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21]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12. 15. 22:49

(21회)

 

△평양 대성학교 학생들과 교사(校舍)∥이미지 출처: 도산 안창호 온라인 기념관(전시관-청년 시절과 신민회 활동/사진 하단 영문 메모 중앙부: Daisung Academy 아랫줄 좌우: Pyungyang Korea)∥도산 안창호는 당시 학교가 관찰부동에 있다고 하였다. 관찰부동은 관찰부(觀察府) 즉 감영(監營)이 있던 만수대 언덕 남쪽 기슭의 영문(營門)거리 마을로 볼 수 있으며, 지금의 중구역 만수동 영역으로 추정된다.

 

남산재 언덕 일신학교 앞까지 동생 재호를 바래다준 재명이 장대재 언덕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관찰부동 영문거리를 지나서 만수대 언덕 끝자락에 이르자, 저만큼 우뚝 선 ㄱ자형 2층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재호가 말한 그대로 대성학교였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교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때라도 맞춘 듯 재명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곡조에 맞춘 '국민-애국 창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재명은 교문 앞에 선 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수십 명의 힘찬 목소리가 하나로 들린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두 눈엔 눈물이 고여 흘렀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구름 없이 높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절부터는 재명도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기독교 찬송가 338장은, '영국국교회'의 감리교 운동 주창자인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작사(1741년), 스코틀랜드민요 '올드 랭 사인' 곡을 붙인 찬송이다.>

 

재명은 학교 정원 동쪽에 있는 별채 숙직실에서 안창호를 만났다. 해삼위 형편을 보고 듣고 한 대로 자세히 전했다. 화롯불에 차도 끓이면서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도 들었다. 아까 학생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안창호가 귀국 직후 전부터 있던 가사를 현실에 맞는 내용으로 부르기도 쉽게 상당 부분 고쳐봤고, 개교 후 윤치호 교장과 상의하여 국기 배례 시에 함께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럭저럭 한 시간쯤 있다가 한 사나흘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트렁크 짐을 들었다.

 

안창호도 아직은 함동철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북간도 이곳저곳 시간 좀 걸리고 있거나 고단한 여정에 집에 돌아오는 길로 몸져누웠을 수도 있었다. 아프진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허약한 체질의 함동철 걱정에 재명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평양 성모여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던 천주교 관후리성당(1896~1950) 외부 모습이다. 성모여학교 처음에는 별도의 건물 없이 교회 혹은 사제관을 학교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후리는 1914년 당동과 하처동을 병합해 신설한 마을로 지금의 중구역 종로동 영역이다.∥이미지 출처: 천주교 서울 대교구(평양교구 본당 약사)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당 문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문이 열렸고, 미소를 띤 얼굴로 한 신부가 말을 걸었다. 재명은 빙그레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신부에게 물었다.

 

"함동철 선생님 계신지요. 저는 미국에서 온 이재명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함 선생님은 지금 어디 가셔서 안 계시고, 그래도 이쪽으로 잠깐 오시지요. 동생분이신 함마리아 선생이 계십니다. 참, 깜빡했네. 제 이름은 원래는 르 메르이고요. 여기서는 이유사 신부, 루도비코라고 합니다…"

 

우리말이 유창한 르 메르 신부 안내로 한옥 사제관 사랑방-접견실로 들어갔다.

 

"1학년을 가르치셔서 곧 끝나실 겁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예, 신부님. 고맙습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수업이 끝났는지 아이들 소리로 밖이 소란해졌다. 잠시 후에 함동철을 닮은 여선생 한 명이 르 메르 신부와 함께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오라버니를 찾아오셨다고요.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예, 저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근데 동철이 형님은…"

 

함동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재명은 귀국하던 길로 해삼위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함동철의 소식을 들었고 지금쯤은 와있을 거란 생각에 짐 찾으러 나온 김에 잠깐 들렸노라 간략히 얘기하고, 북간도지역에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지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 오라버니 없다고 그렇게 금방 가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그러지 마시고 이렇게 합시다…소식만 들어도 어딘데요…"

 

함마리아는 막무가내였다. 오늘 수업도 끝났으니 집으로 가잔다. 결례 아닌가 하고 망설이던 재명은 따라가기로 했다. 처음 보는데도 자신의 오빠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살갑게 대해주는 함마리아 선생이, 진작에 돌아가신 늘 그리운 어머니 같기도 하고 없던 누님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이 더 강해서였다.

 

함동철의 부모님도 재명을 반겨주었다. 이름을 듣더니만 왜놈들을 흠씬 패주었던 바로 그 청년 아니냐며 기뻐하신다. 해삼위에서 들은 함동철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묻는 대로 미국 얘기도 좀 하다가 함동철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틈엔지 벌써 빈방이었을 함동철의 방은 따스하게 데워져 있었다. 함마리아와 함께 때늦은 점심도 겸상으로 받았다. 무엇 하나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어디 가까운 친척 집에라도 온 듯, 재명은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참 편안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한참 얘기 중에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 함마리아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어~ 그래~ 인성이 어서 와라. 오늘은 너희 반도 일찍 끝났구나…"

 

마루로 올라서는 여학생을 보는 순간 재명은 움찔했다. 그냥 나이 어린 학생인 줄 알았더니 다 큰 처녀가 아닌가. 인성도 재명을 보는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우리 오라버니하고 미국서 같이 공부하시던 분이야.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와…"

 

나이는 열일곱, 작년 1학년 땐 함마리아가 가르쳤고, 지금은 2학년으로 함동철이 가르치다 잠시 다른 선생이 가르치는, 성적이 특출해서 가르칠 게 별로 없는 그런 우수한 학생, 마음씨도 고운 오인성이라고 함마리아가 일러준다.

 

"어머니께서 이거 좀 갖다 드리라고…"

"아니, 네 어머니는 뭘 또 이렇게 보내신다냐. 하, 이거 참…"

 

들고온 보자기를 다소곳이 내밀며 방석 위에 살포시 앉는 인성을 보면서, 재명의 머릿속은 하얘지고 있었다.

 

(계속)

 

참고:

대성학교와 성모여학교, 그리고 일신학교에 관하여

 

이재명 의사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세 학교를 따라가 본다. 대성학교는 태극서관과 함께 이 의사의 주요 거점, 성모여학교는 오인성 여사가 다녔던 학교, 일신학교는 이 의사와 그의 동생이 다녔던 학교이다. 대성학교는 대학에 가까운 중학교였으며 성모여학교와 일신학교는 초등과정의 소학교였다.

 

[가] 대성학교

 

#1. 설립시기

 

대성학교 설립시기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바 1907년 개교설과 1908년 개교설이 있다. 1907년 설은 대성학교 동문 흥사단 단우 등의 회고록을 근거로 하고 1908년 설은 1908년의 학교 찬성 및 개교식 등 신문기사를 근거한다. 대성학교는 대학의 위상을 가진 4년제 중학교로 1912년 봄에 제1회 졸업생만 내고 강제폐교 당했다.

 

얼른 생각하면 1908년도 개교에 4년제 중학교 1912년도 졸업이니 1908년 개교설이 옳다. 하지만 1학년 입학을 위한 예비반-예비과를 두었으며 매 학기 신입생을 모집했다고 한다. 5년제로도 볼 수 있단 얘기다. 따라서 필자는 1907년 개교설에 무게를 두고 7월 8일 평양 연설회 직후 발기-설립, 군대해산 이후 9월 임시개교로 본다.

 

그리하여 1908년 9월 개교식 기사 등은 학교의 틀을 완전히 갖춘 후였지 않았을까(혹은 그동안엔 여러모로 매우 숨 가쁜 국내상황으로),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본다.

 

ㄱ) 안창호의 1907년 7월 8일 평양 연설회(직후부터 대성학교 설립준비 추정)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 자 3면 1단 여자교육회시찰∥평양지방에 여자교육을 시찰할 차로 황실에서 경성에 있는 진명여학교 총교사 황 부인 몌례(袂禮) 씨를 특별히 파송하여 (광무 11년 7월 8일) 명륜당 안에 있는 여자교육연구회를…학도 칠팔백 명과 여염 부인 사오백 명은 서편으로 참석하고 일반 사회 사람들은(일천팔구백 명) 동편으로 방청…진명여학교(평양) 생도는 애국가를 부르고…부인연설은 황 부인과(몌례) 김 부인과(혈넌) 십이 세 된 여자 옥진제(옥어진) 씨요 남자연설은 안창호 씨와 김희경 씨인데…의연금이 육백삼십이 원, 오십이 전, 오 리(636원 2전 5리)…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순 한글판 PDF)☜> <연설회 날짜, 일반사람 숫자 등의 누락 및 의연금 액수 등이 국한문판과는 약간 다르다. (참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국한문판 원문이미지)> <5회 참고1의 덧붙임 #3 참조>

 

ㄴ) 대성학교 출신 전영택의 회고(임시교실 이층집과 조회시간 애국가)
大成學校 학생시절의 추억[전영택](『기러기』1965. 4)∥大成學校…내가 대성학교 학생으로 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오십 년이 더 지난 까마득한 옛날 일이지만 지금도 가만히 눈을 감으면 그때의 임시교실로 쓰던 이층집이며 한편에 정자처럼 외따로 있던 사무실이며 그리고 처음에는 지금 같은 교복이 없이 검은 무명 두루마기에 모자를 쓰고 다니던 우리 학생들의 모습이며, 또 아침마다 조회시간이면 학생들이 교정에 정렬하여 평양성이 들들 울리리만큼 우렁차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는 애국가를 부르던 광경, 그중에 도산이 단상에 나서서 간단하면서도 뜻 깊은 훈화를 하시던 그 모습, 그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독립운동가 자료 안창호 2865번)☜>

 

ㄷ) 대성학교 출신 김형식의 회고(1907년 개교설의 근거)
나의 母校와 恩師(두 번째)平壤 大成學校와 安昌浩 朝鮮日報 金瀅植
…殺到하는 入學志願者 1907년 大成學校 설립(착각이나 오류보다는 임시개교로 추정)의 報가 세상에 전파되자 이를 성원 지지하는 소래는 全朝鮮을 흔들엇스며 입학지원자는 조수와 갓치 밀니어 불시에 5, 6백 명의 청년이 모히엇다. (당시에 만흔 학생들은 입학시험을 행한 결과가 거의 전부가 예비반으로 편입되고 1학년은 50명에 불과하얏스며 교장으로는 尹致昊씨를 추대하얏고 安島山은 스사로 代辨 교장이 되엇스며 따로이 사범과와 농과를 부설하얏섯다) 중학교 학생이라 하지만은 이 당시 大成學校의 생도들은 20세, 30세의 청년유지들로…4학년 과정은 엇던 전문학교의 3학년 정도와 대등하얏스며 또 수학은 월등하게 고등하얏고 학교의 설비도 중등학교로서는 유례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한국근현대잡지자료 삼천리 제4권 제1호 1932-01-01 나의 母校와 恩師(두 번째)☜>

 

ㄹ) 흥사단 김선량 단우의 회고(1907년 개교설의 근거)
내가 감명받은 도산의 교훈[김선량](『나라사랑』39, 1981)내가 감명받은…여러 방면의 애국 운동을 하였지만…처음으로 독립해서 강서(江西)에 점진학교(漸連學校)를 1899년(21세)에 세우고, 1907년(29세)에 평양에 유명한 대성학교를 세워서(착각이나 오류보다는 임시개교로 추정) 독립지사를 양성하려고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였다. 미국에서도 학생양성소를 설립했고(기숙학교), 중국에서도 남경(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 운영하였다. 그리고 1913년(35세)에는 미국에서 그가 국내에서 조직했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후신으로 흥사단(興士團)을 창립했는데, 이 조직 또한 청년 정예분자를 양성하는 사회교육의 일환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독립운동가 자료 안창호 2835번)☜>

 

ㅁ) 1908년 9월 26일 개교식 신문기사(1908년 개교설의 근거)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30일 자 1면 4단 잡보 대성학교 개교식∥윤치호 이종호 안창호 삼 씨가 평양군에 사립 대성학교를 설립함은 전보에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금월 이십육일에 그 학교에서 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내빈이 천여 명이오 학생이 구십여 명인데 교장 윤치호 씨는 그 학교 설립한 이유를 설명하고 안창호 씨는 현금정형(現今情形)과 장래진취(將來進取)의 문제로 연설한 후에 김진초 씨가 답사하였다더라.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순 한글판 PDF)☜> <평양 군민의 기부금과 유지인사 신민회 회원들의 후원금으로 설립한 후에도 關西江山 三志士로 일컫는 吳熙源(오희원) 金鎭厚(김진후) 吳致殷(오치은) 등의 기부금 후원이 계속되었다.>

 

#2. 학교위치

 

도산 안창호는 부인 이혜련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 대성학교가 관찰부동에 있다고 하였다. 관찰부(觀察府)는 감영(監營)의 정식명칭으로 관찰사 또는 감사가 직무를 보는 관아를 이르던 말이다. 북한지역정보넷(http://www.cybernk.net/)에는 평양 감영이 나온다. 감영은 만수대 위에 있었다. 따라서 학교위치는 만수대 언덕 남쪽 기슭의 영문거리 마을로(관찰부동), 지금의 중구역 만수동 영역으로 추정된다.

 


△안창호가 이혜련에게 보낸 편지 2장 중 2쪽(단군 4천2백41년/1908년 11월 20일)에서 알 수 있듯 대성학교 위치는 지금의 만수동 영역으로 추정되는 관찰부동 켄녑 언덕이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편지 1~2쪽 전문(이미지 뷰어☜)

 

(1) 나는 비록 자주 편지를 아니 하나 집안 소식은 알고자 하는 욕심이 간절하던 차에 그대의 편지를 받아보니 얼마나 위로가 되나이다. 그동안에 그대는 몸도 괴로우려니와 마음이 편치 않고 답답클클한 때가 많았을 터이지요. 지금 시대가 부부간 안락을 누릴 때가 못 되었으니 그대는 생각을 널리 하고 뜻을 활발히 하여 천연한 태도로 지내와 안심하고 공연히 적은 뜻을 일지 못한다고 극탄하여 몸과 마음이 고생하는 때에 오래 머물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이런 말로 권하는 것이 도리어 염치없는 듯하나 그러나 나는 결단코 방탕한 남자가 되어 집을 잊고 아니 돌아가는 자는 아니라 세상이 다 나를 웃고 처자가 원망하더라도 나의 붙잡은 일을 차마 버릴 수 없나이다. 그런즉 나만 사랑치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그대는 나를 나라일 하라고 원방에 보낸 셈으로 치고 스스로 위로받기를 원하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Philip(필립-기필코 독립을, 장남)도 잘 있으며 마음의 덕성이 자라고 품행이 아름다운지 한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실로 긋치 않소이다.

 

(2) 내가 주관하는 평양 대성학교에 학도가 一百二十명가량인데 재미가 있소이다. 명년 삼월에 일본에 있는 장응진 씨가 졸업하고 본국에 돌아오거든 학교 일을 맡기고 미국으로 가려 하니 명년 여름이나 가을에는 가게 될 듯하외다. 성래 집이(처가) 다 평안하고 간난한 것은 한 모양이오. 극성이는(처남) 내가 학비를 대어 주어서 측량을(강습소) 졸업하였소이다. 그러나 그 애는 행실이 아름답지 못하고 아직도 지각이 나지 아니하였소이다. 나는 지금 서울에 있는데 일간 내려갈 터이외다. 이후에 내게 편지하려거든 평양 대성학교로 편지하시오. 상수구 밖으로 하면 편지마다 먼저 떼어보는 것을 매우 좋아 아니 하나이다. 내가 항상 잠은 학교에서 자고 밥은 장대재 누이의 집에서 먹나이다. 학교집은(校舍) 관찰부동 켄녑 언덕에 있소이다. 그대도 할 수 있는 대로 짬짬이 공부도 하였으면 매우 좋겠소이다. 내 병은 전보담 좀 낫소이다. 단군 사천二百四十一년(1908년) 十一월 二十일 안창호


켄녑 언덕은 캐년의 언덕, 산언덕 사이에 주름진 정도의 작골짜기를 협곡으로 표현, 관찰부동 어느 골짜기 언덕쯤을 켄녑 언덕이라 하진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1. ㅁ)의 대한매일신보엔 학생 수 구십여 명, 두 달쯤 뒤 안창호는 一百二十명가량을 말한다. 차이 나는 학생 수 30명가량은, 곧 1907년 9월~12월의 예비반으로 정규 1학년, 1911년에 4학년이 돼 1912년 봄에 졸업생이 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안창호 가족사진∥선생의 자녀는 다섯, 아직은 넷인 것으로 미루어 1917~18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관찰부동 편지'는 사진 한가운데 장남 필립의 나이 만 세 살 무렵(1908) 쓰였다.∥이미지 출처: 도산 안창호 온라인 기념관(전시관-가족/친지)

 

[나] 성모여학교

 

#1. 설립시기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의 <북한교회 이야기 평양교구 관후리교회(1896~1950)>, 평양교구 2대 주임 르 메르(Le Merre/李類斯/이루도비코) 신부가 1900년 장대현(장대재)에 본당을 신축한 후, 1905년 9월 1일 초등과정 기명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다 이듬해 1906년 5월 1일 남녀학생을 분리, 성모여학교를 신설하여 두 학교 모두 교회에서 운영, 당시 본당 명칭은 '성미카엘성당 평양교회'였으며 1934년 관후리교회로 개칭했다고 한다. (두 학교는 1929년 성모학교로 다시 통합)

 

#2. 학교위치

 

천주교 서울 대교구 '가톨릭인터넷 굿뉴스'는 평양교구 본당의 약사와 건축특징을 말하면서 장대현은 무인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높은 언덕으로 평양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입지특성을 갖는다고 적었다. 무인들의 연무장에서 장대현(장대재) 언덕에 있던 진위대 연병장과 중군청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장대현 언덕의 관후리교회, 즉 학교위치는 지금의 중구역 종로동 평양학생소년궁전 조금 북쪽으로 볼 수 있다. (장대현은 남서쪽의 남산현과 북쪽의 만수대와 잇닿아 있다.)

 

△기명학교 개교 1주년 기념(1906)∥여학생들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성모여학교를 분리한 이후가 분명하다.∥이미지 출처: 천주교 서울 대교구(평양교구 약사-1)

 

△펜화 성지순례: 평양교구 관후리 주교좌성당과 성모학교∥남녀공학 기명학교가 성모여학교를 분리했다가(1906) 성모보통학교로 재통합한(1929) 이후의 모습으로 추정된다.∥이미지 출처: 천주교 서울 대교구(평양교구 자료실-본당사진 35번)

 

[다] 일신학교

 

#1. 설립시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평양 일신학교'를 검색했다.

 

ㄱ) 편년자료(2)▷고종시대사1▷<1 平安南道 平壤府의 鍊學會는 城內 靑年 數十人이 1906년 1월 13일 고종시대사 6집>∥光武 10年, 丙午(1906년 淸 德宗 光緖 9年 日本 明治 16年) 1月 13日 (土) 平安南道 平壤府의 鍊學會는 城內 靑年 數十人이 鍊學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던 바, 同會에서는 日新學校를 설립하고 敎科書를 열심히 敎授함으로써 生徒가 雲集하다. [출전] 大韓每日申報 光武 10年 1月 13日 <수십 명으로 조직된 평양부 성내 청년단체 연학회가 1906년 1월에 일신학교를 설립했다.>

 

ㄴ) 한국사연표(4)▷주제별연표3▷<1 광고연표 1906년 4월 21일 황성신문에 게재한 평양일신학교취지서의 구어(句語)를 약간 개 ≪황성신문≫ 1906년 4월 21일 자 4면 교육>∥[AD] 1906년 04월 21일 황성신문에 게재한 평양일신학교취지서의 구어(句語)를 약간 개정홈이 유하기로 자에 광고…차일신학교지소이설립이(此日新學校之所以設立而) 전차련학회지조직(前此練學會之組織)…광무 9년(1905년) 12월 발기인 최학항 곽용훈 김수철 박상순 임봉주 안재경 박선근 김종호 김영룡 손수경 김흥연 ≪황성신문≫ 1906년 4월 21일 자 4면… <설립발기는 1905년 12월이었다.>

 

ㄷ) 연속간행물(20)▷동아일보12▷<2 동아일보 1922-02-01 무 04 03 (52) 平壤의 舊校 日新學敎의 復活問頭에 對하야(平壤支局一記者)>∥(3단~6단 상자) 平壤漫筆 平壤의 舊校 日新學敎의 復活問頭에 對하야 平壤支局一記者平壤 南山峴에 在한 元 日新學敎를…大抵 日新學敎라 함은 元來 平壤의 日新齋를 重修하야 設立한 者(놈, 것, 곳을 가리켜 이름)이니 日新齋라 함은 百餘 年間의 長久한 歷史를 가지고 西鮮 一帶의 儒道를 統裁하얏스며 關西의 文化를 做出하얏서다. 그러나 時代가 變하고…光武 八年(1904년)에 此를 重修하야 學校를 設하얏나니 名曰 日新學敎라… <남산현(남산재)에 있는 구 일신학교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내용이다. 학교는 원래 100년 이상 전통의 일신재라고 하는 '서당 또는 학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ㄹ) 위 세 기사 외 일신학교 관련 다른 기사를 두루 살펴보면, 일신재의 일신학교 전환을 광무 7년(1903년)으로 말하면서 무조건(강제) 기부했던 학교 터와 건물을 반환해달라고 진정을 했다는 기사에(동아일보 1923.07.13.03.06), 일신 진명 양교 관계자연합회의 일신학교 반환운동 기사(중외일보 1928.03.10.04.03), 구 일신학교 교사(校舍)가 결국 개인에게 낙찰되고 말았다는 기사도(중외일보 1928.08.07.04.01) 있다. 일제의 눈엣가시 집단, 배일(排日) 학교였던 일신학교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ㅁ) 이 의사는 하와이 노동이민을 일신학교를 졸업하고 1904년(甲辰年/갑진년)에 갔었다. 따라서 ㄱ) ㄴ)을 보면 이 의사는 일신재를 나왔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ㄷ) ㄹ)을 보면 1906년 일신학교 정식설립(학교전환) 이전에 이미 시대 변화에 발맞춰 학교라고 불렀을 가능성도 충분하여 '일신학교 졸업'이 틀리진 않는다. 어찌 됐든 일신학교의 정식설립(학교전환/등록)은 1906년이지만, 그 역사는 100년 이상이다.

 

#2. 학교위치

 

南山峴에 在한 元 日新學敎, #1.의 ㄷ)에 이미 결론이 나 있다. 남산현(남산재)에 있었다. 남산현은 지금의 중구역 중성동 영역이다. 남산(南山) 고개를 일러 남산현(南山峴), 남산은 선승대(仙乘臺)라고도 한다. 인민대학습당이 서 있는 곳이다.

 

관련하여 조금 더 살펴보자. 브리태니커 외 상당수 자료는 이재명 의사가 1903년에 기독교인이 됐다고 말한다. 대한감리회본부 한국감리교인물사전과 장로교 계열의 누리사랑넷은 1906년을 말한다. 이재명 의사 기독교 입문도 두 가지 설인 셈이다.

 

한국의 '하나님'을 기독교의 God과 동일시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한 지금의 인천 내리교회(감리교) 초창기 용동-웨슬리교회 2대 목사 조원시/존스(G. H. Jones)가 노동이민 모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응모를 권유했다.

 

남산현 언덕에 일신학교(일신재)가 있었고, 남산현교회(감리교)가 있었다. 이재명 의사의 기독교 입문은 언제였는지, 어떤 경로로 미국을 가게 됐는지, 뭔가 고리가 보인다. 교인이 된 건 1903년 무렵, 미국행도 남산현교회를 통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리교 및 장로교의 이재명 의사 1906년 기독교 입문설은 당시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및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공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1906년 세워진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기록을 찾을 수 없어 확인할 순 없어도 일신학교는 기독교계 (청년들이 운영한) 사립학교 설까지 있어 1903년 입문설에 힘이 실린다.>

 

일신학교와 더불어 남산현교회는 지금의 인민대학습당 자리에 있었다. 아쉽게도 일신학교 사진은 찾지 못했고, 남산현교회와 인민대학습당 사진만 한 장씩 올린다.

 

△이재명 의사가 다녔던 교회로 추정되는 남산현교회 1910년 모습이다.∥이미지 출처: 서울 서초구 반포동 기독교대한감리회 남산교회(교회역사-남산역사갤러리)

 

△남산현 언덕 지금의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광장의 모습이다. 사진 오른쪽 북동쪽으로 장대현 언덕, 그 북쪽의 만수대 언덕, 세 언덕은 서로 잇닿아 있다.∥이미지 출처: 서울 서초구 반포동 기독교대한감리회 남산교회(교회역사-남산역사갤러리)

 

<한국 기독교의 '하나님'을 개발한 존스 목사 관련 글 보기(이영호 인하대 교수)☜>

 

2012.12.15(토)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