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20]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20회)
△왼쪽-연광정은 고구려가 6C 중엽 평양성을 세우면서 처음 세웠고, 1111년 다시 세울 때는 산수정으로 이름을 했었다. 사진은 1931년에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고적도보 11(朝鮮古蹟圖譜 十一)에 실려있다. 1920년대에 공원을 조성하며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오른쪽-흔히들 오인하여 연광정으로,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남문 전금문 옆에서 바라본 부벽루 모습이다. 누가 찍었을까. 어느 이른 봄날, 앞서가는 사내는 검누른 패랭이에 괴나리봇짐 둘러멨고, 땋은 머리 검정 치마 처녀 둘이서 그 뒤를 따라간다. 키 큰 처녀는 가방을 팔에 걸쳤다. 어디로 가고들 있는가. 연광정골 살던 이재명 의사 또한, 저기 저 길 따라 걸어 다녔으리라. (이미지 출처 왼쪽: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북한의 문화재☜/오른쪽: 원본☜)
△왼쪽-일제강점기 연광정 사진엽서로 남쪽 빨래터와 북쪽 덕암소 위 나루터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이미지 뷰어 46쪽☜) 오른쪽-일제강점기 전금문과 부벽루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한국의 사라진 대표 다리 (1) 고구려 대동강 대목교 (평양)☜/참조-북한 평양성 연광정☜)
아버지와 동생
재명이 동구 밖에 도착할 무렵엔 어느새 땅거미가 스멀거리고 있었다. 저기 저만치 뉘 집 울타리 너머 벌거벗어 앙상한 살구나무 한 그루가 희뜩희뜩한 눈발 사이로 을씨년스럽게 다가선다. 바람까지 맵짜게 몰아쳐 굵어진 눈발이 한층 더 사납다.
"야, 야, 재호야! 네 형이다!"
돌쩌귀가 헐거워 덜컹 삐거덕하는 대문 여는 소리에 밥 먹다 말고 내다보던 임씨가 댓바람에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치며 뛰쳐나왔다. 거짓말처럼 큰아들이 들어온다.
"딱 보니까 너다. 아이고, 재명아…"
"예, 아버지, 들어가십시다…"
느닷없는 아버지의 외침에 깜짝 놀란 재호는 영문도 모르고 숟가락을 쥔 채 후다닥 튀어나와 흙마루에 내려섰다. 그리고는 금방 제 형을 알아보고 발을 동동 구른다.
"형님…형님…"
"그래, 형이다. 우리 재호가 그새 많이 컸구나…"
재명이 큰절로 문안을 올리고 엉덩이를 미처 자리에 앉히기도 전에, 계부 임씨는 얼른 일어나 다시 부엌으로 나갔다. 우리 큰아들 몇 년 만인가. 군불을 지피고 밥을 새로 했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세 식구가 오붓하다. 김치 한 가지에 된장국뿐으로 밥상은 영 옹색하지만 그야말로 진수성찬, 심지를 한껏 돋운 남폿불도 춤을 춘다.
밥을 다 먹고 상을 치운 다음, 화롯가에 세 식구가 다시 둘러앉았다. 재명은 윗목에 벗어둔 외투를 끌어당겨 봉투 두 개를 꺼내어 하나는 아버지께 드리고 또 하나는 재호한테 주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혹시라도 모를 일, 그저 돈 봉투만 준비해서 따로 챙겨 뒀었다. 아버지 봉투엔 살림비용을 담았고 재호 봉투엔 용돈을 담았다.
"아이고, 30원…이렇게나 큰돈을…고맙다…내가 너한테…면목이 없다…"
"저는 괜찮은데…형님, 고맙습니다…"
다행이다. 아버지와 재호가 무사하다. 겨우 자리 잡고 써 보낸 편지들에 아버지는 답장이 없었다. 별의별 생각에 너무 심란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 애써 그리 간주했었고 임무를 띠고서야 귀국한 터였다. 듣고 보니 아뿔싸, 영서로 된 주소 쓸 줄을 몰라서 답장을 못 했다고 너를 볼 면목이 참 없다고 하시면서 거듭 미안해하신다.
"아버지…죄송해요…제 불찰입니다. 아예 답장 봉투를 미리 적어서 함께 부쳤어야 했는데 그리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여태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아니다…그려서라도 보냈어야 했는데…내가 미안하지…"
그렇게 시작된 세 식구의 이야기는 밤이 이슥토록 도란도란, 끝없이 계속됐다.
아버지는 재명의 어릴 적 소소한 일들을 꽤 여럿 기억하고 계셨다. 천자문 한 자를 가르쳐 주면 두 자를 가르쳐 달라, 두 자를 가르쳐 주면 넉 자를 가르쳐 달라, 정말이지 무척 총명했다고 하신다. 아버지가 누구랑 말다툼이라도 할작시면 재명이가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서 왜 우리 아버지하고 싸우느냐고 대들어 싸는 통에 좀처럼 누구하고 시비도 못 해봤다는 대목에선 아버지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재호도 외탁인가 보다. 커갈수록 나를 똑 닮아간다. 지금 일신학교 1학년, 공부도 웬만큼은 잘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또 재호 자랑에 여념이 없다. 내가 없어도 식구들은 괜찮겠다. 안심이다. 아니, 아니지. 그게 아니지. 나라가 망하는데 괜찮으면 어떻고 안 괜찮으면 또 어쩔 텐가. 아니야, 그래도…아버지, 죄송합니다…서울이나 인천 어디…장사나 해볼까 귀국한…아닙니다…으흠…호야…너는…앞으로…
"명아…자냐?…형이 되게 피곤했나 보다…우리도 인제 자자…"
△왼쪽-연광정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고구려 평양성의 내성 동쪽 장대(將臺)였던 연광정은 여러 차례 중수 중창 새로 지었으며, 한국전쟁 때도 폭격으로 파손됐다가 원상 복구되었다. 1573년 이래로 ㄱ자형 모습이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오른쪽-부벽루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오른쪽 위엔 내성지역의 을밀대도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부벽루가 있는 곳은 내성에 있던 왕궁을 보호하는 북성지역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참조: 평화문제~북한지역정보넷☜)
△왼쪽 연광정과 오른쪽 부벽루, 앞마당 한쪽에서 북동쪽으로 찍은 오늘날의 모습이다. 수양버들이 아름다운 평양, 고려 시기 한때 평양성은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아름다운 버드나무 서울, 즉 유경(柳京)으로도 이름을 했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연광정☜/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부벽루☜)
그리고 함동철과 함마리아와 오인성
날이 희번하다. 재호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아버지는 부엌에 계신다. 마당에는 눈이 제법 쌓였다. 어제완 달리 하늘도 쾌청하여 겨울답지 않게 푸근한 아침이다.
"피곤할 텐데 더 자지 원, 벌써 일어나…"
"잘 주무셨습니까. 깜빡 졸았는데 금세 아침이네요. 어, 이거 무슨 냄샙니까."
아버지는 새벽같이 일어나 푸줏간을 다녀왔다.
"돼지고기 좀 떠왔다. 너무 일찍 왔다고 투덜대던 김씨가 글쎄, 우리 큰아들 미국 갔다가 어제 왔다고 하니까, 한 근만 달랬는데 반 근이나 더 썰어버린다? 흐흐흐…"
"예에…고맙습니다…마당에 눈은 제가 치울게요…"
재명이 눈을 쓰는 동안 재호가 일어났고 아버지는 상을 차렸다.
"아버지, 호야 학교 갈 때 저도 같이 나갔다가 오후 서너 시쯤 올게요. 짐도 좀 찾고 함동철 씨라고 만나 볼 사람이 있어서요…혹시 늦더라도 많이 늦진 않을 겁니다…"
(계속)
참고:
이재명 의사가 살았던 아청리와 연광정골, 그리고 종각과 쾌재정에 관하여
태어난 곳이야 평북 선천이지만 성장기를 보내면서 고향이었을 이 의사가 살았던 평양성을 한번 더듬어 보았다. 대성산(270m)을 저만치 머리에 두고 그리 높지 않은 금수산(95m, 모란봉)으로부터 시작, 완만한 구릉들에 골짜기들이 이어지다 평야가 펼쳐지고 보통강과 대동강이 '해자로 감싸는' 고구려의 평양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옛적 고구려는 말할 것도 없고 100여 년 전의 구한국, 그 시절부터만 따져봐도 오랜 세월 한 세기 풍상에 당시 세부적인 모습은 물론 아주 딴판으로 달라져 알아보기 어렵겠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평양성은 지금의 중구역 평천구역 일대와 거의 일치한다. 아청리는 고구려 시절의 중성지역, 연광정골과 쾌재정은 내성지역에 있었다.
먼저 평양성 배치도와 중구역 지도를 살펴본 다음 아청리와 연광정골 개요와 함께 평양종을 걸어둔 종각의 원래 위치를 관련 이미지를 통해 알아봄으로써 쾌재정의 정확한 위치까지 추적해 본다. 쾌재정은 종로 공보터 안에 있었다(5회 참고2 참조).
▣고구려가 세운 평양성 배치도
△고구려 평양성, 둘레만 16km에 네 겹 각 구획 총 길이 23km로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중국 장안성 16km). 성 안엔 약 20만 명이 살았고, 주변 지역까지 합치면 약 50만 명이 살았다. 고구려 평원왕 8년(서기 552년) 축성을 시작(삼국사기, 당시 명칭은 장안성), 42년 걸려 완공했다(평양속지). 긴 자루처럼 생긴 평양은 전체를 성으로 둘렀으며, 성 안은 4구획으로 나누어 왕궁이 들어선 내성(內城)을 중심으로 그 위아래에 왕궁을 보호하는 북성(北城), 관청이 들어선 중성(中城), 그리고 일반 서민이 사는 외성(外城)을 두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참조: 내성의 북문 칠성문을 들어서면 장경문 근처에서 시작되는 만수대 언덕을 만나게 되고, 만수대 남쪽 끝자락에서 연광정 근처까지 장대재가 이어진다. 만수대 남서쪽, 장대재 언덕 서쪽으로 산등재가 밋밋하게 뻗어 있으며, 산등재의 서쪽으로 평양진위대 연병장이 있는 훈련재가 이어진다. 만수대 언덕 남서쪽 끝자락 산등재 훈련재 어름에 평양 감영이 있던 영문거리 마을 관찰부동이 있겠고, 또한 영문거리 남쪽으로, 연광정 대동문 남서쪽으로 중성지역에 저만큼, 지금의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광장이 있는 남산재 언덕이 우뚝할 터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지도는 별도의 방위 표시가 없어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제작, 방위 혼선이 거의 없으나 평양도 등의 일부 옛 지도는 그렇지 않다. 실제의 남쪽 영제교를 지나 동대원 쪽에서, 동쪽에서 대동강을 건너 대동문을 들어서게 되는데 실제의 동쪽을 밑으로 즉 남쪽으로 그려서인지, 옛 문헌엔 실제의 서북쪽을 동북쪽으로 기록하는 등의 오류가 더러 있다. 한 장의 지도에 모든 걸 표시할 수 없어 별도로 정리했다.>
평양은 평평한 땅, 벌판 등의 뜻을 지닌 우리 고유의 말 '부루나'를 한자로 적어서 유래한 지명이다. 이를 달리 적어서 평천, 평나가 되기도 한다. 고조선(단군조선) 시기의 '평양' 또는 '평양성'은 도성을 의미, '왕검성'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였다.
고구려 장수왕 때의 '평양성'은 도성으로 천도한 안학궁 및 대성산성이었고, 이후 평원왕 때의 '평양성'은 도성으로 새로 세운 '장안성'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 후 장안성의 명칭은 서경 유경 등으로 개칭을 거듭, 평양성~평양으로 오늘에 이른다.
▣평양시 중구역 지도
△예전에, 경림동과 대동문동 영역은 지대가 높아서 평양성 동쪽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동표동(東漂洞)이라 하였고, 인접하여 창고가 있던 마을은 창동(倉洞)이라 하였다. 나중에 동표동은 경림동으로, 창동은 경상동으로 흡수됐다가 지금은 대동문동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가] 아청리와 연광정골
#1. 아청리는 지금의 중구역 경림동 영역
대동문(大同門)과 연광정(練光亭)이 있는 평양 19구역의 하나인 중구역, 광복 당시 중구역 안에는 아청동 수옥동 관후동 등 51동이 있었고, 지금은 종로동 대동문동 경림동 등 21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청동 또는 아청리(衙廳里)는 지금의 경림동 영역으로, 김일성광장(중성동) 남쪽 종합청사 부근에 있던 폐리이며,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평양부 융덕면의 관아가 있던 아동(衙洞)과 향청이 있던 향청동(鄕廳洞)을 병합하여 신설했던 리로서, 아동의 '아'와 향청동의 '청'을 따서 아청리라고 하였으며, 광복 후 1946년 평양특별시 중구 경림리로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2. 연광정골은 지금의 중구역 대동문동 영역
이재명 의사 세 살 무렵 1889년경 모자가 평북 선천에서 이주해온 곳은 평남 평양 아청리(아동 또는 향청동), 지금의 중구역 경림동 영역이었다. 이후 어머니 양씨는 연광정골(또는 연광동)에서 객주업 하는 임옥여에게 중매로 재가했다. 연광정골은 연광정이 있는 골짜기 또는 그 마을, 지금의 중구역 대동문동 영역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가까운 마을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대동문동은 1965년 경상동 경림동 등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신설한 동이다. 경상동에 흡수됐던 옛 창동 지역, 경림동에 흡수됐던 옛 동표동 지역 등이 포함됐고 대동문이 있는 동이라 하여 대동문동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재명 검색으로 통감부문서 14번 보고서를 보면 <平安南道 平壤 鍊光洞/당시 京城 南部 笠井 45통 6/尹容主 白 召史의 집에 거주/평민 무직 長老敎徒 李在明 24세>, 연광동이 언급돼 있다. 하지만 연광동의 행정구역상 정식명칭은 확인되지 않는다.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당시 '연광동'은 그저 단순히 연광정이 있는 마을 연광정골 의미에 더해, 실제 있었던 창동이나 동표동 일부를 일시 연광동으로 부르다가, 이후에 대동문동을 신설하며 사라진 '별칭'은 아닐까 하고 한번 생각해 본다.
#3. 연광정(練光亭)은 군사훈련장(軍師訓練場)의 장대(將臺)터
△북한 화가 김용록(1965~)의 '연광정의 달밤'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
고구려는 평양성의 내성(內城) 동쪽 덕바위(턱바위/너럭바위) 부근에 군사훈련장(軍師訓練場)을 설치했고, 이 덕바위를 장대(將臺)로 하였다. 장대는 장수(將帥)가 군사를 지휘할 때 올라설 수 있도록 좀 높은 곳에 돌로 쌓아 만든 대(臺)를 말한다.
덕(턱)에는 발판 모양의 대(臺), 높은 지대의 평평한 땅 등의 뜻이 있으며 음차하여 德으로 적기도 하는데, 이 덕바위엔 장마철 큰물을 막아주는 은덕의 바위라 하여 德岩을 새겨놓았다고도 한다. 바로 이 덕바위 장대 위에 연광정(練光亭)을 세웠다.
연광정은 관서팔경의 하나로, 주변 풍광(風光)이 매우 아름다워 천하제일루 만화루 등으로도 불렸다. 그만큼 산수(山水)가 썩 빼어난 곳이다. 그리하여 옛적엔 산수정(山水亭) 덕광정(德光亭) 등으로도 이름을 했었고, 1670년 이래 다시 연광정이다.
△소산 박대성(1945~)의 '연광정'이다. 연광정에서 종각과 대동문을 함께 바라본 설경으로, 한지에 그린 수묵담채화 1997년 작이다. (이미지 출처: 원본☜)
[나] 종각과 쾌재정
#1. 평양종이 걸려있는 종각의 원래 위치
대동문과 종각, 연광정을 아울러 부감으로 담아낸 오늘날의 모습으로 종각의 현재 위치를 먼저 한번 살펴보자. 뒤쪽으론 저만큼 옥류교도 보인다.
△대동문동 대동문 부감 (이미지 출처: 평화문제연구소 북한지역정보넷)
평양종과 종각 내력은 이렇다. 숙종 40년(1714년) 평양 북성 축성(개축), 북장대를 세우면서(개축) 대동문 다락에 있던 종을 옮겨 달았다고 하고, 오늘날의 평양종은 1726년 6월~9월 부벽루 서쪽 뜰에서 주조한 것이라고 하는데, 새로 만든 평양종은 당시 객사이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새로 지어 걸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종각이 따로 없었다는 얘기다. 대동관은 지금의 중구역의 중심인 '종로동' 영역에 있었다.
종로동은 1946년 관후리 계리 등을 병합하여 신설했으며, '종각이 있던' 거리라서 종로리-종로동이 되었다. 병합 전의 관후리는, 엿을 많이 만들어서 당동(糖洞)과 장대재의 하처골-하처동을 병합하여 1914년에 신설했던 마을로서, 대동관 청화관 신관 등 객사 뒤쪽에 있다 하여 관후리-관후동이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객사는 관가에서 마련하여 '다른 지방에서 온 관원을 묵게 하던 숙소'를 이르던 말이었다.
따라서 새로(처음) 지은 종각이 있던 곳(대동관 앞), 다시 말해 종각의 원래 위치는 바로 지금의 중구역 종로동, 장대재 언덕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 부근이 된다.
장대재는 예전에 장대(將臺)가 있던 언덕(구릉)을 말하며, 집승대(集勝臺)라고도 한다. 조선 시대 평양 감영 군사를 지휘 관리하는 관청 '중군청(中軍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