여 넣은 것이 있다더라.∥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이미지 뷰어☜)

 

○인인득이주지(人人得而誅之)라: (역적을 다스려) 모든 사람이 죽여 마땅하다

○대한의원 낙성연: 1909년 11월 16일 새로 지은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낙성식 겸 제2회 졸업식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의원 '병원' 낙성식은 1908년 10월 24일에 있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 가온 고신문 검색 서비스, 대한의원 낙성☜)

아라사 군인의 쓰는 창끝: 러시아군의 긴 총검 (날에 홈을 넣은 비수형 단도 개량 추정/추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아본 통감부문서 10권▷6. 전송공철▷(54) 이완용 피습 건(왕전 제44호), 거사 당일 오후 220분에 당시 한국통감 소네아라스케가 일본수상 가쓰라타로에게 보낸 전문엔 이완용이 식칼 모양의 것에 세 곳을 찔렸다고 했고, 이 의사의 동지 김용문은 날에 홈을 친 비수형 단도라고 했는데, 정작 이 의사 본인은 아라사 군인의 쓰는 창끝이라고 했다. 결국은 같은 내용으로도 볼 수 있는바, 이 의사가 해삼위 등지를 오가면서 구한 러시아군의 총검을 사용하기 편하게 칼날 길이 18cm 전후 작은 식칼 모양 비수형 단도로 새것으로 다시 벼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러시아군 총검은 40cm쯤의 길쭉한 송곳형 스파이크 총검이었으며, 역시 당시 주력 소총 모신나강 초기형 M1891의 긴 총신에 착검하게 되면 전체 길이가 173cm 이상이 돼 마치 창처럼 보였다고도 전한다.)

 

내친김에 바로 옆 기사 '행리수삭'도 함께 옮겼다. 이재명 의사의 보따리를 맡았던 기생 난, 어쩌면 그녀는 1907년 8월 1일 격렬했던 '남대문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제중원(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안창호 등의 도움으로 연해주지역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장병, 또는 당시 프랑스 신문 '르 프디 주르날'이 언급한바 '탄약을 나르고 사상자를 간호(수습/후송)하다 참변을 당한 서소문 연지학 여학생들과 주민들' 일원과 친지였거나, 사상자 후송에 동참했다고 추정되는 대한의원학생이면서 이재명 의사 동지인 김용문 오복원 등과도 역시 어떤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 등의 여러 정황으로은 동지일 가능성을 배제하진 못한다.

 

2012.10.31(수)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