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평양 대성학교 학생들과 교사(校舍)∥이미지 출처: 도산 안창호 온라인 기념관(전시관-청년 시절과 신민회 활동/사진 하단 영문 메모 중앙부: Daisung Academy 아랫줄 좌우: Pyungyang Korea)∥도산 안창호는 당시 학교가 관찰부동에 있다고 하였다. 관찰부동은 관찰부(觀察府) 즉 감영(監營)이 있던 만수대 언덕 남쪽 기슭의 영문(營門)거리 마을로 볼 수 있으며, 지금의 중구역 만수동 영역으로 추정된다.
남산재 언덕 일신학교 앞까지 동생 재호를 바래다준 재명이 장대재 언덕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 관찰부동 영문거리를 지나서 만수대 언덕 끝자락에 이르자, 저만큼 우뚝 선 ㄱ자형 2층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재호가 말한 그대로 대성학교였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교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때라도 맞춘 듯 재명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338장, '천부여 의지 없어서' 곡조에 맞춘 '국민-애국 창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재명은 교문 앞에 선 채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수십 명의 힘찬 목소리가 하나로 들린다. 가슴이 벅차올랐고, 두 눈엔 눈물이 고여 흘렀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구름 없이 높고~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3절부터는 재명도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임군을 섬기며~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기독교 찬송가 338장은, '영국국교회'의 감리교 운동 주창자인 존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가 작사(1741년), 스코틀랜드민요 '올드 랭 사인' 곡을 붙인 찬송이다.>
재명은 학교 정원 동쪽에 있는 별채 숙직실에서 안창호를 만났다. 해삼위 형편을 보고 듣고 한 대로 자세히 전했다. 화롯불에 차도 끓이면서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열정도 들었다. 아까 학생들이 불렀던 '애국가'는 안창호가 귀국 직후 전부터 있던 가사를 현실에 맞는 내용으로 부르기도 쉽게 상당 부분 고쳐봤고, 개교 후 윤치호 교장과 상의하여 국기 배례 시에 함께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럭저럭 한 시간쯤 있다가 한 사나흘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트렁크 짐을 들었다.
안창호도 아직은 함동철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북간도 이곳저곳 시간 좀 걸리고 있거나 고단한 여정에 집에 돌아오는 길로 몸져누웠을 수도 있었다. 아프진 말아야 할 텐데 걱정이다. 허약한 체질의 함동철 걱정에 재명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평양 성모여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던 천주교 관후리성당(1896~1950) 외부 모습이다. 성모여학교 처음에는 별도의 건물 없이 교회 혹은 사제관을 학교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후리는 1914년 당동과 하처동을 병합해 신설한 마을로 지금의 중구역 종로동 영역이다.∥이미지 출처: 천주교 서울 대교구(평양교구 본당 약사)
"어떻게 오셨습니까."
성당 문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에 문이 열렸고, 미소를 띤 얼굴로 한 신부가 말을 걸었다. 재명은 빙그레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신부에게 물었다.
"함동철 선생님 계신지요. 저는 미국에서 온 이재명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함 선생님은 지금 어디 가셔서 안 계시고, 그래도 이쪽으로 잠깐 오시지요. 동생분이신 함마리아 선생이 계십니다. 참, 깜빡했네. 제 이름은 원래는 르 메르이고요. 여기서는 이유사 신부, 루도비코라고 합니다…"
우리말이 유창한 르 메르 신부 안내로 한옥 사제관 사랑방-접견실로 들어갔다.
"1학년을 가르치셔서 곧 끝나실 겁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지요."
"예, 신부님. 고맙습니다."
10여 분쯤 지났을까, 수업이 끝났는지 아이들 소리로 밖이 소란해졌다. 잠시 후에 함동철을 닮은 여선생 한 명이 르 메르 신부와 함께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오라버니를 찾아오셨다고요.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예, 저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근데 동철이 형님은…"
함동철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재명은 귀국하던 길로 해삼위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함동철의 소식을 들었고 지금쯤은 와있을 거란 생각에 짐 찾으러 나온 김에 잠깐 들렸노라 간략히 얘기하고, 북간도지역에서 시간이 좀 걸리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끝으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니지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 오라버니 없다고 그렇게 금방 가려고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그러지 마시고 이렇게 합시다…소식만 들어도 어딘데요…"
함마리아는 막무가내였다. 오늘 수업도 끝났으니 집으로 가잔다. 결례 아닌가 하고 망설이던 재명은 따라가기로 했다. 처음 보는데도 자신의 오빠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살갑게 대해주는 함마리아 선생이, 진작에 돌아가신 늘 그리운 어머니 같기도 하고 없던 누님 같기도 한 그런 느낌이 더 강해서였다.
함동철의 부모님도 재명을 반겨주었다. 이름을 듣더니만 왜놈들을 흠씬 패주었던 바로 그 청년 아니냐며 기뻐하신다. 해삼위에서 들은 함동철의 소식을 전해드리고 묻는 대로 미국 얘기도 좀 하다가 함동철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틈엔지 벌써 빈방이었을 함동철의 방은 따스하게 데워져 있었다. 함마리아와 함께 때늦은 점심도 겸상으로 받았다. 무엇 하나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마치 어디 가까운 친척 집에라도 온 듯, 재명은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참 편안했다.
"선생님~ 저 왔어요~"
한참 얘기 중에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 함마리아가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어~ 그래~ 인성이 어서 와라. 오늘은 너희 반도 일찍 끝났구나…"
마루로 올라서는 여학생을 보는 순간 재명은 움찔했다. 그냥 나이 어린 학생인 줄 알았더니 다 큰 처녀가 아닌가. 인성도 재명을 보는 순간 발이 얼어붙었다.
"우리 오라버니하고 미국서 같이 공부하시던 분이야. 괜찮으니까 얼른 들어와…"
나이는 열일곱, 작년 1학년 땐 함마리아가 가르쳤고, 지금은 2학년으로 함동철이 가르치다 잠시 다른 선생이 가르치는, 성적이 특출해서 가르칠 게 별로 없는 그런 우수한 학생, 마음씨도 고운 오인성이라고 함마리아가 일러준다.
"어머니께서 이거 좀 갖다 드리라고…"
"아니, 네 어머니는 뭘 또 이렇게 보내신다냐. 하, 이거 참…"
들고온 보자기를 다소곳이 내밀며 방석 위에 살포시 앉는 인성을 보면서, 재명의 머릿속은 하얘지고 있었다.
(계속)
참고:
대성학교와 성모여학교, 그리고 일신학교에 관하여
이재명 의사와 밀접하게 연관되는 세 학교를 따라가 본다. 대성학교는 태극서관과 함께 이 의사의 주요 거점, 성모여학교는 오인성 여사가 다녔던 학교, 일신학교는 이 의사와 그의 동생이 다녔던 학교이다. 대성학교는 대학에 가까운 중학교였으며 성모여학교와 일신학교는 초등과정의 소학교였다.
[가] 대성학교
#1. 설립시기
대성학교 설립시기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바 1907년 개교설과 1908년 개교설이 있다. 1907년 설은 대성학교 동문 흥사단 단우 등의 회고록을 근거로 하고 1908년 설은 1908년의 학교 찬성 및 개교식 등 신문기사를 근거한다. 대성학교는 대학의 위상을 가진 4년제 중학교로 1912년 봄에 제1회 졸업생만 내고 강제폐교 당했다.
얼른 생각하면 1908년도 개교에 4년제 중학교 1912년도 졸업이니 1908년 개교설이 옳다. 하지만 1학년 입학을 위한 예비반-예비과를 두었으며 매 학기 신입생을 모집했다고 한다. 5년제로도 볼 수 있단 얘기다. 따라서 필자는 1907년 개교설에 무게를 두고 7월 8일 평양 연설회 직후 발기-설립, 군대해산 이후 9월 임시개교로 본다.
그리하여 1908년 9월 개교식 기사 등은 학교의 틀을 완전히 갖춘 후였지 않았을까(혹은 그동안엔 여러모로 매우 숨 가쁜 국내상황으로),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