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20]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11. 30. 18:34

(20회)

 


△왼쪽-연광정은 고구려가 6C 중엽 평양성을 세우면서 처음 세웠고, 1111년 다시 세울 때는 산수정으로 이름을 했었다. 사진은 1931년에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11(朝鮮古蹟圖譜 十一)에 실려있다. 1920년대에 공원을 조성하며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흔히들 오인하여 연광정으로,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남문 전금문 옆에서 바라본 부벽루 모습이다. 누가 찍었을까. 어느 이른 봄날, 앞서가는 사내는 검누른 패랭이에 괴나리봇짐 둘러멨고, 땋은 머리 검정 치마 처녀 둘이서 그 뒤를 따라간다. 키 큰 처녀는 가방을 팔에 걸쳤다. 어디로 가고들 있는가. 연광정골 살던 이재명 의사 또한, 저기 저 길 따라 걸어 다녔으리라. (이미지 출처 왼쪽: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북한의 문화재☜/오른쪽: 원본☜)

 

△왼쪽-일제강점기 연광정 사진엽서로 남쪽 빨래터와 북쪽 덕암소 위 나루터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이미지 뷰어 46쪽☜) 오른쪽-일제강점기 전금문과 부벽루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한국의 사라진 대표 다리 (1) 고구려 대동강 대목교 (평양)☜/참조-북한 평양성 연광정☜)

 

아버지와 동생

 

재명이 동구 밖에 도착할 무렵엔 어느새 땅거미가 스멀거리고 있었다. 저기 저만치 뉘 집 울타리 너머 벌거벗어 앙상한 살구나무 한 그루가 희뜩희뜩한 눈발 사이로 을씨년스럽게 다가선다. 바람까지 맵짜게 몰아쳐 굵어진 눈발이 한층 더 사납다.

 

"야, 야, 재호야! 네 형이다!"

 

돌쩌귀가 헐거워 덜컹 삐거덕하는 대문 여는 소리에 밥 먹다 말고 내다보던 임씨가 댓바람에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치며 뛰쳐나왔다. 거짓말처럼 큰아들이 들어온다.

 

"딱 보니까 너다. 아이고, 재명아…"

"예, 아버지, 들어가십시다…"

 

느닷없는 아버지의 외침에 깜짝 놀란 재호는 영문도 모르고 숟가락을 쥔 채 후다닥 튀어나와 흙마루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금방 제 형을 알아보고 발을 동동 구른다.

 

"형님…형님…"

"그래, 형이다. 우리 재호가 그새 많이 컸구나…"

 

재명이 큰절로 문안을 올리고 엉덩이를 미처 자리에 앉히기도 전에, 계부 임씨는 얼른 일어나 다시 부엌으로 나갔다. 우리 큰아들 몇 년 만인가. 군불을 지피고 밥을 새로 했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세 식구가 오붓하다. 김치 한 가지에 된장국뿐으로 밥상은 영 옹색하지만 그야말로 진수성찬, 심지를 한껏 돋운 남폿불도 춤을 춘다.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운 다음, 화롯가에 세 식구가 다시 둘러앉았다. 재명은 윗목에 벗어둔 외투를 끌어당겨 봉투 두 개를 꺼내어 하나는 아버지께 드리고 또 하나는 재호한테 주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혹시라도 모를 일, 그저 돈 봉투만 준비해서 따로 챙겨 뒀었다. 아버지 봉투엔 살림비용을 담았고 재호 봉투엔 용돈을 담았다.

 

"아이고, 30원…이렇게나 큰돈을…고맙다…내가 너한테…면목이 없다…"

"저는 괜찮은데…형님, 고맙습니다…"

 

다행이다. 아버지와 재호가 무사하다. 겨우 자리 잡고 써 보낸 편지들에 아버지는 답장이 없었다. 별의별 생각에 너무 심란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 애써 그리 간주했었고 임무를 띠고서야 귀국한 터였다. 듣고 보니 아뿔싸, 영서로 된 주소 쓸 줄을 몰라서 답장을 못 했다고 너를 볼 면목이 참 없다고 하시면서 거듭 미안해하신다.

 

"아버지…죄송해요…제 불찰입니다. 아예 답장 봉투를 미리 적어서 함께 부쳤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여태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아니다…그려서라도 보냈어야 했는데…내가 미안하지…"

 

그렇게 시작된 세 식구의 이야기는 밤이 이슥토록 도란도란, 끝없이 계속됐다.

 

아버지는 재명의 어릴 적 소소한 일들을 꽤 여럿 기억하고 계셨다. 천자문 한 자를 가르쳐 주면 두 자를 가르쳐 달라, 두 자를 가르쳐 주면 넉 자를 가르쳐 달라, 정말이지 무척 총명했다고 하신다. 아버지가 누구랑 말다툼이라도 할작시면 재명이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서 왜 우리 아버지하고 싸우느냐고 대들어 싸는 통에 좀처럼 누구하고 시비도 못 해봤다는 대목에선 아버지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재호도 외탁인가 보다. 커갈수록 나를 똑 닮아간다. 지금 일신학교 1학년, 공부도 웬만큼은 잘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또 재호 자랑에 여념이 없다. 내가 없어도 식구들은 괜찮겠다. 안심이다.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지. 나라가 망하는데 괜찮으면 어떻고 안 괜찮으면 또 어쩔 텐가. 아니야, 그래도…아버지, 죄송합니다…서울이나 인천 어디…장사나 해볼까 귀국한…아닙니다…으흠…호야…너는…앞으로…

 

"명아…자냐?…형이 되게 피곤했나 보다…우리도 인제 자자…"

 


△왼쪽-연광정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고구려 평양성의 내성 동쪽 장대(將臺)였던 연광정은 여러 차례 중수 중창 새로 지었으며, 한국전쟁 때도 폭격으로 파손됐다가 원상 복구되었다. 1573년 이래로 ㄱ자형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오른쪽-부벽루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오른쪽 위엔 내성지역의 을밀대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부벽루가 있는 곳은 내성에 있던 왕궁을 보호하는 북성지역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참조: 평화문제~북한지역정보넷☜)

 

△왼쪽 연광정과 오른쪽 부벽루, 앞마당 한쪽에서 북동쪽으로 찍은 오늘날의 모습이다. 수양버들이 아름다운 평양, 고려 시기 한때 평양성은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아름다운 버드나무 서울, 즉 유경(柳京)으로도 이름을 했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연광정☜/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부벽루☜)

 

그리고 함동철과 함마리아와 오인성

 

날이 희번하다. 재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부엌에 계신다. 마당에는 눈이 제법 쌓였다. 어제완 달리 하늘도 쾌청하여 겨울답지 않게 푸근한 아침이다.

 

"피곤할 텐데 더 자지 원, 벌써 일어나…"

"잘 주무셨습니까. 깜빡 졸았는데 금세 아침이네요. 어, 이거 무슨 냄샙니까."

 

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어나 푸줏간을 다녀왔다.

 

"돼지고기 좀 떠왔다. 너무 일찍 왔다고 투덜대던 김씨가 글쎄, 우리 큰아들 미국 갔다가 어제 왔다고 하니까, 한 근만 달랬는데 반 근이나 더 썰어버린다? 흐흐흐…"

"예에…고맙습니다…마당에 눈은 제가 치울게요…"

 

재명이 눈을 쓰는 동안 재호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상을 차렸다.

 

"아버지, 호야 학교 갈 때 저도 같이 나갔다가 오후 서너 시쯤 올게요. 짐도 좀 찾고 함동철 씨라고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요…혹시 늦더라도 많이 늦진 않을 겁니다…"

 

(계속)

 

참고:

이재명 의사가 살았던 아청리와 연광정골, 그리고 종각과 쾌재정에 관하여

 

태어난 곳이야 평북 선천이지만 성장기를 보내면서 고향이었을 이 의사가 살았던 평양성을 한번 더듬어 보았다. 대성산(270m)을 저만치 머리에 두고 그리 높지 않은 금수산(95m, 모란봉)으로부터 시작, 완만한 구릉들에 골짜기들이 이어지다 평야가 펼쳐지고 보통강과 대동강이 '해자로 감싸는' 고구려의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옛적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100여 년 전의 구한국, 그 시절부터만 따져봐도 오랜 세월 한 세기 풍상에 당시 세부적인 모습은 물론 아주 딴판으로 달라져 알아보기 어렵겠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평양성은 지금의 중구역 평천구역 일대와 거의 일치한다. 아청리는 고구려 시절의 중성지역, 연광정골과 쾌재정은 내성지역에 있었다.

 

먼저 평양성 배치도와 중구역 지도를 살펴본 다음 아청리와 연광정골 개요와 함께 평양종을 걸어둔 종각의 원래 위치를 관련 이미지를 통해 알아봄으로써 쾌재정의 정확한 위치까지 추적해 본다. 쾌재정은 종로 공보터 안에 있었다(5회 참고2 참조).

 

▣고구려가 세운 평양성 배치도


△고구려 평양성, 둘레만 16km에 네 겹 각 구획 총 길이 23km로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중국 장안성 16km). 성 안엔 약 20만 명이 살았고, 주변 지역까지 합치면 약 50만 명이 살았다. 고구려 평원왕 8년(서기 552년) 축성을 시작(삼국사기, 당시 명칭은 장안성), 42년 걸려 완공했다(평양속지). 긴 자루처럼 생긴 평양은 전체를 성으로 둘렀으며, 성 안은 4구획으로 나누어 왕궁이 들어선 내성(內城)을 중심으로 그 위아래에 왕궁을 보호하는 북성(北城), 관청이 들어선 중성(中城), 그리고 일반 서민이 사는 외성(外城)을 두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참조: 내성의 북문 칠성문을 들어서면 장경문 근처에서 시작되는 만수대 언덕을 만나게 되고, 만수대 남쪽 끝자락에서 연광정 근처까지 장대재가 이어진다. 만수대 남서쪽, 장대재 언덕 서쪽으로 산등재가 밋밋하게 뻗어 있으며, 산등재의 서쪽으로 평양진위대 연병장이 있는 훈련재가 이어진다. 만수대 언덕 남서쪽 끝자락 산등재 훈련재 어름에 평양 감영이 있던 영문거리 마을 관찰부동이 있겠고, 또한 영문거리 남쪽으로, 연광정 대동문 남서쪽으로 중성지역에 저만큼, 지금의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광장이 있는 남산재 언덕이 우뚝할 터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지도는 별도의 방위 표시가 없어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작, 방위 혼선이 거의 없으나 평양도 등의 일부 옛 지도는 그렇지 않다. 실제의 남쪽 영제교를 지나 동대원 쪽에서, 동쪽에서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을 들어서게 되는데 실제의 동쪽을 밑으로 즉 남쪽으로 그려서인지, 옛 문헌엔 실제의 서북쪽을 동북쪽으로 기록하는 등의 오류가 더러 있다. 한 장의 지도에 모든 걸 표시할 수 없어 별도로 정리했다.>

 

평양은 평평한 땅, 벌판 등의 뜻을 지닌 우리 고유의 말 '부루나'를 한자로 적어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를 달리 적어서 평천, 평나가 되기도 한다. 고조선(단군조선) 시기의 '평양' 또는 '평양성'은 도성을 의미, '왕검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평양성'은 도성으로 천도한 안학궁 및 대성산성이었고, 이후 평원왕 때의 '평양성'은 도성으로 새로 세운 '장안성'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장안성의 명칭은 서경 유경 등으로 개칭을 거듭, 평양성~평양으로 오늘에 이른다.

 

▣평양시 중구역 지도


△예전에, 경림동과 대동문동 영역은 지대가 높아서 평양성 동쪽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동표동(東漂洞)이라 하였고, 인접하여 창고가 있던 마을은 창동(倉洞)이라 하였다. 나중에 동표동은 경림동으로, 창동은 경상동으로 흡수됐다가 지금은 대동문동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가] 아청리와 연광정골

 

#1. 아청리는 지금의 중구역 경림동 영역

 

대동문(大同門)연광정(練光亭)이 있는 평양 19구역의 하나인 중구역, 광복 당시 중구역 안에는 아청동 수옥동 관후동 등 51동이 있었고, 지금은 종로동 대동문동 경림동 등 2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청동 또는 아청리(衙廳里)는 지금의 경림동 영역으로, 김일성광장(중성동) 남쪽 종합청사 부근에 있던 폐리이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평양부 융덕면의 관아가 있던 아동(衙洞)과 향청이 있던 향청동(鄕廳洞)을 병합하여 신설했던 리로서, 아동의 '아'와 향청동의 '청'을 따서 아청리라고 하였으며, 광복 후 1946년 평양특별시 중구 경림리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2. 연광정골은 지금의 중구역 대동문동 영역

 

이재명 의사 세 살 무렵 1889년경 모자가 평북 선천에서 이주해온 곳은 평남 평양 아청리(아동 또는 향청동), 지금의 중구역 경림동 영역이었다. 이후 어머니 양씨는 연광정골(또는 연광동)에서 객주업 하는 임옥여에게 중매로 재가했다. 연광정골은 연광정이 있는 골짜기 또는 그 마을, 지금의 중구역 대동문동 영역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가까운 마을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대동문동은 1965년 경상동 경림동 등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신설한 동이다. 경상동에 흡수됐던 옛 창동 지역, 경림동에 흡수됐던 옛 동표동 지역 등이 포함됐고 대동문이 있는 동이라 하여 대동문동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재명 검색으로 통감부문서 14번 보고서를 보면 <平安南道 平壤 鍊光洞/당시 京城 南部 笠井 45통 6/尹容主 白 召史의 집에 거주/평민 무직 長老敎徒 李在明 24세>, 연광동이 언급돼 있다. 하지만 연광동의 행정구역상 정식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당시 '연광동'은 그저 단순히 연광정이 있는 마을 연광정골 의미에 더해, 실제 있었던 창동이나 동표동 일부를 일시 연광동으로 부르다가, 이후에 대동문동을 신설하며 사라진 '별칭'은 아닐까 하고 한번 생각해 본다.

 

#3. 연광정(練光亭)은 군사훈련장(軍師訓練場)의 장대(將臺)터

 


△북한 화가 김용록(1965~)의 '연광정의 달밤'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

 

고구려는 평양성의 내성(內城) 동쪽 덕바위(턱바위/너럭바위) 부근에 군사훈련장(軍師訓練場)을 설치했고, 이 덕바위를 장대(將臺)로 하였다. 장대는 장수(將帥)가 군사를 지휘할 때 올라설 수 있도록 좀 높은 곳에 돌로 쌓아 만든 대(臺)를 말한다.

 

덕(턱)에는 발판 모양의 대(臺),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 등의 뜻이 있으며 음차하여 德으로 적기도 하는데, 이 덕바위엔 장마철 큰물을 막아주는 은덕의 바위라 하여 德岩을 새겨놓았다고도 한다. 바로 이 덕바위 장대 위에 연광정(練光亭)을 세웠다.

 

연광정은 관서팔경의 하나로, 주변 풍광(風光)이 매우 아름다워 천하제일루 만화루 등으로도 불렸다. 그만큼 산수(山水)가 썩 빼어난 곳이다. 그리하여 옛적엔 산수정(山水亭) 덕광정(德光亭) 등으로도 이름을 했었고, 1670년 이래 다시 연광정이다.

 


△소산 박대성(1945~)의 '연광정'이다. 연광정에서 종각과 대동문을 함께 바라본 설경으로, 한지에 그린 수묵담채화 1997년 작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

 

[나] 종각과 쾌재정

 

#1. 평양종이 걸려있는 종각의 원래 위치

 

대동문과 종각, 연광정을 아울러 부감으로 담아낸 오늘날의 모습으로 종각의 현재 위치를 먼저 한번 살펴보자. 뒤쪽으론 저만큼 옥류교도 보인다.

 


△대동문동 대동문 부감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평양종과 종각 내력은 이렇다. 숙종 40년(1714년) 평양 북성 축성(개축), 북장대를 세우면서(개축) 대동문 다락에 있던 종을 옮겨 달았다고 하고, 오늘날의 평양종은 1726년 6월~9월 부벽루 서쪽 뜰에서 주조한 것이라고 하는데, 새로 만든 평양종은 당시 객사이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새로 지어 걸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종각이 따로 없었다는 얘기다. 대동관은 지금의 중구역의 중심인 '종로동' 영역에 있었다.

 

종로동은 1946년 관후리 계리 등을 병합하여 신설했으며, '종각이 있던' 거리라서 종로리-종로동이 되었다. 병합 전의 관후리는, 엿을 많이 만들어서 당동(糖洞)과 장대재의 하처골-하처동을 병합하여 1914년에 신설했던 마을로서, 대동관 청화관 신관 등 객사 뒤쪽에 있다 하여 관후리-관후동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객사는 관가에서 마련하여 '다른 지방에서 온 관원을 묵게 하던 숙소'를 이르던 말이었다.

 

따라서 새로(처음) 지은 종각이 있던 곳(대동관 앞), 다시 말해 종각의 원래 위치는 바로 지금의 중구역 종로동, 장대재 언덕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 부근이 된다.

 

장대재는 예전에 장대(將臺)가 있던 언덕(구릉)을 말하며, 집승대(集勝臺)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 평양 감영 군사를 지휘 관리하는 관청 '중군청(中軍廳)'이 있었다.

 


△중구역 종로동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과 역사유적'으로, 역사유적은 기자를 모신 고려 말당 숭인전과 단군왕검명성왕을 합사 모신 조선 중기당 숭령이며, 1977년 새로운 도시계획으로 길 건너편에 있던 숭인전겨와 두 '역사유적' 함께 있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추고: 자유아시아방송 2011년 5월 31일과 통일뉴스 2011년 6월 3일의 만수대지구 관련 기사에 의하면 종로동은 만수대지구에 속한다. 재개발, 녹지대, 공원화 등등 목적의 만수대지구는 크게 4개 지구, 만수대 언덕의 서쪽 만수동지구, 남쪽 종로동지구와 대동문동지구, 그리고 북쪽 경상동지구로 나뉜다. 하여, 위 사진 속 연못은 만수대지구 종로동지구에 있는 '만수대분수공원' 북동쪽 끝머리쯤으로 추정된다.>

 

#2. 옛 그림과 그림지도, 그리고 영상지도 등으로 보는 종각의 원래 위치와 쾌재정 및 기타

 

18C~19C 옛 그림과 그림지도 및 현대의 영상지도 등으로 종각의 원래 위치는 물론 연광정을 비롯한 애련당 쾌재정 장대 등의 자취를 세세히 한번 짚어본다. 기록으로 전해지는 어지간한 자료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ㄱ) 단원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일명 평안감사향연도는 세 폭으로 곧 부벽루연회도 연광정연회도 월야선유도 등이다. 이 셋 중 월야선유도의 연광정 바로 왼쪽 성곽에 바싹 붙은 은 지붕 하나가 종각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왼쪽 대동문 쪽에서 연광정을 드나드는 연광정의 대 지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傳 김홍도(1745~1806) 월야선유도'이며, 가로 세로 196.6×71.2cm, 새로 부임한 평안감사의 환영잔치를  지면서 대동강 뱃놀이로 벌이고 있는 광경을 장대한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렸다. (원본확대☜/부분확대☜)

 

ㄴ) 역시 평안감사향연도의 하나인 연광정연회도에서 월야선유도의 작은 지붕이 확인된다. 연광쪽으로 경계를 짓는 담장이 있고 드나드는 문이 있어 왼쪽은 작은 뒷문, 오른쪽은 대문이다. 종각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傳 김홍도(1745~1806) 연광정연회도'이며, 가로 세로 196.6×71.2cm, 평안감사와 일행이 연광정 안에 앉아 기녀들의 춤과 노래를 즐기고 있다. 앞마당엔 무슨 시합을 하는 듯 구경꾼들이 몰려있으며, 그 아래 작은 연못은 어린 여종 청녀의 한이 서린 청녀못으로 추정된다. 대동문 앞 거리에는 물지게꾼에 말구종, 아이들까지 보인다. 특이하게도 대동문 누각 2층 편액은 挹灝樓(읍호루)로 돼 있다. 문루에 앉아 손을 내밀어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바깥쪽을 그린 월야선유도엔 大으로 돼 있다. (원본확대☜/부분확대☜)

 

ㄷ) 겸재 정선의 '연광정'에 종각으로 착각하기 쉬운 연못 속 섬 위 애련당 누각이 들어있다. 연광정의 대문은 생략돼 있고 종각 역시 보이지 않는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진경산수화 '연광정'이다. 왼쪽 위의 낙관 옆은 누군가 묵서해 海東 第一勝 第一筆, 해동국(발해의 동쪽 우리나라) 제일의 절경을 제일의 필치로 그렸노라 했다. 벼랑에 올라앉은 연광정 북쪽의 모란봉과 저 멀리 대성산이 위용을 자랑한다. 모란봉 동쪽은 능라도이며, 능라도 아래 반월도는 이재명 의사가 동지들에게 국내외 정세를 설파하던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대동문 좌우로 마을이 보이고 바깥쪽 나루터와 연광정 너머에도 마을이 보인다. 어느 쪽이 과연 연광정골 마을일까. 어느 쪽이건 괜찮다. 상관없다. 모두가 다 이 의사가 살던 고향 평양성 아닌가. 자유로운 남북왕래 그날이 오면, 저 연광정 필자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이미지 출처: 원본/국립고궁박물관 고국으로 돌아온 '정선첩' 전시회)

 

ㄹ) 10폭 병풍 중 제2폭 능라도에 조선 후기의 판소리 명창 모흥갑(1822~1890)이 그려진 서울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작가 미상의 평양도(혹은 평양성도), 일명 평안감사부임도의 제3~6폭 내성지역의 일부로, 제5폭 대동관 중심의 부분도이다. 장대 언덕 정상엔 장대(將臺) 누각의 흔적만 남아있다. 종각과 쾌재정 등이 들어있다.

 


△대동관 입구 누문 왼쪽 아래, 벼슬아치 도열 뒤에 종각이 서 있다. 애련당 연못엔 누각이 생략됐다. 문헌상 대동관 동북쪽, 실제론 서북쪽 계단 위로 우뚝한 누각은 쾌재정이다. 계단 아래쪽은 '쾌재정광장'일 터이다. 성곽에 바싹 붙은 연광정 바로 왼쪽의 대문과 오른쪽의 뒷문도 또렷이 보인다. 대동문 옹성과 연광정 나루터 사이 성곽 아래 작은 구멍은 애련당 못의 수로를 겸한 생활용수로 수구일 터이다. 명칭 판독이 어렵고 시절 따라 위치가 바뀌거나 개칭되곤 하여 확실하진 않지만, 다수의 문헌을 통해 알게 된 것들로 좀 더 짚어보자면, 연광정 앞마당 한쪽 자그마한 못은 청녀못, 연광정 오른쪽 위의 못은 도영지, 그 왼쪽 위의 나무 아래 누각은 허물어져 새로 지어 명칭까지 바뀐 옛 풍월루로 추정된다. 허봉은 조천기에 애련당은 풍월루 앞에 있다고 했으니, 애련당 바로 위 대동관 입구 누문의 누각 또한 예전엔 풍월루였을 수 있겠다. 대동문 안팎 거리에서 나루터로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있어 이제 곧 도착할 새로 부임하는 평안감사의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이미지 출처: 원문☜)

 

ㅁ) 북한의 문화재 평양성전도의 대동관 중심의 부분도이다. ㄹ)의 평양도와 매우 흡사하다. 종각과 쾌재정 등이 들어있다.

 


△ㄹ)의 평양도와 마찬가지로 19C 조선 후기 작가 미상으로 색조를 제외하면 세부묘사만 조금 다를 뿐이며 화풍이나 구도는 거의 같다. 둘 중 하나가 모본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북한의 문화재☜)

 

ㅂ) 미국 포틀랜드박물관이 소장한 19C 조선 후기 작가 미상 평양성도 8폭 병풍 중 제3~5폭 내성지역의 일부로, 제4폭의 대동관(왼쪽)과 관찰부(감영/오른쪽) 중심의 부분도이다. 종각과 쾌재정 등이 들어있다.

 


△ㄹ)에 언급한 대동관 입구 누문의 누각과 함께 그 오른쪽, 옛 풍월루로 추정되는 도영지 왼쪽 위의 나무 아래 누각이 비슷한 시기의 ㄹ) ㅁ) 등과는 다르게 세로로 돼 있고, 대동관 및 쾌재정 서북쪽 장대 언덕 정상의 장대 누각의 흔적 또한 ㄹ) ㅁ) 등과는 다르게 사각으로 돼 있다. 그 오른쪽의 북쪽 큰길 끝에는 만수대 언덕 남쪽 기슭의 관찰부 즉 감영의 누문이 우뚝 서 있다. 그리하여 그 주변 마을은 '영문거리 마을'로 1908년 도산 안창호가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된 대성학교 위치 '관찰부동'일 터이다. 학교는 '관찰부동 켄녑 언덕'에 있었다. 참조: 조선 시대 각도의 으뜸 벼슬 관찰사를 이르는 말로는 감사(監司) 도백(道伯) 방백(方伯) 등이 있었고, 또한 관찰사가 직무를 보는 관아 관찰부를 이르는 말로는 감영(監營) 상영(上營) 순영(巡營) 영문(營門) 포정사(布政司) 등이 있었다. 따라서 북한지역정보넷에서처럼 '영문거리' 할 때 '영문'은 감영을 드나드는 문을 이르기도 하겠지만 관아 전체 의미가 우선된다. (이미지 출처: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ㅅ) 인천광역시립박물관 분관 송암미술관이 소장한 18C 말에서 19C 초로 추정되는 기성도(평양성도) 8폭 병풍 중 제3~4폭 내성지역의 일부로, 제4폭 대동관 중심의 부분도이다. 종각과 쾌재정 등이 들어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기성도(평양성도)와 함께 가장 오래된 고본이면서도 보존 잘 된 선본이라 한다. 육군본은 물론 ㄹ)~ㅂ)과는 달리 쾌재정 우측 위 장대 언덕 정상엔 육각형 팔작지붕의 장대 누각이 웅장하게 표현돼 있다. 그 위로 서쪽 넓은 공터는 대성학교 운동회 등이 열리기도 해 이재명 의사 역시 자주 갔었다고도 볼 수 있는 평양진위대 연병장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장대와 진위대 연병장 등의 유무 여하로 조선 후기에 평양성 전체 풍광을 담아 그려 만든 수십 점의 통칭 평양성도 병풍 중 가장 이른 18C 말~19C 초의 고본에 선본임을 비정 즉 비교해 추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동북아역사넷 고구려평양성☜/동북아역사넷 멀티미디어☜)

 

ㅇ) 송암미술관과 육군박물관이 소장한 기성도(평양성도)의 대동문과 연광정 중심 부분확대본이다. 연광정 앞마당 한쪽의 청녀못으로 추정되는 연못을 한 번 더 짚어보고자 타 본에 비해 한층 또렷한 위쪽 송암본을 아래쪽 육군본과 비교해 올린다.

 

△청녀못은 기록을 찾지 못해 확실하진 않지만, 일제가 1904년 러일전쟁 개전 당시 전보국 사무실로 연광정을 접수한 직후 메워버렸거나, 혹은 1905~7년 사이 애련당 못을 메워버리면서 함께 메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이재명 의사가 연광정골 살던 무렵엔 청녀못으로 추정되는 저 연못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을지도 모른단 얘기다. (이미지 출처: 동북아역사넷 고구려평양성☜/동북아역사넷 멀티미디어☜)

 

ㅈ) 역시 송암본과 육군본의 애련당 중심 부분확대본을 상하로 비교해봤다.

 

△애련당 왼쪽 위 길모퉁이에 종각이 서 있다. 송암본 애련당에는 여타의 애련당엔 없는 누각과 함께 경내를 드나드는 크고 작은 문까지 사방에 하나씩 나 있다. 누각 앞에는 나무를 걸쳐 다리를 놓았고 그 앞에 '작은 문'을 세워 편액을 달아 '능파'라 했다 한다. 두 글자 '능파' 편액은 왼쪽의 남쪽 대문 바깥쪽 편액일 터이다. 서북쪽에서 누각을 찍은 1900년대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판독은 어려우나 대문 안쪽에도 편액이 있어 네 글자이다(☜). 한편 대소 간에 예나 지금이나 화재는 일상다반사라 할 수 있다. 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 화재현황통계의 2011년 한 해 자료만 봐도 서울 5,526건 경기도 10,019건 등 전국 합계 43,875건이나 된다. 오늘날에 이쯤이니 하물며 조선 시대임에랴. 1542년 평안감사 민제인이 처음 세운 애련당 역시, 여러 종류의 평양성 그림들이 송암본을 필두로 맨 처음 그려지기 시작했던 시기로 추정되는 18C 말~19C 초 이전은 차치하고도, 송암본 이후 시기에 따라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리 적어도 한 번은 (어쩌면 그 이상)  화마를 피할 순 없었을 터이다. 이후 19C 말엽, 1894~5년의 청일전쟁 이전에 재건축됐던 것으로 추정되며 1905~7년 사이 연못이 먼저 없어진 다음 1909년 이후론 누각까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미지 출처: 동북아역사넷 고구려평양성☜/동북아역사넷 멀티미디어☜)

 

ㅊ) 부속건물들의 형태가 다른 대동관도 비교해봤다.

 

△송암본에 비해 육군본의 대동관 부속건물들이 상당히 축소됐고, 특히 상단 우측 쾌재정의 형태가 사뭇 다르다. 송암본엔 위쪽으로 그러니까 서쪽으로 ㄷ자 형인데 육군본은 그냥 밋밋한 일자형이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평양 화재'를 검색해보면 크고 작은 관련 기사가 상당한 가운데 두 가지 기사가 눈에 띈다. 하나는 <조선왕조실록 순조 11년 신미(1811, 가경) 12월 17일(신유) 평양부의 대동관에 화재가 나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성록 순조 4년 갑자(1804, 가경) 3월 25일(갑인) 중희당에서 위유사 이상황(李相璜)을 소견하였다.>이다. 전자는 대동관 특정 기사이긴 하지만 그리 큰 피해는 없어도 관가에서 운영하는 중요한 곳이라 사실만 단 한 줄 적어 둔 듯하고, 후자는 순조가 3월 초의 평양부 초대형 화재로 3월 6일에 파견했던 위유사(慰使/백성을 위로하는 임시 벼슬) 이상황을 불러 보고받는 내용이다. 온 성이 다 잿더미로 변하여 전체 5,000여 호(戶) 중 남은 것이 겨우 1,000호였고, 관아 건물과 창고, 여염집, 시전 등은 모두 사라졌으며, 불은 민가에서 났는데 민가와 화약고가 단지 네댓 집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혹여 불길이 번질까 해서 서윤과 중군이 직접 가서 화약을 거의 다 꺼내어 둘 무렵 갑자기 바람이 불어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이 치솟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장대 언덕 중군청 군기고의 화약고까지 폭발해버렸단 얘기다. 이로 미루어 쾌재정의 원형은 송암본 당시의 ㄷ자형이며, 1804년 화재 후 재건축하면서는 설계가 달라졌고, 따라서 이후론 일자형만 그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지 출처: 동북아역사넷 고구려평양성☜/동북아역사넷 멀티미디어☜)

 

ㅋ) 쾌재정 우측 위 장대 언덕 (즉 장대재) 정상도 비교해봤다.

 


△송암본과 육군본에, ㅅ) 해설에 언급한바 쾌재정 우측 위 장대 언덕 정상 육각형 팔작지붕의 장대 누각이 있고 없고 한다. ㅊ)과 마찬가지, 1804년 화재 후로 그려진 평양도들엔 장대 누각이 보이지 않는다. 세월 따라 용도가 사라진 탓으로도 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동북아역사넷 고구려평양성☜/동북아역사넷 멀티미디어☜)

 

ㅌ) 위 각 항에 언급한 곳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현대의 영상지도이다.

 


△장대재 아래 금색 원은 예전의 종각 대동관 쾌재정 애련당, 그리고 특별히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세운, 이재명 의사의 주요 거점의 하나로 거사를 위해 떠나기 직전 마지막 밤을 보내기도 했었던, 바로 그 태극서관 등이 있었던 곳이다. 장대재 너머 만수대 언덕 아래 갈색 원은 관찰부(감영) 등이 있었던 곳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세운 대성학교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능라도에 연결돼 사라지고 없는 옛 반월도는 이 의사가 (아마도 낚시를 즐기기도 하면서) 동지들에게 국내외 정세를 설파하던 곳 중 하나이며, 이 의사는 기자릉 숲과 칠성문 다락, 그리고 장대재 너머 지금의 학당골분수공원쯤의 진위대 연병장 등에서도 동지들과 자주 만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지금의 능라다리쯤엔 백은탄이 흘렀었고 황색 원은 조천석, 반월도 왼쪽 흰색 원은 장경문터를 가리킨다. (이미지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영상지도☜)

 

#3. 옛 사진과 신문 등으로 보는 종각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시기와 쾌재정 및 기타

 

개화기 무렵의 옛 사진 및 1909년, 1926년, 1927년의 신문 기사 등으로 종각의 원래 위치와 지금의 위치로 옮겨온 시기는 물론 애련당 등의 실제 모습과 기타 지금까지 언급한 여러 가지 관련 내용을 한 번 더 확인한다. (참조: 개화기는 보통 1876년의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1910년의 경술국치까지를 말하고, 구한말은 1897년~1910년까지의 대한제국을 말할 때, 약칭이 '대한 또는 한국'으로 오늘날과 같아서 혼동을 피하고자 채택한 용어이다. 그러나 구한말은 일제가 병탄과 함께 한국을 조선으로 개칭, 대한제국 13년이 '망국 조선의 말기'로 폄훼된다 하여 멸칭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며 대한제국기 또는 구한국시대라고도 한다. 용어에도 다소 주의가 필요하다.)

 

ㄱ) 미주지역 한인 출판사 '소년서회'가 발행한 애련당 사진엽서를 먼저 한번 살펴보자. 서북쪽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대동문이 지척이다. 오른쪽에 선 '기와'는 애련당을 드나드는 대문, 연못 가에서 애련당을 잇는 나무다리 '능파교' 앞에 서 있다.

 


상단에 영어로 'Airiundang, a Pavilion Daidongmoonan, Pingyang, Corea(한국 평양 대동문안 정자 애련당)'라 했고, 그 옆엔 한글로 '애련당 평양 대동문안'이라 했다. 사진은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1906년~1907년 당시 주일 독일대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 중위가 한국을 여행하며 수집한 사진과 똑같다. 원판이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재명 의사가 귀국할 때에도 애련당은 저 모습 그대로였단 얘기다. 엽서를 발행한 소년서회는 이재명 의사가 국내에선 잊혀갈 무렵이던 1944년 대한인국민회기관지 신한민보에 6월~7월 4회에 걸쳐 의사의 사적을 연재던 동해수부 추선 홍언(홍종표, 1880~1951) 선생이 한때 경영하기도 했었다. 생은 문필로 미주지역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케 함으로 문장보국에 온 힘을 다했.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참조: 국립민속박물관 헤르만 산더의 정자☜)

 

<참조: 허봉(許篈, 1551~1588)의 조천기(朝天記). 조천기 상 갑술년 만력(萬曆) 2년 (1574, 선조 7) 5월 25일(무술) 맑음. 아침에 감사가 연광정(練光亭)에서 나를 초대하여 영귀루(詠歸樓)에서 놀기로 약속하였다. 나는 정신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조금 쉬고 뒤에 가기를 청하였더니 감사는 허락하였으므로, 나는 물러나서 애련당(愛蓮堂)으로 돌아왔는데, 애련당은 풍월루(風月樓) 앞의 연못 가운데의 작은 섬에 있었다. 애련당의 터가 옛날에는 더러운 것을 버리는 곳이었는데, 감사 민제인(閔齊仁, 1493~1549)이 보고서 이상하게 여겨 서윤(庶尹) 이원손(李元孫)으로 하여금 불사르고 풀을 베어내고 그 터전을 넓혀 연못을 파게 했다. 사방 넓이는 수백 묘(畝)나 되고 거기에다 조그만 정자를 지었으니, 사치스럽지도 아니하고 누추하지도 아니하였다. 당(堂) 앞에는 나무를 걸쳐서 다리를 놓았고(凌波橋/능파교) 다리 앞에 작은 문을 세워서 편액을 달아 '능파(凌波/파도 걷는다/미인 가볍고 아름다운 걸음걸이 이르는 )'라 하였다. 만약 연꽃이…하략 (출처: 한국고전종합DB☜)>

 

ㄴ) 대동강 변의 연광정(왼쪽)과 대동문을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바라본 1907년 무렵의 사진 속에, 종각으로 착각하기 쉬운 '대동문 안의 애련당'이 창고로 보이는 허연 건물 옆에, '물 마른 연못 속'에 높직이 서 있다. 필자도 처음엔 종각으로 착각했었다. 연광정 드나드는 오른쪽 바로 옆의 대문은 보이지 않는다. 문쯤이야 시절 따라 필요성 유무에 세우기도 할 테고 없애기도 할 터이다.

 


왼쪽에 우뚝한 2층 다락집은 옛 풍월루쯤, 그 뒤쪽으론 사진 촬영 위치 오른쪽에 있을 대동관의 '신관'쯤은 아닐까. 사진 촬영 위치에서 담장 근처까지는 장대 아랫마을, #1.에서 언급한 관후리로 개편되기 전의 당동 또는 하처동일 터이다. 사진은 1906년~1907년 방한했던 주일 독일대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 중위의 사진첩에 실려있으며, 지금의 중구역 대동문동과 종로동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원본확대해서 보면 연광정 건너편 강둑에서 대동강 둔치로 내려오는 허연 비탈길에 둑 너머 마을 동대원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바로 이 사진 속 어딘가에 이재명 의사 본집이 있을 터이다. 청일전쟁 피란 전엔 계부 임씨가 '연광정골'에서 객주업, 이후 통감부문서 등엔 '연광동' 출신 이재명이었으니, 연광정 근처 성내 마을이든 성곽 아래 나루터 마을이든 틀림없이 이 사진 속이다. (이미지 출처:국립민속박물관 민속아카이브☜)

 

ㄷ) 헤르만 산더의 사진과 비슷한 구도에 거의 같은 시기로도 추정되는 사진 속에 촘촘히 서 있는 건물들 사이로 애련당과 종각이 들어있다. 추정일 뿐이지만, 주변 건물들과 대비되는 지붕의 높낮이, 형태, 크기 및 위치 등으로 보아 거의 틀림없다.

 

△흰색 타원 속은 '연못이 사라져버린' 애련당으로, 금색 타원 속은 종각으로 추정된다. 종각 오른쪽 뒤로는 대동관 우측 바깥채일 터이다. 바로 앞에 크막한 집채는 가운데가 쪽문이 달린 대문짝이다. 앞뒤로 바싹 담장으로 경계 지어 창고로도 보이지만, 예전엔 대동관 좌측 바깥채 문간쯤으로 추정된다. 공터에는 말 탄 일본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얀 제복 일본군 둘이 양쪽으로 벌려 서 있고, 가운데 일본군은 야구 글러브를 낀 것처럼 보인다. 약식 야구쯤 하는 건 아닐까. 공터 오른쪽엔 인력거도 보인다. 좌측 바깥채 터로도 보이는 바로 이 공터 뒤 위쪽, 즉 사진 촬영 위치쯤은 곧 안창호 선생이 1897년 독립협회 관서지부가 열었던 만민공동회에서 생애 첫 대중연설을 했던 곳 '쾌재정광장'으로 추정된다. 당시 쾌재정에 올라앉아 19세 나어린 안창호 선생 연설을 들었던 평안감사 조민희는 희대의 매국 역적 이완용의 처남으로, 또한 1910년의 경술국적 여덟 명 중 한 명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시기 대동관은 '공보시설'로 바뀌게 된다. (이미지 출처: 원본☜/참조: 5회 참고☜)

 

<추고: #2.ㅈ) 송암본을 보면 대동관 좌측 바깥채 앞에 '大同驛(대동역)'이라 쓰여있다. 하여, 위 바깥채 공터 등은 예전엔 각 지방에 공문을 급히 전달하던 파발꾼의 숙식을 제공하거나 파발마를 교체해주기도 하던 역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ㄹ) 청일전쟁(1894~1895)에서 가장 격렬했던 평양전투(1894.09.12~15)가 종료된 직후로 추정되는 대동문 앞 거리 전경이다. 당시 가장 번화했던 곳으로, 대동문 1층 다락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며, 종각 쾌재정 애련당 등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된다.

 

△흰색 타원 속 종각, 금색 타원 속 쾌재정, 갈색 타원 속 애련당이 확인된다. 종각 오른쪽 바로 위는 대동관 입구의 누문, 그 뒤는 솟을지붕 형태로 건물 셋이 이어진 대동관 본채이다. 종각 왼쪽 위는 대동관 우측 바깥채일 터이다. 그 왼쪽으로 조금 비켜 길이 위로 계속돼 '종각이 있어 종로 거리'는 네거리가 된다. 애련당의 대문은 왼쪽의 작은 수풀 속에 숨어있다. 수풀 위쪽은 ㄷ)에 언급한 좌측 바깥채쯤으로도 보이고, 종각 왼쪽 위로 대동관 남쪽 길 건너편엔 '청화관'이 있을 터이다. 사진상 스카이라인 쾌재정 오른쪽은 융흥면 장대 아랫마을 하처동 등으로 추정되니, 이후 1914년 무렵부터 대동관 청화관 신관 등의 객사 뒤쪽에 있다 하여 관후리로 바뀌게 된다. 한편 조석으로 종을 울려 동서남북의 성문을 개폐하고 각종 재난이 발생하면 난타하여 경종을 울려왔던 평양종은 갑오년부터, 곧 청일전쟁 초기 평양전투 피란 경종을 마지막으로 '종로 길가 한 모퉁이 초췌한 종각 안에서 덧없는 침묵'을 지켜왔다. (이미지 출처: 한국 근대사 숨은 풍경들-평안·황해도 ②평양 1894/한겨레☜)

 

ㅁ)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선교사가 1898년에 찍은 사진 속에서도 희미하긴 하지만 종각과 쾌재정 및 지금의 종각 또는 연광정 대문으로 착각하기 쉬운 애련당 등이 확인된다. 오른쪽 끝머리 장대 언덕 정상 부근엔 1898년에 착공하여 1900년에 완공한 고딕식의 '성미카엘성당 평양교회(1896~1950/1934년 관후리교회 개칭)'가 이제 막 터를 잡아 기초를 다지고 있을 테고, 그 왼쪽으로 연광정 바로 위 능선쯤엔 ㄱ자형 '장대현교회(1893~1950/대한예수교장로회)'가 2년 뒤인 1900년에 착공하여 1903년에 완공하게 된다. 평양도 등의 옛 그림에도 보이는, 유사시 대동문 방어를 위한 옹성 및 허연 성가퀴와 성벽, 나루터 마을 등이 아직은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은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의 사진첩(1885~1900)에 들어있다(사진 아래 영문 메모: Ping-yang from the East, 1898./동쪽에서 바라본 평양, 1898.). ㄴ)에 언급한 동대원 마을 근처 둑 위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원본을 확대해서 보면 대동문과 연광정 사이로 대동관 일대가 한눈에 훤하다. 흰색 화살표는 종각, 금색 화살표는 쾌재정, 연광정 왼쪽은 애련당, 그 왼쪽은 대동관 누문이다. 애련당은 지금의 종각 또는 연광정 대문처럼 보인다. 연광정 대문은 청일전쟁(1894~1895) 초기 청국군이 연광정을 본영으로 사용하며 없앤 것으로, 이후 러일전쟁(1904~1905) 직전 일제가 접수한 평양 전보국 사무실로 사용하며 다시 세운 것으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곽을 개축하며 또다시 없앤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나루터가 넷이다. 남쪽으로 왼쪽 끝은 옹기류 전문 나루터, 대동문 앞은 대동문 나루터, 연광정 왼쪽은 연광정 나루터, 오른쪽 끝은 덕바위 덕암소 옆 '덕암 나루터' 등이다. 둔치 왼쪽으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루터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강물 위엔 나룻배 사공 노를 저어 이쪽으로 바삐 다가오고 있다. 이곳저곳 줄에 널린 하얀 빨래들에 나루터 근처 빨래터, 연광정 아래 오솔길 등등 모두 선명하다. 대동관 입구 누문과 함께 옛 풍월루로 추정되는 2층 다락집은 확인되지 않지만, 그 뒤 위쪽 어딘가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 ㄴ)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연광정 근처 성내 마을이든 성곽 아래 나루터 마을이든 틀림없이 이 사진 속 어딘가에 이재명 의사 본집이 있을 터이다. (이미지 출처: 한국기독교회사▷자유게시판 52번▷아펜젤러 선교사의 사진 14☜)

 

ㅂ) 바로 위의 ㅁ)의 사진은 이재명 의사 가족이 청일전쟁의 평양전투로 피란 갔던 북청에서 돌아온 이듬해의 것이고, 그 위의 ㄹ)의 사진은 ㅁ)에 앞선 피란을 떠난 직후의 것이며, 나머지 ㄱ)~ㄷ)과 바로 이 사진은 1907년 이재명 의사가 미국에서 돌아올 무렵의 것으로, ㄱ)~ㄷ)에 언급한 헤르만 산더가 자신의 딸에게 1907년 3월 28일에 보낸 엽서이다. ㄹ)의 사진과 거의 같은 구도로 애련당 쪽만 찍히지 않았고 종각 대동관 쾌재정 등이 확인된다. 새로운 건물들로 주변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하단에 '평양대동문통' 등이 인쇄돼있고 '28. 3. 07.' 등이 쓰여있다. 종각의 원래 위치 등을 찾아 헤매다가 이 엽서를 발견하고 필자는 무릎을 쳤다. 이재명 의사가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도 했었던, 주요 거점의 하나인 태극서관으로 추정되는 2층 한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통쾌함마저 느끼게 되었다. 안창호 선생 영향으로 오산학교 등에 이어 태극서관을 세운 남강 이승훈은 태극서관이 종로의 큰길가에 있다고 했다. 1층 서점엔 곁방 하나가 딸려있고, 2층 큰방에선 대성학교 방학식이 열리기도 했으며, 이재명 의사의 '청년권장회 규합'을 위한 회의가 열렸을 땐 누군가는 입구에서 누군가는 계단에서 망을 보기도 했었다고 한다. 필자는 왼쪽과 오른쪽 양쪽에 우뚝한 두 곳 기와지붕 2층 한옥 중 사진상 지붕이 오려진 왼쪽 기와지붕에 무게를 둔다. (이미지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헤르만 산더의 우편엽서☜)

 

ㅅ) 이 사진 또한 헤르만 산더 중위가 한국을 여행하며 수집한 것이라 한다. 대동문 안쪽 모습으로 2층 편액은 읍호루, 1층 편액은 대동문이다. 애련당이 보이는 ㄹ)의 사진은 1층 다락의 오른쪽, 애련당이 보이지 않는 바로 위 ㅂ)의 사진은 왼쪽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헤르만 산더가 한국을 여행하며 직접 찍었거나 수집한 것이라면, 특히 평양성 일대의 것이라면 아펜젤러 등의 사진들과 더불어 이재명 의사와 동지들이 일상적으로 보고 느끼고 지나고 이용했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일 터이다.

 

△일제에 의한 강제개발이 이제 막 시작된 1905~7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바깥쪽에 있을 옹성이 사라져 둥그런 홍예 사이로 동대원 근처 건너편 강둑이 희미하게 살짝 얼굴을 내비친다. 여기서 하나, 대동문을 들어서면 대동문 앞길이 똑바로 뻗어가지 않고 사진상 왼쪽으로, 즉 서북쪽으로 적어도 30도가량은 틀어져서 뻗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알고서야 필자는 ㅁ)의 사진을 제대로 파악, 종각 등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었다. ㅁ)의 사진을 다시 보자. 조선 시대, 대동문을 지나고 대동관을 거쳐 서북쪽으로 장대 언덕을 중턱쯤 오르면 재 너머로 저만큼 중군청을 곧 만나게 되고, 중군청을 지나면 만수대 언덕 어딘가에 있을 관찰부 즉 감영을 또 곧 만나게 된다. 한편 이재명 의사가 귀국할 즈음엔 관찰부동 감영 근처 어느 골짜기 언덕에 대성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이미지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헤르만산더의 대동문☜)

 

ㅇ) 1904년 호주 사진가 조지 로스(1861~1942)가 러일전쟁 취재차 방한하여 찍은 연광정 사진 속에 '연광정 바로 왼쪽 성곽에 바싹 붙은 작은 지붕'의 연광정 대문이 들어있다. ㅁ)의 아펜젤러 1898년 사진 속에선 볼 수 없었다. 청일전쟁 초기에 없앴다가 러일전쟁 직전 평양 전보국 사무실로 사용하며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위 ㅅ)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이 사진 또한 여러 가지 의문을 순식간에 풀어주었다. 북한지역정보넷을 비롯한 뭇 기록들에도 신빙성을 더하게 되었다. 열어둔 대문 사이로 저만큼 아래 좀 낮은 곳에 함께 찍힌 기와지붕 한옥은, 연광정 처음엔 지대가 좀 높은 곳, 덕바위 위에 돌로 쌓아 만든 장대(將臺)였다고 하는 기록 등을 떠올리게도 한다. '황포돛배'가 돛과 닻을 내리고 무언가 짐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그 위쪽 조그만 나룻배가 인상적이다. 집채만 한 나뭇더미 너머 덕바위 위엔 장정 두엇이 구경을 나왔다. 나뭇더미 바싹 옆으로 부교 위에 서 있는 한 사람은 팔짱을 끼고 있다. 빨래터엔 아낙네가 둘, 그 뒤쪽에도 한 사람 가고 있다. 움막 앞 소로에 쪼그려 앉은 사람은 이쪽을 바라본다. 혹시 성벽에 사다리쯤이라도 걸쳐져 있는지 벙거지에 가방을 걸친 조지 로스의 일본인 조수가 무너진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댕기 머리 맨발 소년은 강변 내려가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는 듯하다. 당시의 누란지세 우리나라 형국을 잊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정겨워 보인다. 10년 전의 청일전쟁 평양전투로 피폐하게 된 평양을 두고 조지 로스는 건물과 성벽, 주민들을 비롯한 이곳의 모든 것이 예전엔 더욱 영화를 누렸을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편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전략적 이유로 우리의 모든 전보 체계를 일제가 접수해 운용했다. 연광정도 그중 하나이며, 전보국 사무실로 사용해서인지 유리창이 달려있고 출입문도 유리다. 이후, 성벽 밖으로 새롭게 석축을 쌓으며 움막 등과 함께 또다시 대문은 사라지게 된다. (이미지 출처: 호주 사진가가 본 대동강 변의 모습 원본☜)

 

ㅈ) 애련당은 이재명 의사가 '무슨' 일로 잠시 몸을 피해 해삼위를 한 번 더 가려다 길이 막혀 못 간 그때, 아마도 태극서관에 숨어있으면서 청년권장회 동지 추가규합 일로 분주하던 그때, 1909년 여름 일제에 의하여 훼철돼 사라졌다. '사치스럽지도 아니하고 누추하지도 아니하였다'던 애련당이었다. 일제는 1905년부터 탐을 내고 있었다.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05년 6월 일본군사령부에 군비를 헌납했던 평양관찰서리 겸 평양군수 이승재가 동년 7월 오랫동안 수리하지 못해 보기에 심히 황량한 대동문 등을 급히 좀 수리하고, 애련당 연못에 물이 썩어 위생에도 문제가 있으니 못을 메우고 민가를 짓게 하여 세금을 걷자고 일본군사령부에 여러 번 강청하고 내부에도 보고한다. 수로를 손보고 연못 바닥을 파내면 될 일이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움직인 평양군수 이승재는 동년 11월 법부 협판 이상설이 의정부 참찬에 임명될 때, 같은 날 궁내부 특임관으로 임명돼 옮겨간다. 이후 일제는 형식상 제일은행 빚돈 즉 자신들의 돈으로 애련당 둘레 연못을 메웠고, ㄴ)과 ㄷ)의 사진에서와같이 한국인의 민가라기보다는 일본인 거류민의 창고로 추정되는 일본풍의 허연 건물들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는 빚을 갚지 않는다는 핑계로 1909년 7월 못을 메운 택지의 소유권을 은행 측이 몰수하며 애련당 누각까지 뜯어가 버린다. 제일은행장 삽택영일 즉 시부사와에이치의 저택 후원에 애련당을 옮겨가려고 꾸민 흉계였다.

 

△신한민보 1909년 9월 7일 자 2면 5단∥◎분만 내면 쓸 데 있나 제일은행 두취(頭取) 삽택영일(澁澤榮一)이가 저의 집 뒤에 정자를 건축하려고 평양 애련당을 훼철하여 일토일목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도적하여 갔다는데 기백년래 승지로 유명하던 애련당을 일개 영일의 정자를 구조하기 위하여 훼철하였다고 해지 인심이 극히 분울하다더라.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삽택영일(澁澤榮一) 즉 시부사와에이치는 일본에 자본주의 체제를 처음 도입한 인물이며, 이토히로부미와도 친한 사이로 1904년부터 한국의 철도 전기 항만 등을 흉계로 장악, 병탄 전부터 이미 한국 침탈에 앞장선 일대 원흉이다. 두취(頭取)는 단체 조직 부서 등의 가장 윗사람의 뜻으로, 은행장(銀行長)의 예전 말이다.

 

ㅊ) 동아일보 1926년 9월 13일 자 명승고적 순회탐방 74회 4천 년 구도 평양의 위관 7회에 실린 연광정 모습이다(왼쪽 아래). 대문은 물론 성가퀴와 성벽, 그 아래 움막 등이 세월 따라 풍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석축을 새로 쌓아 터를 넓히고 공원을 조성했다. 대동문공원이다. 종각이 아직은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지 않았다.

 

동아일보 1926년 9월 13일 자 4면 1~7단의 탐방 기사 본문에 함께 실린 3~7단의 사진 넉 장이다. 왼쪽 위는 모란봉에서 바라본 벽루, 왼쪽 아래는 종각이 아직은 지금의 위치로 옮겨오지 않은 연광정, 오른쪽 위는 칠성문, 오른쪽 아래는 모란봉 바로 아래 영명사 일대이다.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ㅋ) 경주 봉덕사의 고종과 더불어 에밀레의 전설이 깃들어 있기도 한 평양종, 경술국치 후 냄새 풍기는 공동변소가 그 옆을 막고 지저분한 간판이 그 모양을 가렸던 유서 깊은 평양종각은 '남의 손'에 이끌려 대동문공원 내 연광정 옆 지금의 위치로 1927년 2월 옮겨가게 된다. 일제는 일단 2월 말에 종부터 옮겼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그 공사를 급히 하여' 6월 24일 준공을 기념하는 시당식(타종식)을 열었다.

 

△매일신보 1927년 6월 26일 자 6면 4단∥역사 깊은 평양종각 공원으로 이전 【평양】 평양종각은 기보와 여히 대동문공원 내로 이전하였으므로 24일 오후 1시부터 부내 다수 관민을 초대하여 송정(마쓰이) 부윤이 시당식을 거행하였는데 차 대종은 거금 200여 년 전에 당시의 감사 윤헌주 씨가 도내 인민에게서 다수한 동 급(및) 소종을 수집하여 부벽루 서정에서 주조한 것인데 당초 대동문 상에 있어서 평양성벽 동서남북의 성문을 조석으로 개폐할 시에 주간에는 33회 야간에는 28회를 명종하여 일제히 개폐케 하였고 기타 화재 수재 도난 등이 내습할 때에 대종을 난타하여 일반에게 경고한 것이라더라. (이미지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고신문서비스☜)

 

ㅌ) 종각과 연광정의 모습이다. 용도가 사라진 종각이 자리까지 빼앗기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제는 우두커니 유물로만 남아있어 애처롭기까지 하다. 종각만 제외하면 나무들을 비롯한 주변 풍광이 ㅊ)의 1926년 모습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ㅊ) ㅋ)에 비추어 아무리 빨라도 1927년 6월 중순 모습인 이 사진을 두고 구한말 평양풍경이라고들 한다. 구한말이 아닌 일제강점기로 주의가 필요하다. 평양종의 종각을 얘기하여 '지금의 종각은 1827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하는 기록에도 주의가 필요하다. 옮겨진 이후의 지금의 종각이 아니라 ㄷ)~ㅂ)으로 확인되는 원래 위치의 지금의 종각일 터이다. 부연하면 세계 최초의 실용적 사진기는 1685년 독일에서 개발은 됐으나 세상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건 1839~41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은 1863년(☜) 청나라에 파견된 연행사 이의익 일행이 찍은 것이 최초이니만큼 1827년에도 종각이 오늘날의 위치일 순 없다(☜). (이미지 출처: 원본☜)

 

#4. 옛 문헌으로 보는 쾌재정의 위치와 명칭의 유래

 

쾌재정의 존재를 우리는 보통 안창호의 행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널리 알려진바 선생의 나이 만 19세 무렵 1897년에 행한 '쾌재정 연설'을 통해서다. 쾌재정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 하고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쾌재정'이라 했을까. 바로 여기에 쾌재정의 내력과 함께 성격을, 그리고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다.

 

쾌재란 어떤 일이 마음먹은 대로 잘되어 외치는 '통쾌한 외침'을 말한다. 안창호는 쾌재정 대광장 남녀노소 만장을 향하여 '쾌재정 쾌재정 하기에 무엇이 쾌인가 하였더니 오늘 이 자리야말로 쾌재를 부를 자리올시다.' 하면서, 황제 폐하의 탄신일에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군민동락(君民同樂)의 날이라 쾌재고, 감사 이하 높은 관원들이 같이 하였으니 관민동락(官民同樂)이라 또한 쾌재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한데 모였으니 만민동락(萬民同樂)이라 더욱 쾌재라, 이것이 쾌재정의 3쾌라 했다.

 

동아일보 1932년 6월 9일 자 2면 6단과 신한민보 1932년 7월 7일 자 3면 2단에 실린 안창호의 약력기사를 보면 '지금 종로 공보터 안에 있는 쾌재정' 했고, 동년 신동아 7월호는 '지금 종로 공보구 내에 있던 쾌재정' 했다(5회 참고2 참조). 1932년 당시의 시점에서 '지금'은 공보터 또는 공보구이지만, 그 '이전'엔 아니었단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쾌재정이 있는(있던) '지금' 종로 공보터(공보구)는, 과연 '이전'엔 무엇을 하던 데였을까. 다음의 조선 시대 문헌 자료 셋에 그 답이 나와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쾌재정 검색으로 도서(3)▷한국사료총서3▷2번▷<2 輿地圖書 上 平安道 平壤 樓亭>을 보면 다음 내용이 있다.

 

<…快哉亭在大同館內…(…쾌재정은 대동관 내에 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쾌재정 검색으로 편년자료(20)▷승정원일기14▷11번▷<11 제목없음 1833-08-06 순조 33년 8월 6일>을 보면 다음 내용이 있다.

 

<…大同館內快哉亭…(…대동관 내 쾌재정에…)☜>

 

한국고전종합DB에서 쾌재정 검색으로 일성록 3건▷1번▷<1 정조 10년(1786) 8월 23일(계해) 원접사 김화진(金華鎭), 평안감사 조준(趙㻐), 문안사 김재찬…>을 보면 다음 내용이 있다. 관소는 당시 관가에서 마련하여 '외국에서 온 사신을 묵게 하던 숙소'를 이르던 말이었으며, 관소 내의 '동북쪽'은 서북쪽의 오류이다.

 

<…1. 쾌재정(快哉亭)이 관소 (대동관) 내의 동북쪽(서북쪽) 모퉁이 10여 걸음 되는 지역에 있어, 전후의 (청나라) 칙사들이 올라가 구경하는 전례가 많았습니다.…☜>

 

쾌재정이 있던 곳은 대동관, '지금'은 공보터 또는 공보구이지만 '이전'엔 정자까지 있어 상당히 호화로운, 종로에 있던 객사 겸 관소였다.

 

그러니까 당시 객사이자 관소 대동관에 묵던 다른 지방 관원들이 숙소 내의 정자에 올라앉아 볼일을 잘 마친 데 대해 술잔을 나누며 쾌재를 부르고, 청나라 사신들이 하루 이틀 머물며 정자에 올라앉아 수려한 경관에 거한 접대에 쾌재를 부르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럭저럭 명칭도 쾌재정일 터이다. 이후 어느 시기 별채 하나쯤 헐린 터에 '대광장'이 들어서게 되고, 본채 또한 '공보시설'로 바뀌게 되고 했을 터이다.

 

하여, 쾌재정은 대동관 내에 있어 그 앞에 '새로 지은' 종각과 함께 지금의 중구역 종로동 영역, #1.에서 얘기한 '평양학생소년궁전' 부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KBS 역사스페셜 한민족 특별기획-고구려 평양성(KBS Documentary 유튜브)☜>

 

2012.11.30(금)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