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먼저 1905년 12월, 리버사이드 동포 한 명이 자전거로 철로를 지나다 전차에 치여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전차회사는 즉시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으나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고 사건담당자는 자초지종을 일본영사에게 보고하려 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으므로 재외 한국인 보호는 일본영사가 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안창호는 좌시하지 않았다. 관계기관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이 사건은 물론 앞으로도 한인사건은 모두 공립협회 총회장한테 보고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정직과 성실을 강조하는 생활지도 계몽운동 등을 펼치면서 상부상조 외 자선사업도 하는 공립협회의 위상과 더불어 늘 앞장서 모범을 보이는 안창호에 대한 신용이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사회에도 매우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리버사이드 오렌지농장에서 노동하는 안창호(1912년)∥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어: 리버사이드 안창호)
다음으로 1906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이른바 '상항대진재'가 발생했다. 공립협회 공립관은 전소했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동포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러나 본국에선 일본영사의 보고라 하여 '80명 부상 중에 24명이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이때 일본영사가 한인보호책임이랍시고 공립협회로 구휼금을 보내려 했다. 그러나 공립협회는 '우리는 굶어 죽을지언정 일본영사 간섭은 절대 받지 않겠다'며 단호히 거절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지켰고 그 결과 공립협회 위상과 신뢰는 더욱 높아졌다.
공립협회는 미주지역 및 본국 동포들이 자신들도 넉넉지 않은 가운데서 십시일반 보내온 성금과 광무황제가 보내온 별도의 구휼금을 재난당한 동포들에게 공립협회 회원이든 아니든 재해를 입은 정도와 생활형편 등에 따라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협회는 각국이 지원한 이재민구호사업과 피해복구공사에도 동포들을 선도해 이후 미 당국의 묵인하에 명실상부 대표적 한인 자치기관, 영사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광무황제 또한 일제의 강제로 퇴위할 때까지는 자금지원을 계속해 주었다.
△공립협회 창립회원∥앞줄 왼쪽부터-송석준 이강(이정래) 안창호/임준기 정재관∥이미지 출처: 도산 안창호 온라인 기념관(전시관-청년 시절과 신민회 활동)
통탄할 일 하나는 일본영사 구휼금 거절 직후 문경호 회원이 일본영사와 몰래 접촉 구제를 빙자해 돈과 쌀, 장 등을 받아 챙긴 사건이다. 상항미미교회 목사였던 그는 목사 자격을 의심받고 있던 차에 사달을 일으켜 분노한 교인들이 축출하고 말았다.
문경호는 깜짝 놀란 동포들의 질문에 교회를 위해 돈을 가져왔고 신문사 차리려고 써버렸다고 둘러대고는 대동보국회 전신 대동교육회 창립자 방사겸에게 동포들이 무서웠단 말을 남기고 처자식까지 버리고 도망쳐 방사겸이 교회 일을 보기도 했다.
<문경호 처음에는 미순교회 즉 장로교회 목사였으며, 교회를 주관하는 존슨 목사 등으로부터 교회를 맡길 수 없다고 하는 통고를 받은 후, 교우 7명의 노동주선 일로 전명운 의사에게 구타까지 당하고, 미미교회 즉 감리교회로 옮겨간 지 불과 한 달 새의 사건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공립신보 검색어 문경호☜)>
△샌프란시스코 한국인 집단 거주지의 오늘날의 모습∥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어: 상항 집단 거주지)
이처럼 상항 한인 친목회를 확대 개편하여 창립한 북미 한인 공립협회가 미주지역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여기저기 난립한 단체들의 통합이 더욱 빨라져 그 첫 결실이 국민회이며 국민회는 또 대한인국민회로 이어지게 된다.
△대한인국민회 본부 앞에서(1916년경)∥왼쪽부터-양주은 정영도(정남수) 백일규 안창호∥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
이재명, 결단하다
그리하여 수길은, 아니 재명은 공립협회에서 많은 것을 깨우쳤다. 폭넓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해박한 지식 또한 갖추게 되었다. 임원급은 아니었으나 그에 못지않은 활약으로 동포들은 갈수록 그를 주목했고, 범상치 않게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를 일러, <용모(容貌)가 장려(壯麗)하고 미목(眉目)이 청수(淸秀)하며 안광(眼光)이 형형(炯炯)하고 이상(理想)과 지력(智力)이 명투(明透)한 사람>이라 했다. 그렇게 눈을 떴고, 신념이 강해졌고, 민족적 포부가 대단했다.
(계속)
참고:
일본영사를 통한 구휼금 거절로 살펴본 세 가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강탈된 상황에서 공립협회가 일본영사의 간섭을 거절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낸 경위를 조사하면서 새로운 내막을 알게 되었다. 일본영사 구휼금은 실제론 우리 정부가 보내온 돈, 그러나 실상 온전한 우리 정부의 결정은 아니었다. 대일본 국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무황제가 보내온 별도의 구휼금은 과연 무엇인가를 조사하다 뜻밖에도 공립협회 창립회원 정재관이 사실은 광무황제 직속 비밀정보기관 요원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를 요약해 올린다.
#1. 대한제국의 국고를 좌지우지하던 일제 통감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는 한국 병탄 기초작업으로 자국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와 <통감부 운용비>로 사용하면서 우리 정부에 강제로 상환을 맡겼다. 1907년 2월 현재 강제차관 대일본 국가부채는 <1,300여만 원>에 달했으며 이는 1906년도의 <대한제국 1년 국가 예산>과 거의 맞먹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이렇듯 외교권 강탈에 이어 상환이 원천 봉쇄된 <악성 고금리 강제차관>으로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켜버린 일제는 국채를 빌미로 대한제국의 국고는 물론 황실재산까지 좌지우지, 1907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등이 <국권회복>을 기치로 제안하여 시작된 거국적인 <국채보상운동>마저 흉계를 꾸며 좌절시키고 만다.
마침내 경술국치, 일제는 1910년 12월 <국채보상금처리회>가 보관하던 9만여 원과 대한매일신보 내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보관하던 4만 2천여 원을 강제로 이관시켜 강탈해가고 말았다.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 국외추방과 양기탁 제거를 함께 노린 이른바 <국채보상금소비사건(베델·양기탁사건)>까지 조작했던 일제였다.
베델과 양기탁은 혐의는 벗었지만, 사건을 조작한 일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베델은 심장병에 폐결핵이 겹쳐 1909년 5월 타계하고 말았다.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동포를 구하시오-베델의 유언)
#2. 일본영사를 통한 한국정부의 구휼금은 일제의 꼼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구휼금 검색으로 총 293건 중 편년자료(35) 조선왕조실록(26)의 1번 <1 탁지부에서 제기한 여러 가지 비용을 지출할 것을 비준하다 1906-05-31 (고종 43년) 원문>을 찾아보면 <桑港居留本國民罹災救恤金四千圓(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재해 입은 본국 백성 구휼금 4,000원)>이 있다.
고종·순종실록은 일제가 기록, 오류와 왜곡이 지나쳐 상당히 미심쩍긴 하지만 우리 정부에서(의정부) 탁지부의 건의로 논의한 끝에 광무황제의 재가를 받았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실 황제의 재가는 형식상 요건, 구휼금은 일제가 좌지우지하던 대한제국 돈으로 <재외 한국인 보호 대내외 과시>를 시도한 <일제의 꼼수>였다.
공립협회는 한국정부에서 구휼금을 보내는데 통감부로 말미암아 일본영사를 통해 나눠주게 한다는 대한매일신보 기사를 접하자 일본인 간섭을 거절하기로 의정하고(拒日人干涉) 1906년 6월 24일 총회장 송석준과 서기 정재관 명의로 일본영사에게 통고문을 보냈으며, 관련 내용을 공립신보(1906년 6월 30일 자 2~3면)에 실었다.
우리 정부가 명령하더라도 거역한 죄는 달게 받을지언정 일본영사의 보호는 받지 않겠다고도 했으며, 감격한 황제는 선교사를 통해 별도의 구휼금을 보내 주었다.
#3. 정재관의 비공개 신분과 광무황제 비자금의 내력
공립협회 창립회원 정재관은 광무황제의 시종무관 출신으로, 1902년 6월에 설치된 통신사로 가장한 황제 직속의 비밀정보기관 제국익문사(帝國益聞社) 61명 요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정재관은 (황제가 기대를 걸었던 독립협회 회원이던) 안창호와 함께 도미했으며(1902년 9월), 협회를 자주 찾은 헐버트는 <황제의 밀사>였다.
익문사 요원들의 활동자금은 주권회복에 사용할 목적으로 1903년~1906년 상하이 도이체방크에 예치한 100만 마르크(500억 원) 이상의 황제의 비자금(내탕금/개인재산) 일부가 쓰인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지진 피해동포 구휼금을 비롯한 공립협회 자금지원은 물론, 헤이그 특사 파견에도 황제의 비자금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예치된 비자금 절반은 일제가 1908년 (한 궁중관리의 정보누설로) 국채를 빌미로 환수, 강탈해가고 말았다. 일제가 몰랐던 나머지 50만 마르크는 정당한 사절에게만 내주기로 서울주재 독일공사 잘데른이 배려하여 강탈되지 않았으며, 광무황제는 1909년 (사절로) 헐버트를 보내 찾으려 했으나 은행 측이 거절, 오늘에 이른다.
정재관은 장인환 전명운 양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에 깊이 관여하고 (이후 연해주로 건너가 이강 등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처단을 지원하기도 했다.
<출처: Daum EBS 지식-한일강제병합 100년 특별기획-제1부 제국의 꿈 & 제2부 제국의 전쟁/연합뉴스-고종 독일 비자금 100만…/베를린리포트-고종 통치 비자금 250억 원 도이체…/KBS 역사스페셜-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꿈 (주권회복에 쓰일 내탕금을 찾아오라…마지막 밀명)/Daum 검색-황제의 비자금 100만 마르크/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디지털 안산문화대전-국채보상/국채보상운동기념관/Daum 검색-국채보상금 1,300만 원>
함께 보기:
공립협회의 구휼금 분배와 헤이그 특사 경비 광무황제 비자금에 관하여
공훈전자사료관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등에서 관련 기사를 분석하고 일본인 학자가 본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등을 압축, 정리했다.
#1. 뉴욕 선교부의 브라운 목사를 통해서 보내온 광무황제의 구휼금 1,900달러는 낙글린 목사, 미주지역의 동포 성금 및 대한매일신보사가 보내온 본국 동포 성금은 드류 목사 등이 직접 분배하게 조처하고, 재난을 당한 동포들로 하여금 재해 입은 정도와 주소 등을 미리 알려오게 하여 구휼금 분배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담보했다.
그러한 가운데 협회를 위한 기부금도 답지, 오클랜드로 잠시 이주했던 공립회관이 1년 뒤에는 다시 돌아왔고, 석판인쇄였던 공립신보도 활판인쇄로 바꿀 수 있었다.
#2. 광무황제는 특사단 경비로 20만 원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특사단 일행은 해삼위에서 (정순만 등의 도움으로) 1만 8천 원을 모금해 경비를 댔었다. 하사금이 미국인 실업가 손을 거치면서 지연된 때문이란 설이 있으며, 전달 시점은 이위종이 헤이그에서 부친 이범진의 급한 연락으로 러시아에 며칠 다녀왔던 때로 추정된다.
황제의 비자금의 일부 30만 원을 예치했던 해삼위 청국은행 이용익 계좌에서 하사하려 했다는 설도 있다. (이용익은 1907년 2월 의문사로 생을 마감/김현토 살해설)
2012.04.10(화)
수오몽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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