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09]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4. 15. 16:02

(9회)

 

공립협회의 궁극적인 목표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이후엔 더욱 확산, 적게는 10여 명부터 많게는 3,0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조직돼 본격적인 대일본 전쟁을 시작했다.

 

그렇게 전국이 들끓었다. 늑약을 막지 못한 욕됨에 대국민 사죄하고(유서)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등이 있어 의병전쟁은 확산일로, 처음엔 주로 양반 유생들이 중심이었으나 갈수록 평민 의병장이 더 많아졌으며 군대해산 후에는 군인들도 합세했다.

 

1904년 4월 창립된 공립협회도 궁극적인 목표는 본국의 자주독립이었고 그에 대한 현실적 최종 방략은 독립전쟁 외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효과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독립군기지로는 본국과 가까운 연해주지역이 최적지로 떠올랐다.

 

공립신보까지 창간, 동포들을 일깨워 하나 되게 하면서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나갔다. 갑자기 밀어닥친 대지진 피해를 슬기롭게 이겨내고부터는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됐고, 미국 각지에 반일운동이 일어나고 미·일 전쟁설까지 퍼져 크게 고무되었다.

 

그런 가운데 국내 계몽주의자 일부는 그저 허울로만 남아있는 대한제국 국호 아래 태연자약 민권운동만을 외치면서 의병을 일러 폭도로까지 규정, '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를 내세워 호도하는 일제의 침탈에 동조해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에 협회는 폭도란 도적을 말하고 의병은 군사의 칭호이니 다만 군비가 없어 맨손 대적하는 애국의사면서 폭도라 하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군비확장 병력보충을 설파, 의병전쟁을 전면적인 독립전쟁 국민전쟁으로 북돋우려 했었다.

 


△의병장 강무경(姜武景/武京 1878~1910/일명 강현수)∥강무경은 필묵상(筆墨商) 평민이다. 을사늑약 직후 심남일(본명 심수택)과 협의, 의병을 모집하여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에 합류했다. 이후 기삼연 등이 순국하자 강무경은 흩어진 부대를 수습, 심남일을 통수로 추대하고 자신은 전군장으로 200여 명을 이끌었고 전라남도 일대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상대는 일본육군 2,260명에 해군수뢰정대 4척이 동원된 남한폭도토벌대, 잠시 전열을 가다듬던 도중 일제가 융희황제를 겁박하여 1909년 7월 의병해산 조칙을 내리자 부대를 일시 해산하고 심남일 등과 함께 화순 풍치 바위굴에 은신해있다가 동년 10월 피체, 1910년 교수형(일부 자료 총살) 순국했다.∥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

 


△1909년 일본군 남한폭도토벌대에 맞서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 항일의병장들의 모습∥뒷줄 왼쪽부터-황두일(黃杜一) 김원국(金元局) 양진여(梁鎭汝) 심남일(沈南一) 조규문(曺圭文) 안계홍(安桂洪) 김병철(金丙喆) 강사문(姜士文) 박사화(朴士化) 나성화(羅聖化)/송병운(宋丙雲) 오성술(吳成述) 이강산(李江山) 모천년(牟千年) 강무경(姜武京) 이영준(李永俊)/계 16명∥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어: 강무경, 심남일, 강무경 심남일)

 

미·일 전쟁설의 배경

 

1776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이후로 영토확장을 계속해오던 미국의 팽창정책은 1898년 그 절정에 이른다. 하와이 제도를 병합한 후, 태평양을 지배하던 스페인과 (쿠바 문제 등으로 쿠바와 필리핀에서)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이로써 식민지였던 미국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등을 병합하게 됐고 식민지를 거느린 강대국으로 세계사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태평양지역 패권을 차지하게 되면서, 동시에 일본의 '팽창'에 대한 구체적인 견제도 시작했다.

 

이미 1897년부터 유사시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검토하기 시작했던 미국은 러일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일본을 자국 안보 위협세력으로 보게 됐으며 급기야는 잠재적인 전쟁 상대국으로 지목, 이른바 <전쟁계획 오렌지>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된 배경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전쟁종식을 명분으로 한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강화조약(1905.09.05 포츠머스조약)을 맺은 후, 미국에 약속했던 만주지역의 문호 개방을 돌연 취소하고 폐쇄 정책 선언으로 급선회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면 자국에도 이익이라고 판단한 미국의 사전 동의에,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와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를 <상호 양해하는 각서>까지 주고받긴 했지만(1905.07.29 가쓰라-태프트 밀약) 만주지역에서 손해가 크다는 판단에서다.

 

그리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 학생 입학금지 및 일본인 노동자 배척운동 같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처음 일기 시작한 반일운동이 미 전역으로 확산케 되고 일본인 정탐꾼이 '군사지도'를 작성하다 발각되기도 하면서 미·일 간 전쟁설로 이어졌다.

 


△공립신보 1907년 9월 6일 자 1면 1단 논설미일전쟁이 한국에 기회…일본이 재작년 포스마 일아 강화담판에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씨의 저희(沮戱)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였다고 일본 전국인민이 미국에 대하여 악한…미일전쟁은 금년이 아니면 명년이오 명년 아니면 내명년이라…한국의 독립…만일 미일전쟁에 미국이 이기고 도와주기를 바라고 가만이 있으면 범을 보내고 사자를 맞는 것같이 일본의 노예를 면하나 미인(미국)의 노예가 되리니 의뢰할 마음을 아주 단절하고 분발자강하기를 힘쓸지어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

 

<제국주의 팽창주의 시대의 문명국(강대국) 간 식민지쟁탈 경쟁구도 속에 일제의 우리나라 국권침탈은 1924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결정적이었다. 위 논설의 끝 부분 '일본의 노예를 면하나 미국의 노예가 되리니'를 찬찬히 곱씹어보면 공립협회에선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 '밀약'에 대해 어느 정도는 감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필자 정재관이 사실은, 통신사로 가장한 광무황제 직속 비밀 정보기관 제국익문사 미주지역 요원이었음을 돌이켜보면, 더욱 그렇게 짐작된다.>

 

대한신민회와 안창호의 귀국

 

1907년 새해가 밝았다. 공립협회는 대지진 충격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러나 조국의 상황은 풍전등화, 멀리서나마 이곳 뜻있는 동포들의 마음은 조금도 편치 못했다. 1월 초 어느 날, 리버사이드 한 농가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계속)

 

2012.04.15(일)

수오몽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