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02]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1. 10. 11. 16:01

(2회)

 

두런거리던 소리 끝에 사립문 밀치는 소리가 났고, 저벅저벅 구둣발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 앞에 멈췄다. 그가 방문을 열고 문고리를 잡은 채 밖을 내다봤다.

 

"뉘시오?"
"접니다. 다녀왔습니다."

 

마루 아래 댓돌을 살피던 사내가 대답한다. 아들이다.

 

"아이고, 놀래라."
"방안에…누구 오셨습니까?"
"그래, 동수하고 오 선생. 춥다, 들어와라."
"아, 예. 창호 형, 들어갑시다."

 

아들이 사립문 쪽을 돌아보고 손짓을 한다.

 

세 사람에 더하여 두 사람이 들어서자 방안이 꽉 들어찼다. 그가 조창호와 아들을 번갈아 봐가면서 물었다. 조급한 마음에 동시에 묻는다.

 

"창호 자넨, 이 애하고 어디서 어떻게 만나 함께 들어오는가? 얘, 어떻더냐?"

 

조창호 얘기론 전달받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가 현장을 둘러보던 중, 어떤 사람 말이 칼 맞은 총리하고 총리차부 둘 다 병원 실어가지 않고 총리네 본집으로 실어갔단 얘길 들었다고 하여 성공한 줄 알고 쾌재를 부르면서 이완용의 저동 집으로 얼른 또 쫓아가서 봤는데, 멀찍이 숨어서 보기에도 경찰관리 수백 명이 득시글대고 있고 그 와중에 각부 대신들의 인력거들과 의사나 간호부가 탄 것이 확실한 인력거들이 연달아 들어가기만 했지 초상집 호곡 소린 전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부근에서 요행히 아들을 만나게 돼 함께 왔다며 이재명이 이완용을 죽이진 못한 것 같다고 한다. 아들 또한 같은 얘기로 천벌을 받아 죽어서 부음은 생략했다손, 발등거리가 없어 상갓집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던바, 매국적 이완용이 안 죽은 것 같다고 한다.

 

<부음(訃音), 조선 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입었던 웃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크게 소리쳐 죽음을 알렸다. 발등거리, 초상집에서 만들어 쓰는 임시 초롱.>

 

두 사람의 얘기에 이동수는 기가 막혔다. 매국적 이완용과 경호원을 겸한 인력거꾼 박원문을 이재명이 번개 같은 솜씨로 해치우는 모습을 김병록과 함께 똑똑히 봤고 또 둘 다 분명히 죽은 걸 확인했는데, 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동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외치며 무릎을 쳤다. 으음, 어찌 된 일일까…?!

 

△황성신문 1909년 12월 23일 자 2면 1~2단 연결∥총상피자 총리대신 이완용 씨는 작일(어제, 22일) 오전 11시 30분에 인력거를 승하고 남부 종현 천주교당 전을 통과하다가 특허국 전에서 자객에게 피자하였더라. (총리=수상, 둘을 합쳐서 총상이라 칭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신문류)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23일 자 3면 2단∥이재명 의사 의거 다음날, 신문은 이완용이 병원이 아니라 (경호원을 겸한 차부 박원문과 함께) 본집으로 보내졌다고 전한다. 처음엔 아마 이미 죽었다고 판단했거나 도저히 살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2차 피습의 예방책으로 일단 본집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다. (살아난 이완용만 다음날 병원으로 옮겨 집중치료) 그 당시 이완용의 집은 총리대신 관사로 신축했던 남산 일본군사령부 동쪽에 있는 남산 집과 제2 관사로 추정되는 가회동 집, 그리고 옥동 집, 저동 집 등 적어도 네 채가 있었고, '본집'이라 하면 '저동 집'이 매우 유력하다.∥이미지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고신문서비스)

 

이재명, 눈을 뜨다

 

이재명의 원명은 수길(壽吉), 1886년 10월 16일 평북 선천 태생이다. 생부는 수길이 태어나던 해 사망, 생모 양(梁)씨는 수길이 세 살 무렵 평양부 아청리로 이주했다.

 

이후 양씨는 연광정골 홀아비 임옥여(任玉汝) 씨와 이웃의 중매로 재가하게 되며 상처한 지 수년, 혈육이 없던 임씨는 수길을 각별한 사랑으로 친자식으로 대했다.

 

세 식구는 수길이 8세 무렵 1894년 일청전쟁으로 평양 성내가 수라장으로 변하자 함남 북청으로 피란, 바로 그 무렵 생모 양씨는 수길의 동생 재호(在鎬)를 낳았다.

 

네 식구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1897년 무렵 평양 성내로 돌아왔으며, 생모 양씨는 돌아오자마자 오랜 산후 여증이 크게 재발하여 몇 달 뒤 세상을 뜨게 된다.

 

그러나 계부 임씨는 신세를 한탄하며 주저앉기보다는 슬픔을 이겨내고 두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만 살기로 다짐, 바로 그 무렵 수길의 이름을 재명으로 고쳐주었다.

 

곤궁한 살림에도 계부 임씨는 수길을 성내 일신학교에 보냈고, 15세 무렵 수길은 평양부 중화군 상원면 윤 도사의 집 사환이 돼 계부 슬하를 떠나 자립을 시작한다.

 

이후 수길은 하와이 노동이민자 모집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1904년 무렵, 단순한 노동이민의 꿈이 아니라 좀 더 큰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태평양을 건너가게 된다.

 


△하와이 노동이민 첫 번째 이민선 미국 상선 갤릭 호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서 작업 중인 한인 노동자들

 

그러나 너무 고되고 가혹한 사탕수수밭 중노동, 날이 가면 갈수록 공부할 가망은 영 없어 보였고, 한동안 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심연 속에 흔들리게 된다.

 

<이재명 의사와 동지들의 나이가 자료마다 각기 다르게 나온다. 이를 두고 필자는 오랜 시간 심사숙고, 동아일보 '1925년' 1월 11일 자 '교살된 이재명의 유족 조사'의 이 의사의 계부 73세 홀아비 임옥여 씨 인터뷰 기사 중 '지금으로부터 삼십 팔구 년 전에 이모(李某/이름은 미상)의 피를 받아'에서 이 의사의 생년 1925-39(굳이 38년 몇 개월까지 따져야 할 필요가 없을 때 우린 보통 38~9년이라 하고 39년에 무게를 두므로 39)=1886년을 유추한 뒤 이와 맞아떨어지는 1910-1886=24세, 즉 1910년 5월 18일 현재 10월 16일생 24세, 만 나이로 추정되는 판결문에 따르기로 했다. 일제는 1902년경부터 서구 법률의 예를 따라 세는나이를 없애고 만 나이를 썼다고 한다.>

 

<윤 도사의 도사는 도를 닦아 경지에 이른 사람 道士일 수도 있으나, 성씨를 붙여 도사라 이르면 1882년(고종 19) 폐지된 종오품 都事로 봐야 한다. 조선 시대 都事는 각 도의 관찰사(감사)를 보좌하거나,금부 등에 소속되어 관리의 감찰 등을 맡아보던 벼슬이었다. 윤 도사는 전 도사, '관찰사보좌관'을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참고1:
오인성 여사에 관하여

 

1) 간추린 약력

 

이재명 의사의 부인 오인성 여사는 1890년생으로 추정된다. 평양에서 정미업으로 한 재산을 모은 아버지 오달문과 어머니 김정은 슬하 다섯 자매의 맏이(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네 자매), 평양 성모여학교를 졸업한 후 재령 진초학교 교사를 지냈으며, 이 의사 의거 당시엔 서울 양심여학교(동덕여자의숙 통합) 생도였다. 이 의사 서거 후엔 성재 이동휘의 두 자매 인순 의순과 함께 성진 보신여학교 및 간도 양정여학교 등에서 교사를 지냈다. 이후 연해주 간도 상해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1919년 삼일운동 소식으로 환국했으나 원인 모를 병으로 급서하고 만다.

 

2) 오인성 여사 다섯 자매의 기록

 

국내 항일운동 자료의 總理大臣李完用謀殺未遂事件記錄으로 짚어본 오인성 여사 다섯 자매의 기록이다. 5녀 인선을 제외한 가운데 셋은 평양 진명여학교 생도였다.

 

△우-주소 출생지 직업 성명 나이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문답한 <오인성 참고인 신문조서(1909.12.22)>, <…양심학교(서울) 생도…오인성…당 19세…>∥좌-참고인 오인성을 본격적으로 신문한(1~4회) <제1회 신문조서(1909.12.22)>, <…오달문(?) 장녀…이재명 처 오인성 19세(年)…>∥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검색어: 오인성, 이재명 오인성) <국내 항일운동 자료의 1번 참고인 오인성 신문조서 이미지 7-1쪽(우), 2번 참고인 오인성 제1회 신문조서 이미지 8-1쪽(좌)>

 

△우-<…차녀 오인실 18세…진명여학교(평양)…>∥좌-<3녀…오인근 11세…진명여학교(평양)…4녀 오인숙 8세…진명여학교(평양)…5녀 오인선 7세…이상 오인성(인)>∥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검색어: 오인성, 이재명 오인성) <국내 항일운동 자료의 2번 참고인 오인성 제1회 신문조서 이미지 8-6쪽(우) 8-7쪽(좌)>∥진명여학교는 서울(1906년 4월 설립) 외 평양에도 있었다. 1906년 3월 설립된 평양의 애국여학교가 1907년 진명여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서울의 진명여학교는 황실의 지원으로 엄준원이 세웠으며, 평양 애국여학교는 평양 유지들의 지원으로 문정찬이 세웠다. 교명을 바꾼 후엔 서울 진명여학교 총교사 여몌례황이 평양 진명여학교 교장을 겸하기도 했으며(1907~1911년, 아마도 1907년 7월 안창호 등이 연설한 평양 연설회, 즉 평양 명륜당 '여자교육연구회' 초청연설회 이후부터) 이후 안창호와 의남매를 맺은 조신성이 문정찬으로부터 경영권을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다(~1919년). 조신성은 또 아현동 천주교 묘지에 임시로 묻었던 이재명 의사 시신을 평양의 한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3) 권업신문으로 짚어본 오인성 여사 행적

 

이재명 의사의 동지 김용문(원명, 개명/중화, 이명/동산)은 신태양 1958년 9월호에 김동산으로 발표한 <이완용 암살 의거 수기(월간중앙 2004년 8월호 역사발굴-정리 김종욱 서지연구가)>에서 <…나는 5년 징역을 마치고 출옥하여 사상동지 성욱환 이기필 씨 등과 동행하여 북만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오인성 여사가 길림(吉林)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길림에 들러 오인성 여사를 만나 보았다. 몇 해 만에 허허 만주 벌판에서 기구한 운명들을 지니고 있는 서러운 사람들을 만나니 비참한 눈물이 없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재명은 이미 죽었으나 산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사뭇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뭐요." 하고 오인성 여사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목릉(穆陵)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오 여사도 굳이 따라가겠노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함께 목릉으로 갔다. 목릉 구참(九站)에는 안중근 의사의 자당(慈堂)이 그의 계씨(季氏)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월여(月餘)를 그곳에서 묵은 우리 일행은 다시 노령(露領) 소왕령(小王嶺)으로 갔다. 소왕령에는 이동휘(李東輝) 유동열(柳東悅) 양기탁(梁起鐸) 씨와 같은 독립운동의 거두들이 있었다. 나는 이네들과 함께 다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길림은 그 당시 길림성의 성도 길림이 아닌 '길림현' 의미로 추정된다. 길림현에는 연길도(일명 국자가)가 있었다.

 

△권업신문 1914년 5월 3일(일요일)-러시아력 4월 20일 제108호 2면 5단∥북간도 여학계 북간도 교육계가 확장됨은 일반 다 아는 바려니와 여자 교육도 날로 진취 되는 중 국자가(局子街) 길신여학교에는 이동휘 씨 영양(令孃) 인순 의순 두 형제와 와룡동여학교에는 홍은희 명동여학교에는 우봉운 제씨가 담임 교수하는데 이 네 분은 일찍 서울 연동 정신여중학교를 필업하고 함흥 원산 성진에서 여자 교육계에 헌신하여 아름다운 성적이 만(滿)하였고 또 고 이재명 씨 부인 오씨도 요사이에 도착하여 교무에 착수하는데 이로부터 간도 여자계에 큰 행복이라 칭송이 자~하다더라. (☞국자가=현 연길)∥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권업신문 1914년 6월 28일(일요일)-러시아력 15일 제117호 2면 5단간도통신 양정여학교 당지 국자가 한인예수교회의 발기로 양정여학교를 창립하고 유지 제씨가 찬우회를 조직하여 이 학교의 유지를 담부하였으며 권사용 씨는 상업의 목적으로 준비하였던 二층집을 세 없이 학교에 빌인 고로 인하여 본월 三일경 개학하였는데 학도는 三십여 명이며 교사는 오인성 이인순 양 여사가 담임하였더라.∥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권업신문은 최재형 홍범도 이상설 정재관 이종호 엄인섭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 권업회의 기관지, 신채호 주필에 발행인은 러시아인 주코프였다(1912년 5월 창간, 1914년 8월 폐간). 주요 간부였던 엄인섭은 경술국치 후 변절, 이미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었으며 그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계기는 '철혈광복단'의 '간도 15만 원 탈취사건'이었다(1920년).

 

<그동안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오 여사의 약력과 행적 등에 관하여 미흡하나마 짧게 한번 짚어봤다. 이야기 전개에 맞추어 2부 초반부와 3부 후반부에서 조금 더 짚어보고, 또한 매우 중요한 흔히들 '기회를 엿보던 시기'로만 알았던 이재명 의사 1907년 10월 귀국 이후 1909년 여름까지의 행적은 2부 중반부에서 다룰 예정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내 항일운동 자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신문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위키백과 등을 검색하고(검색어: 오인성, 진명여학교, 평양 진명여학교), 추계 최은희(1904~1984) 유고집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문이재, 최은희 2003), 백범일지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지성문화사, 김구 2011), 전 UN개발기구 대사 김윤열의 자당 여성독립운동가 전창신(1901~1985) 여사 기록 등을 토대로 압축, 정리했다.>

 

참고2:
이완용이 실려간 본집과 차부(인력거꾼) 박원문에 관하여

 

피습공포에 시달리던 매국 역적 이완용은 이런저런 핑계로 수시로 거처를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저택경호는 물론 외출할 때에도 경호원이 전용인력거 앞뒤로 그림자처럼 붙어 다닐 정도로 이동 간 경호에도 신경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완용은 이재명 의사에게 처단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처단을 방해하던 인력거꾼 박원문만 억울하게(?) 죽고 이완용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 처단 직후 경호하던 적들은 어찌 된 셈인지 두 사람을 병원이 아닌 이완용의 집으로 옮겼다.

 

옮겨진 집은 그동안엔 옥동 또는 저동 집의 두 가지 설이 있었고, 필자는 옥동 집에 무게를 뒀다가 새롭게 가회동 또는 남산 집을 고려했었다. 그러나 이제 통감부문서 및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동아일보 등의 관련 기사를 분석, 저동 집을 확인한다.

 

그리고 '우연히' 이완용을 태웠다가 현장에서 즉사했다고 알려진 박원문이 사실은 경호원을 겸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황성신문 기사도 하나 올린다. 일단 박원문은 박노자 교수의 표현처럼 '정당한 폭력의 무고한 희생자'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 통감부문서/총리관사로 신축했던 이완용의 남산 집과 제2 관사 추정 가회동 집

 

이토 통감이 소네 부통감에게 내려보낸 한 문건을 보면 총리 이완용이 1907년 12월 남산 북쪽 기슭에 있는 일본군사령부 동쪽에 사저를 지으면서 총리관사로 한다며 이토 통감에게 건축비를 요구했고, 또 그 건축비가 賜金(사금), 즉 통감이 하사하는 은사금의 국고 지출로 하사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국고를 통감부가 좌지우지했단 얘기도 된다. 상환이 원천 봉쇄된 악성 고금리 강제차관 대일본 국가부채가 빌미였다. 하사금은 처음엔 5만 圓이었다가 나중엔 '이 총리 거택 관사화'를 구실로 두 배로 불어나 10만 圓이 된다. 이토히로부미가 언급한 '昌德宮(창덕궁) 부근 총리관사 건축'과 무관치 않아 보이며, '昌德宮(창덕궁) 부근'은 가회동으로 추정된다.

 

문서제목 (55) [한국 內閣 각 대신에의 官舍 신축비용 國庫 지출에 관한 件]
문서번호 往電第四號
발송일 明治 四十年 十二月 二十一日 午後 四時(1907-12-21)
발송자 伊藤 統監
수신자 曾禰 副統監

 

李 總理가 이달 13일 자로 본관에게 보내온 私信 중 장래 누가 한국의 총리를 맡는다 하여도 그 저택은 統監府와 빈번한 교섭을 위해 統監府 근처에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현재 그가 軍司令部 동쪽에 신축 중인 가옥을 총리대신 관사로 결정하고 건축비를 국고에서 지불하였으면 한다고 전해왔음. 그렇지만 본관이 생각건대 총리대신 관사만을 南山 기슭에 건축한다 해도 한국정부 측의 집무상의 불편은 여전히 많을 것임. 결국 관사를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면 昌德宮 부근에 상당한 장소를 선정하여 총리대신을 비롯하여 각 대신들의 관사도 함께 건축해야 할 것임. 따라서 李完用의 현재 신축 중인 저택은 그냥 그의 집으로 삼도록 하고, 이에 대해서는 그 건축에도 다소의 비용이 필요하게 될 것이므로 미리 내담해둔 대신들에 대한 賜金 건을 이 기회에 실행하여 총리대신에게 5만 圓, 각 국무대신과 궁내대신에게 3만 圓, 내부대신 겸 侍從院卿 및 承寧府總管에게 각각 2만 圓, 합계 30만 圓을 국고에서 지출시키고자 함. 井 度支部次官과도 협의한 후 내밀히 위 취지를 남김없이 李 首相(=總理, 마찬가지로 황성신문도 이완용의 저택 총리관사를 수상관저로 표현한다.)에게 털어놓고 그 의견을 물어서 답전하시기 바람.∥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대한제국/통감부문서/統監府文書 3권/一五. 秘書雜件 一·二/2쪽, (55) [한국 內閣 각 대신에의 官舍 신축비용 國庫 지출에 관한 件])

 

<이토히로부미가 언급한 '한국정부 측의 집무상의 불편상 昌德宮(창덕궁) 부근'은 이재명 의사의 동지 김용문(김중화/김동산)이 수기에서 밝힌 이완용의 집 '그놈의 집이 가회동 쪽이니' 일치한다. 가회동이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있어 그렇다.>

 

<함께 보기: ☞(54) [統監 歸國 후의 한국 政情 상황 통보] 발송일 十二月 十三日(1907-12-13)/발송자 李完用 再拜/수신자 伊藤 統監 閣下∥출처: 국사편찬…상동>

 

<함께 보기: ☞(253) [李 總理居宅 官舍化에 따른 국고지출 10만 圓 지불 지시 件] (1907-12-28)/발송자 伊藤 統監/수신자 曾禰 副統監/제8호 貴電 제36호에 관하여 李 總理의 의견은 지극히 지당하다는 생각이므로 10만 圓을 李 總理에 하사하기로 하였음. 宮內府에서 시기를 보아 본인에게 교부하도록….∥출처: 국사편찬…상동>

 

2) 대한매일신보(순 한글판)/이완용의 저동 집과 제2 관사 추정 관택건축비

 

1907년 7월 21일 자부터 1908년 3월 26일 자까지의 이완용의 집 관련 기사를 두루 살펴보면 다음 사실을 알 수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1907년 7월 21일 자 2면 4단 이씨외겁, 3면 1단 곳곳이 야료, 3면 4단 약현화광 등을 찾아보면 피습을 두려워한 매국 역적 이완용은 7월 19일(03시) 광무황제 강제퇴위 이전부터 숭례문 밖 약현(지금의 중림동) 집을 비우고 있었고, 20일 오후 융희황제 즉위식이 한창일 무렵 격분한 군중 70여 명이 몰려가 불태워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광무황제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동생이자 진명여학교 창립자이기도 한 엄준원의 집, 진고개 송병준의 집, 일본구락부(남산왜성대), 의친왕이 머물던 필동여관, 백씨 이윤용의 집 등을 전전하다가 저동에 있는 남녕위궁을 정치적 연출로 하사받아 차지한 다음 1908년 3월 양제로 건축, 서양식 <저동 집>을 새로 짓는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3월 26일 자 2면 1단∥우-양제로 건축 남녕위ㅅ궁을 총리대신 이완용 씨에게 하사하옵심은 사람마다 다 아는바~어니와 그 집을 훼철하고 양제로 일신 건축하는데 매일에 역군이 사오십 명 가량이라더라. 좌-관택건축비 총리대신 이완용 씨의 관택을 장차 새로 지을 터라는데 탁지부에서 예비금 중에서 이만오천 환을 지발(支撥=지급)하였다더라.∥1907년 12월에 이미 '남산 집'을 지으면서 총리관사로 한다며 비용을 요구해 하사받은 이완용이 미처 완공도 되지 않을 시점인 1908년 3월 들어 남녕위궁 '저동 집'을 또 새로 짓고 있다. 그러면서 또 장차 새로 지을 관사의 건축비를 추가로 하사받는다. '제2 관사 가회동 집' 건축비로도 추정된다. 그리하여 이완용은 통감부와 한국정부의 각각의 일정에 따라 남산 집과 가회동 집을 오가고, 또 그리고 보통 때는 본집으로 회자하기도 했던 저동 집에서 지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저동 집 바싹 근처엔 일본군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신문류)

 

<남녕위궁(南寧尉宮) 등의 위궁은 예전에, 특히 조선 시대 임금 사위 부마도위와 공주 및 옹주 부부 등이 거처하던 궁방의 별칭으로 저동 외에도 여러 곳에 있었다.>

 

<함께 보기: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12일 자 2면 5단∥(무기명 독자) 시사평론 총리대신 이완용 씨는 거접하기를 위하여 남산노인정을 수리할 터인데 일본인과 역사하기를 계약하였다 하니 이같이…∥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고신문서비스)>

 

<함께 보기: ☞대한매일신보 1908년 1월 28일 자 2면 2단∥총리이사 총리대신 이완용 씨는 일전에 남서 저동남녕위궁으로 반이하였는데 우선 사랑만 내어 준 고로 침방에서 그 부인과 동거한다더라.∥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고신문서비스)>

 

3) 황성신문/이완용의 옥동(옥인동) 집

 

옥동(옥인동) 집 관련 기사다. 사놓기만 하고 이사는 가지 않은 듯하다. 이완용의 친족이며 내각총리 시절 비서관이었던 김명수가 1926년 이완용이 죽은 후 1927년 이완용을 기리기 위해 펴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1913년에 와서야 옥동(옥인동) 집터에 <옥인동 저택>을 새로 지었고, 1926년 2월 바로 이 집에서 죽었다.

 

한편 1909년 당시 남산의 북쪽 사면 일대는 일명 왜성대(倭城臺)로 통감부청사 통감관저 일본군사령부(한국주차군 및 주한헌병대) 등이 있었고, 이완용 노인정수상관저 역시 한쪽 귀퉁이에 끼어들어 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완용은 남산 집과 저동 집에 제2 관사로 추정되는 가회동 집을 오가며 지 것으로 추정된다.

 

△황성신문 1909년 10월 1일 자 2면 3단∥移宅延期(이택연기) 總理大臣 李完用 氏는 目下 老人亭首相官邸에 住居하더니 何等 惡感이 有하던지 今回에 巨額의 資金을 投하여 新히 北部 玉洞에 邸宅을 購入하고 一 兩日間 移轉한다더니 該 新邸 附近家에서 虎列刺가 發生함으로 數日 延期하였다더라.∥지금 (남산) 노인정수상관저에 주거하는 총리대신 이완용이 또 무슨 악감정이 생겨서 이번에 거액을 들여 새로 북부 옥동에 저택을 사들이고 한 이틀에 걸쳐 이사한다고 했다가 그 새 저택 부근에 호열자(콜레라)가 발생하여 며칠 연기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후 호열자가 소멸한 뒤에도 일단 그때는 이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저동에도 집이 있는 터에 무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1913년에서야 옥동 집을 헐고 새로 지어 입주한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신문류)


<함께 보기: 1909년 발생 호열자(콜레라) 역시 청일전쟁 직후의 일본군으로 비롯된 결과로 추정☞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선교사처음이야기▷선교사깊이만나기▷에비슨-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기까지▷(상략) 제중원을 정비한 에비슨이 넘어야 할 새로운 과제는 콜레라의 창궐이었다. 콜레라는 청일전쟁(1894~5) 중 만주에 파병되었던 일본군 사이에 먼저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들 일본군이 한반도를 통해서 귀국하는 바람에 콜레라가 전국 각지로 퍼지게 된 것이다. 에비슨은 애초에 사태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조정의 총리대신에게 철저한 방역 대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하지만 평양과 서울에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연후에야 조정은 대책을 강구하였다. 조정은 서울에 있는 모든 외국인 의사들을 망라하는 방역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에비슨을 그 위원장으로 위촉해서 콜레라와 맞서도록 하였다. 당시 세간에는 쥐 귀신이 몸 안으로 침투해서 콜레라가 발병한다는 미신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방역대책위원들은 얼마 전 뉴욕시 위생국에서 발간한 방역규칙을 한글과 한자로 번역해서 전국 각지에 배포하였다. (하략)>


4) 동아일보/이완용이 실려간 본집은 저동 집


이재명 의사의 동지 이동수가 햇수로 열여섯 해 만에 1924년 10월 체포됐다.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는 현장목격자의 목격담까지 실어가며 이재명 의사 의거를 되짚어본다. 목격자는 '지금 영락정 총독부 상품진열관이 이완용의 집'이었다고 말한다.

 

영락정(永樂町)은 지금의 저동 을지로 등의 일부, 저동 1가 남대문세무서 자리에 이완용의 집이었던 영락정 1정목 조선총독부 상품진열관이 있었다. 상품진열관은 경술국치 후 이완용이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이 되던 해, 1912년 이전해 들어간다.

 

<지명변천 저동(苧洞), 강점기 전 저동→강점기 영락정(永樂町)→강점기 후 저동>

 

<(연월일 1912-11-03, 출전 朝鮮總督府官報 1912.10.29) 朝鮮總督府 商品陳列館을 京城府 永樂町 1丁目에 이전하고 공중의 관람에 供하다. (1922년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도 열렸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일제강점기/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1권/1912년 11월 3일 朝鮮總督府 商品陳列館을 京城府 永…)>

 

△동아일보 1924년 11월 13일 자 2면 5~9단 상자 중 7~9단∥문전은 아연 수라장 순검은 날뛰고 사람은 쫓기고, 눈 위에 기절한 이 총리의 모양, 당시 광경을 목도한 김영섭 씨 담(談), 이재명이가 이완용을 찌른 후에 즉시 그 현장의 참담한 광경과 혼잡한 경계를 목도한 시내 동대문 밖에 사는 김영섭 씨는 옛 기억이 새로운 듯이 아래와 같이 말하더라. 귀지에 보도되는 이동수 사건을 보고 옛 기억이 새로워집니다. 잘 기억되지는 않습니다만은 열대여섯 살 되는 때인 듯싶습니다. 그때에 나는 선린상업학교에 다니던 때인데 점심을 먹으러 명동에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오고자 학교 문을 나서니 순검이 막 달려오고 사람들이 이리 쫓기고 저리 뛰는 등 무슨 난리나 난 것 같습디다. 이것을 본 나는 무슨 구경거리나 난 것 같아서 단바람(댓바람)에 뛰어가 보니 허~연 눈 위에 붉은 피가 시뻘겋게 깔렸고 순검들은 시커멓게 둘러서서 한도를 빼어 번득거리며 몇 사람인지 자세히 생각은 안 납니다만은 피가 줄줄 흐르는 사람 이하 몇 사람을 포승으로 얽어매어 놓았습디다. 그 후에 알아보니 잡힌 사람이 이재명이었고 이완용이 이 사람에게 찔리웠습디다. 지금 영락정 총독부 상품진열관이 이완용의 집이었는데 그때는 찔리운 곳에서부터 그 집 앞까지 순검이 죽 늘어섰습디다.∥이미지 출처: NAVER 뉴스 라이브러리(뷰어)

 

<1909년 당시 선린상업학교는 명동성당 근처 지금의 명동 2가 25번지에, 이완용의 본집은 의거 현장에서 직선거리 약 100여m쯤 지금의 저동 1가 1-2번지에 있었다.>

 

<함께 보기: ☞동아일보 1924년 10월 20일 자 2면 4단∥日韓合倂 前 李完用의 刺客 李東秀 열여섯 해 만에 평양에서 잡혀∥일한합병 당시의 공로자인 이완용 후(작)의 신변에는 항상 자객이 따라다녔던 것은…∥출처: NAVER 뉴스 라이브러리(뷰어)>

 

<함께 보기: ☞시대일보 1924년 10월 13일 자 1면 5단∥李完用 侯를 暗殺하려던 李在明의 連累인 듯, 평양 서에 잡혀 경성에 조회∥【평양】 지난 팔일 평남 경찰부에서는 평양경찰서와 협력 하에 대 활동을 개시한 결과 모처에서 어떤 중대 범인 한 명을 체포…∥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5) 황성신문/차부(인력거꾼) 박원문은 경호원

 

박원문은 본시 이완용의 친사위 홍운표의 차부였는데, 체격이 건장하여 이완용의 차부와 서로 바꿨다고 한다. 이로 보아 박원문은 이완용의 전용인력거를 끄는 한편 경호원 노릇까지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원문은 상환되고서 며칠 안 돼 죽었다.

 

이재명 의사 판결문의 <사실 및 이유>에도 <…피고 李在明은 갑자기 길 왼쪽에서 뛰어 나와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단도로 인력거 위에 앉아 있던 李完用의 왼쪽 어깨 갑골 안쪽 윗부분을 찔러…그가 차에서 내려 도망하는 것을 추적하여 뒤쪽에서 그의 오른쪽 등 뒤 제11 늑골 견갑선 부분을 찔러…그리고 (그에게) 달려들어 살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순간, 호위순사와 車夫 등이 저지하여…피고 李在明은 앞에서 말한 프랑스 교회 앞에서 李完用을 살해하려고 했을 때, 그의 車夫 朴元文이 李完用을 구하기 위하여 그 흉행을 막으려 했으므로 朴元文을 죽여 그 방해를 배제하려고…>라고 돼 있다. 창졸간에 당해버렸지만 뒤늦게라도 '이 총리대신 각하'를 구하려고 덤벼드는 경호원의 몸짓이 여실하다. 적어도 필자의 눈엔 그렇게 보인다.

 

우연히 이완용을 태운 차부였다면, 무지하고 가련한 노동자에 불과했다면 눈앞에 벌어지는 칼부림에 혼비백산, 도망치기에 바빴을 것이다. 길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달려들어 인력거 뒤에 올라타 총보다는 훨씬 손에 익은 비수로 1차로 왼쪽 어깨를 찍은 다음, 굴러떨어져 뒹구는 이완용을 2차로 덮쳐 난자한 다음에야, 어마지두에 바라보기만 하던 박원문과 호위순사-경호원들,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을 터이고 바싹 뒤에 덮쳐드는 박원문은 날파람 뒤차기 한 방쯤, 이 의사 곧 포위되고 난투가 벌어지고 적의 칼에 쓰러지고, 갖고 있던 권총은 꺼낼 틈도 없었을 터이다. 그리고 박원문을 먼저 난도질했다면 이완용은 아마도, 칼에 맞지 않고 호위순사-경호원들 쪽으로 도망칠 시간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및 이유>로 유추해보면 그렇다.

 

△황성신문 1909년 12월 24일 자 2면 3단∥健壯之故(건장지고, 건장한 사람이 죽었다) 李 總相 遭難 時에 被死한 朴元文은 本是 總相 親婿 洪運杓 氏의 車夫라는데 此人이 健壯하다 하여 李 總相의 車夫와 '相換한지가 纔 ○日(서로 바꾼 지 겨우 三일? 七일?)'에 被死하였다더라. (總理=首相, 總相)∥이완용이 조난당할 때 죽은 박원문은 본시 이완용의 친사위 홍운표의 차부였는데 이 사람의 체격이 건장하여 이완용의 차부와 서로 바꿨고 바꾼 지 며칠 안 돼 죽었다는 내용이다. 당연히 가마보다는 인력거가 훨씬 빠르고, 차부의 체격이 건장하다고 해서 특출난 빠르기까지 보장하진 않겠지만, 어쨌거나 빠르기에 더하여 체격이 건장한 전용차부라면, 무엇보다 경호가 우선이었을 터이다. 박원문은 경호원, 그것도 핵심요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원문정보 신문류)

 

<즉사했다고 알려진 박원문의 죽음, 이게 또 뭔가 좀 미심쩍어 보인다. 피습 직후엔 둘 다 아직 살아있었으나 '총리대신'에게만 매달리느라 포기한 탓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도 의문이다. 이재명 의사 재판기록 이재명의 공판 융희 4년(1910년) 5월 13일 제1일 오전 기록 일부를 보면, 박원문의 죽음에 대한 재판장 질문에 이재명 의사는 '그것은 전혀 모르는 일이다. 내가 그를 찔렀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이완용의 집에 포박당해 끌려갔을 때 문 앞에서 어떤 여인 둘이 펄펄 뛰며 통곡하기에 내가 혹 박원문도 찔렀나 하고 잠깐 생각해봤을 뿐이다.'라고 답변한다. 되우 격렬한 난투였다면 호위순사 누군가의 과실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적들은 의거 바로 다음날, 난데없이 이 의사를 증거로 삼는다며 이완용의 집에 데려가 펄펄 뛰며 통곡하는 여자 둘을 보여주고 가물대는 이완용을 대면케 했다. 의심스러운 일이다. 이완용은 이 의사와 대면한 뒤 상오 12시에 입원했다고 전해진다. 대한의원이었다. (사실 죽다 살아난 이완용조차 이재명 의사를 극률에 처함이 불필요한즉 그저 방송함이 무방하다고 했다. 전 법부대신 조중응은 지금 무슨 말이냐며 난리를 쳤고 모 법관은 명예만 낚으려고 하는 혐의가 있다고도 했다. 1910년 3월 중순의 일이다. 3부 중반부에서 좀 더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다.)>

 

<추고: 이완용은 당시 어디론가 행차할 때면 (아마도 행차 거리 및 피습 우려 지역 등의 경우에 따라) 경호원을 앞뒤로 각 1명 또는 각 2명을 세웠다고 한다. 이 의사 의거 당시엔 각 1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동성당이 저동 집에서 워낙 가까웠고 또 곳곳에 한일 양국 무장 경찰이 깔려있어 안심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국역 경성부사 2권에서 호위순사 즉 경호원 둘의 이름을 알아냈다. 일본 순사 궁무손태랑(宮武孫太郎/미야타케마고타로), 그리고 한국 순사 이한철(李漢哲)이었다.>

 

<NAVER 뉴스 라이브러리(동아일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통감부문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문화복덕방(서울지명사전) 등을 검색하여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요약하여 정리했다. (검색어: 이완용의 저택, 이완용 이동수, 영락정, 저동, 옥동, 기타)>

 

2011.10.11(화)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