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그리하여 우리는 2년 뒤 만국평화회의 측이 1907년 4월 8일 발송한 초청장을 받게 된다.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분통 터지는 일본의 온갖 불법행위를 만천하에 호소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터였다.
헐버트는 초청장 이전에 벌써 광무황제를 만나고 있었다. 또한, 상동교회 전도사 전덕기 외 여러 애국지사와도 만나고 있었다. 초청이야 여하간에,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과 기대를 걸고 '밀사'를 준비하던 차에 뜻밖에도 초청장까지 받게 된 것이다.
헐버트는 통감부의 감시망을 피해 다니며 주로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이동휘 이준 이회영 등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삼엄한 감시 속에 꼼짝할 수 없었던 광무황제는 모든 것을 이들에게 일임, 드디어 특사 세 사람에 수행원까지 선정됐다.
특사단 국외 호송 임무는 황제 특명으로 육군 대장 이능권(1864~1909) 등이 맡기로 했다. (강화 출신 이능권은 군대해산 후 강화도로 내려가 강화진위대를 의병부대로 재편성, 일본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고, 1908년 체포돼 1909년 순국했다.)
정사 이상설(충북 진천 1870.12.07~1917.03.02) 전 의정부 참찬, 만국공법 등 법률 연구 번역, 당시는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민족교육에 전념
부사 이준(함남 북청 1859.01.21~1907.07.14) 법관양성소 제1회 졸업,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 유학, 전 평리원 검사, 만국공법에 밝으며 당시는 국채보상연합회 회장
부사 이위종(서울 정동 1886.01.09~1917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사설 1920년설 외) 전 주러공사 이범진의 둘째 아들로 7개국어 능통, 당시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체류
수행원 이동녕(충남 천원 1869.02.17~1940.03.13/상해 임시정부 요인) 과거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관직을 거치진 않았고 당시는 이상설 등과 함께 서전서숙 설립 운영
수행원 헐버트(버몬트주 뉴헤이번 1863.01.26~1949.08.05 서울 청량리 위생병원) 선교사, 을사늑약 후 광무황제 특사로 루스벨트 접촉 시도, 황제의 최측근 중 1인
이준 등 일행은 예정보다 좀 늦은 4월 22일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합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위종 합류, 이렇게 꾸려진 대한제국의 특사단은 베를린을 거쳐 개최일이 훌쩍 지난 6월 25일 개최지 헤이그에 도착했다.
<촌각을 다투는 절박함에도 늦게 도착한 이유는 경비조달(모금), 알선요청을 위한 러시아황제 접촉 및 공고사 등 인쇄차 베를린 체류 등의 복합적 상황으로 보인다.>
회의는 15일부터 열리고 있었고, 우리 특사 세 사람은 회의장 안엔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러시아가 어느새 태도를 바꿔버렸고, 중립국인 네덜란드마저 그에 동조해 한국특사 입장불가, 우리의 특사 파견을 사전에 감지한 일본 측 공작 때문이었다.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강점을 인정해주면 일본 또한 러시아의 북만주·외몽골지역 이권을 인정하겠는 일본 측 제안으로 러일 양국은 1907년 제1차 협약을 체결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진행 모습/빈넨호프 왕궁 기사 홀 내부∥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
처음엔 한국은 외교권이 없으므로 입장불가, 즉각 반론을 펴자 황제특사 신임장의 소지 여부를 따졌고, 신임장을 들이밀자 위조라고 주장하여 우리 정부에 조회까지 했다. 답전은 <황제, 특사 보낸 일 없음>, 이미 이완용 역적내각으로 바뀌어있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신임장이 휴짓조각이 돼버리매 길거리 외교에 매달리는 수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동 중 번역하고 인쇄한 성명서 공고사(控告詞)와 일제 자행 불법행위 관련 문서는 각국 대표단에 개별 접촉 전달하고 길모퉁이에서 연설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회의 개최 장소/빈넨호프 왕궁 기사 홀 외부∥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역사정보 검색)
참담했다. 온 힘을 다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열사 이준 공은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고 말았다. 고국에선 더욱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험 많고 교활한 한국통감 이토와 매국 역적 이완용, 특사 파견을 빌미로 황제를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했다.
(계속)
참고1:
제2차 만국평화회의(1907.06.15~10.18) 한국 초청 관련 기사
당시 한국특사 3인의 숙소였던 헤이그 현지 융 호텔을 인수하여 1995년 이준 열사 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을 설립한 이기항 송창주 부부의 공저 '아! 이준 열사(공옥출판사, 이기항 송창주 2007)'에 의하면 당시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러일전쟁으로 1905년에서 1906년으로 연기, 러시아가 종전 후 1905년 9월 25일 발송한 초청 서한의 47개 초청국 명단엔 한국이 12번째로 포함됐으나 회의는 1907년으로 재차 연기, 이후 러시아로부터 초청국 명단을 전달받은 네덜란드가 1907년 4월 9일 발송한 동년 6월 15일 개최 통보 서한은 45개국에만 보내졌었고, 이때 한국은 제외됐다고 한다. 그러나 공립신보 1907년 당시 기사는 청국 차이나일보를 인용한 대한매일신보 영문판을 재인용,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측이 (1907년) 4월 8일 각국에 '청첩'을 발송했는데 한국에도 보내졌다고 하여 명단에 포함됐음을 전한다.
△공립신보 1907년 6월 7일 자 3면 1단~2단 별보∥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연속간행물/검색어: 惟一大機, 유일대기)
惟一大機 본국 서울서 발간하는 대한매일 영자보를 거한즉 한국과 해아문제 아래 기재하기를, 지나일보를 거한즉 4월 10일 론돈 전에 운하였으되 하란국 해아부 만국평화회에서 4월 8일에 각국에 청첩을 발송하였는데 남미 각국과 한국에도 보내었다 하니 한국이 열강과 같이 청첩목록에 든 것은 뜻하지 못하였던 바여니와 아직까지도 세계 각국이 한국을 독립국으로 인허하는 것이라. 독립하든 한국을 전단(專斷)하고 2천만 인구를 압제하는 일본이 이 소식을 들으면 놀래고 시기하리로다.
일본의 교활한 계책과 불법의 행위로 신조약을 성립하였다 하나 세계가 보고 아는 바에 불쌍한 한국 백성을 압제하며 한국을 저의 속지로 정코자 하여 동양에 뭇 사람을 유인하여 가지고 세계를 벙어리 만들고저 하는지라. 그러나 한국이 금번 만국평화회에 열강과 같이 청첩하는 목록에 든 것을 보니 태세(態勢) 각국에서도 양심이 일어나서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처판(處辦)코저 하는 목적을 깨달음이로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것과 영국이 애급에 대함과 비교하면 같은 듯하나 판이한 것이 영국은 애급에 내란과 외모(外侮)를 막아달래는 청첩을(요청을) 받았고 또 애급과 합력하여 애급의 진보를 힘쓰고, 일본과 같이 한국에 대한 정책과 인민을 노예로 학대함은 없으며, 또 1905년 11월 17일에 낙가모리의 병탄(倂呑)하는 정략대로 늑약(勒約)한 일을 행함과 다나가의 한국 전래하는 보화 송도 옥탑을 도적해간 일과 한국에 강개한 애국당을 일본으로 잡아간 일 같은 것은 영국이 애급을 다살리는(다스리는) 사기(事記)에서 찾아볼 수 없도다.
미국 포즈머쓰에서 일아담판 시에 일본이 한국에 권리를 누리기로(배타적 지배권) 허하였다 할 터이나 어찌 한국을 저의 속지와 같이 하며 한국인민을 저의 노예와 같이 학대하며 세상을 속여 저의 땅을 만들게 함이리오. 한국이 해아 평화회에 참석하여 각국 대표자 앞에 가는 것은 신령 앞에 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지라 그 회에서 토론할 것을 미리 작정하였슨즉 한국문제로 토론이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본이 한국에서 불법행위 하는 것을 세계에 광포할 좋은 기회는 있도다 하였더라.
때여 때여 참하늘이 주신 큰 기회로다. 일본이 밖으로는 한국이 아직 독립할 자격이 없는고로 우리 보호 아래 두었노라 세계에 공포하고 안으로는 야심을 품어 병력으로 백성을 진압하며 휼계(譎計)로 정부를 꼬여 충신 지사를 살해하고 신조약을 늑삭(勒削)하였으니 만국에 공법이 판연(判然)하고 세계에 공리(公理)가 자재(自在)한 때에 어찌 한 사람의 손으로 천하의 눈을 가리리오. 이럼으로 세계 만국이 일본의 이같은 불법 행동을 아는지라 이번 평화회에 한국으로 하여금 분통한 사연을 신설(伸雪)하라고 열강국과 같이 통첩하였으니 때여 때여 좋은 때로다.
모수와 가부이 같은 영웅을 보내어 회석에 한번 참례하여 배에 가득한 혈성(血誠)으로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 일본의 무도 불법한 수십 년 역사를 설명하여 만국 대사의 심목을 한번 놀래면 국권을 지고 돌아올지라. 그러나 이같이 큰 뜻으로 활동하는 자 없으니 이것이 제일 통곡하고 눈물 흘릴 곳이로다. 노예 되기를 당상(堂上) 여기는 야만정부는 가이 책할 것 없거니와 우리 국민 중 애국지사는 이 큰 기회를 잃지 말지어다. <모수와 가부이: 삼한시대 마한 54국 중 모수국의 두 인물로 추정>
<보화 송도(개성) 옥탑을~: 1907년 1월 황태자 순종 가례식에 축하사절로 방한한 일본 궁내부대신 다나카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일본군을 동원해 약탈해간 사건을 말한다. 헐버트는 이 사건을 재팬 크로니클과 재팬 메일, 그리고 뉴욕 포스트 등에 기고했으며, 특히 한국특사 3인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헤이그에 갔을 때는 부사 이위종이 국제기자협회 한국특사 초청연설회에서 한국의 호소를 열변한 다음날인 7월 10일, 추가로 이 사건을 비롯한 일본의 각종 불법행위를 폭로했다고 전한다.>
참고2:
길거리 외교, 길모퉁이 연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직후부터 곧바로 시작된 한국특사 3인의 활동은 7월 9일 밤 절정에 이르게 된다. 각국 기자들의 한국특사 취재는 만국평화회의보가 선도, 기사는 만국평화회의보 6월 30일 자부터 시작된다. 같은 신문 7월 5일 자엔 기획취재로 보이는 유려한 문장의 심층 기사가 실렸고, 이어서 7월 9일 밤엔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인 스테드의 주선으로 국제기자협회 한국특사 초청연설회가 열렸으며, 이위종의 열변 '한국의 호소'에 감동한 각국 기자들은 결의문까지 채택하게 된다. 결정적 형세를 뒤바꾸진 못했지만 이나마 성과라도 헐버트와 스테드의 사전 교섭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 회에 한국의 호소 요약문을 소개한 데 이어 대한제국의 성명서 '공고사'와 이위종 심층취재기사 '축제 때의 해골'을 소개한다.
#1. 길거리 외교, 대한제국의 성명서 공고사(控告詞)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6월 30일 자에 실린 대한제국의 성명서 공고사(控告詞)∥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헤이그 현지 이준 열사 기념관 헤이그 특사 당시 자료
http://www.yijunpeacemuseum.org/04_hague/data.php
Home > 헤이그 특사 > 헤이그 특사 당시 자료 > 평화회의보(1907년 6월 30일 자)
<평화회의보 1907년 6월 30일 자>
왜 대한제국을 제외시키는가?/헤이그에서 한국대표들의 항의
1884년 모든 강대국들에 의해 독립이 보장, 승인된 대한제국은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공식 신임에 의해 파견된 세 명의 대표가 헤이그에 왔으며, 이는 그들이 강제로 된 노예 상태의 처지를 다른 민족 대표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온 세계에 알리고자 함이다. 이 대표들이 1907년 6월 27일 자로 평화회의 회원국들에게 보낸 성명서를 아래에 싣는다.
헤이그, 1907. 6. 27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에 의해 헤이그 평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그리고 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Petersburg) 대한제국공사관 참서관(서기관) 이위종은 존경하는 각하 제위들께 우리나라의 독립이 1884년 모든 강대국들에 의해 보장, 승인되었음을 주지시켜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의 독립은 현재까지도 귀 국가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습니다.
하오나 1905년 11월 17일 (당시 의정부 참찬이었던) 이상설은 국제법(만국공법)을 완전히 무시한 채 무력에 의해, 바로 오늘날까지도 우리 각 국가 간에 존재해 오고 있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하고자 했던 일본의 음모를 목격했습니다. 본인들은 이러한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 격렬한 위협은 물론 국가의 법률과 권리들을 침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인들의 소행을 각하 제위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더욱 명료히 하기 위해 아래 세 가지 경우로 나누어 진술 드리고자 합니다.
1.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승낙 없이 행동을 취했다.
2.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하여 무장병력을 사용했다.
3.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법률과 관습을 무시한 채 행동했다.
각하 제위께서는 공명정대함으로 위에 언급한 세 가지 항목이 국제협약에 명백히 위반되었는지 여부를 판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립국가인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와 다른 국가들 간에 유지되어왔던 우호적 외교관계를 파괴시키고, 극동지역의 평화를 끊임없이 위협하도록 방임할 수 있겠습니까?
본인들은 황제 폐하로부터 파견된 (정당한) 대한제국의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한히 통탄스럽습니다.
우리는 이 서신과 함께 우리가 떠나오던 날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취해진 모든 수단과 자행된 행위들을 요약하여 첨부하오니, 우리 조국을 위하여 지극히 중대한 이 문제에 관대한 관심을 기울여주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전권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각하 제위들의 요청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과 모든 국가 간의 외교관계가 대한제국 자신의 의지로서가 아니라 일본에 의한 우리의 권리침탈로 인하여 단절되었으므로 우리는 각하 제위들께 우리가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며 여기서 일본인들의 수단과 방법을 폭로함으로써 우리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도록 관대한 중재를 허용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먼저 감사드리오며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이상설 서명, 이준 서명, 이위종 서명
<헤이그 현지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는 이 성명서를 국내에서 말하는 공고사보다는 헤이그에서의 '대한 독립 선언문'이라고 말한다. 한편 성명서는 베를린에서 미리 인쇄하고 서명과 날짜 등은 '각국 대표단에 전달하면서' 써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2. 기자회견형식의 길모퉁이 연설/이위종 취재기사 축제 때의 해골
헤이그 현지 이준 열사 기념관 헤이그 특사 당시 자료
http://www.yijunpeacemuseum.org/04_hague/data.php
Home > 헤이그 특사 > 헤이그 특사 당시 자료 > 평화회의보(1907년 7월 5일 자)
<평화회의보 1907년 7월 5일 자>
축제 때의 해골/대한제국 이위종과의 회견
이집트인에게는 잔칫상에 해골 하나를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다. 그 목적은 회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허무를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영원불멸한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헤이그 회담은 이와 같은 비망록을 소유하는 특권을 갖게 된다. 오늘 바로 이 자리, 즉 드 리더잘(De Ridderzaal, 기사의 집, 제2차 만국평화회의 장소)의 닫혀있는 문 앞에 앉아있는 대한제국의 이위종은 몸소 그 옛날 이집트 해골의 현대판이 되고 있음을 스스로 절감하고 있다.
이위종은 학식이 깊고, 수개국어를 말하며, 철저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충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늙은 멤피스의 흉측스런 몰골이 회식자들의 폐부에 냉혹한 공포를 던져주기 위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위종은 열정적인 신념으로부터 관대한 착각으로 빠져들어 기정사실화된 것을 비웃고 있다. 그는 운명이 조약에 서명한 것을 조롱하는 의문부호이다. 특히 그는 평화회의의 문턱에서 방황하면서 빈정대는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즉 부정의 영혼인 것이다.
기자: (나는 이위종에게 질문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십니까? 왜 딱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 모임의 평온을 깨뜨리십니까?
이: (이위종은 대답했다.) 나는 흔히 제단이 헤이그에 있다고 말하는, 법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신을 혹시라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먼 나라에서 왔습니다.
기자: 드 마르땅(de Martens)씨가 1899년 메종 드 부아(Maison de Bois, 숲 속의 집, 제1차 만국평화회의 장소)에서 이 제단을 찾았습니다.
이: 1899년! 그때부터 법의 신께서는 무명의 신이 되셨군요. 도대체 이 방 안에서 대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기자: 그들은 전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보장하기 위한 조약들을 체결할 것입니다.
이: (조소 어린 웃음과 함께) 조약들이요! 조약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난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 대한제국이 이 회의에서 제외되었습니까? 조약들이란 바로 위반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자: 하지만 보십시오. 1905년 11월 17일 조약에 의해…
이: (말을 끊으며) 여기 이 대표들이 조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까?
기자: 각국의 참여를 비준해야 하는 그들 군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은 한에서는 그렇습니다.
이: 아!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1905년 조약이란 조약이 아니군요. 그것은 우리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대한제국 외부대신과 체결한 하나의 협약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서명된 서류는 결코 비준된 적이 없습니다. 결국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 효력도 없는 것입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 조약은 무효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불법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서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이번 회의에서 제외되었단 말입니다.
기자: 도대체 왕자께선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까?
이: 우리는 헤이그에 있는 법과 정의의 신의 제단에 호소하고 이 조약이 국제법상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판별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도대체 국제중재재판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우리가 항의해야 하며, 어디서 이 같은 침탈행위를 유죄선고 받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기자: 하지만 이 조약이 취소되었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대한제국이 스스로의 외교권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늘 일본의 수중에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 안타깝습니다. 당신은 조약들이 일본만큼 힘이 있는 어느 강대국에 의해 합법적으로 비준되었다 할지라도 이들 조약의 효력을 믿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1904년 조약으로, 일본이 대한제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했다는 사실과 일본이 우리 황제 폐하의 신변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기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하지만이라뇨? (강력히 되받았다.) 독립 군주를 자택에 감금해두고서 신변을 보호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식민상태로 몰아넣고서 우리의 독립을 존중한다고 했습니다. 대한제국의 전체성(全體性)은 일본이 한국을 분할해서 점차적으로 정복하지 않고 단번에 삼켜버렸기 때문에 유지되었을 뿐입니다.
기자: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그렇다면 이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이군요. 여기 헤이그에조차도! 당신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려는 것이로군요. 결국 가증스럽게 당한 치욕을 회복할 길은 없고, 정당한 조약이 불법적으로 위반된 사실에 대한 한 민족의 항의가 무시되어질 수 있으며, 또 한 나라의 독립은 그것의 국제적인 보장 여부와 관계없이 침탈당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자: 당신은 일본이 강대국임을 잊고 계십니다.
이: 그렇다면 당신들이 말하는 법의 신이란 유령일 뿐이며, 정의를 존중한다는 것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당신들의 기독교란 한낱 위선에 불과합니다. 왜 대한제국이 희생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대한제국이 약자이기 때문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정의, 권리, 그리고 법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왜 대포가 유일한 법이며 강대국들은 어떤 이유로도 처벌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지 않습니까?
기자: 하지만… (변명했다.)
이: (이위종은 참지 못하고 계속했다.) 싫습니다. 정의에 관해서 나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소위 말하는 평화주의자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에게서 당신 신앙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찾아보시오. 대한제국은 무장하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침략적 야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나라였습니다. 대한제국은 평화롭게 그리고 조용히 살아갈 것만을 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평화론자들이 전도하는 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이: (이위종은 여한 없이 계속했다.) 대한제국이 주변 강대국들에 대항해서 성공적으로 국토를 방어해내기에 어려운 나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대한제국은 구릉 하나하나가 천연요새를 이루는 산악국가이며, 이천만 우리 민족은 우리나라를 '극동의 스위스'처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국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국에 7천의 군사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여기 이 문 앞에 앉아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칼을 신뢰하는 대신에 법과 정의와 평화의 신에게 신뢰를 갖고 있는 모든 나라들을 기다리는 운명의 표시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정의를 갈망하며 드 리더잘(De Ridderzaal) 문 앞에 앉아있는 이위종을 홀로 남겨두고 나는 멀어져갔다. 분명 올라프(Olaf) 왕의 사가(saga) 메아리를 들은 듯했다.
「무력이 세계를 지배한다. 세계를 지배해왔다.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온유함은 연약한 것이다. 승리하는 것은 바로 무력이다.」
○올라프 왕의 사가: 중세 북유럽의 노르웨이 전설, 아이슬란드의 시인이자 역사가 스노리 스툴루손(1179~1241)의 걸작 헤임스크링라에 나오는 올라프 성왕 이야기
○1904년 조약: 주한공사 하야시곤스케와 내부대신 이지용 사이 강제조약, 1904년 러일전쟁 발발(2월 8일) 직후, 2월 23일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조일공수동맹)
○1905년 조약: 주한공사 하야시곤스케와 외부대신 박제순 사이 강제조약, 1905년 11월 17일(18일 새벽) 강제로 체결한 제2차 한일협상조약, 즉 을사늑약(乙巳勒約)
<기자는 이위종을 왕자로 호칭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이만저만한 사칭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위종 본인이 나는 왕자라고 말하고 다니진 않았다고 하며, (통역을 도맡았을 것으로 보이는 어린 나이의 이위종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헐버트가 사전에 스테드와 교섭할 때 세밀하게 소개했다고 추정되기도 한바) 이위종이 황족 신분임을 알게 된 기자가 먼저 예우한 것으로 보인다고도 전한다. 이위종은 세종대왕의 다섯째 왕자 광평대군의 직계 손이기도 하다. 한편 헤이그 현지 이준 열사 기념관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이위종을 인터뷰한 기자는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겸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인 윌리엄 T. 스테드(William T. Stead)로 보인다고 하며, 위 기사 '축제 때의 해골'은 당시 유럽 각국 교과서에도 실렸다고도 전한다.>
참고3:
이준 열사 서거에 관하여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한 연구가 상당하여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많았다. 하지만 엇갈리는 견해 또한 많아서 취사선택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특히 이준 열사 서거에 관해서는 더욱 그랬다. 심장마비설에 뺨에 난 종기설, 단독설(丹毒/연쇄상구균 등 감염), 식음전폐 아사설, 할복 자결설, 그리고 독극물 타살설까지 있었다.
이러한 설들을 검토하면서 필자는, 안창호 선생 의형제로 이재명 의사와도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제중원(세브란스) 출신 독립운동가 김필순이 일제에 의한 독극물 암살로 순국했던 사실 등을 떠올렸고, 열사 '독물 중독으로 며칠 간 식사를 전혀 못 했으며, 그러던 중 숙소 융 호텔에서 할복 자결'로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가] 자결을 암시한 이준 열사
이준 열사가 장도에 오르며 읊었던 칠언고시 3수를 먼저 소개한다.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에서 옮겨왔다. '시참(詩讖)'이라곤 하나 필자가 보기엔 만국평화회의 성격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미리 읊은 '절명시(絶命詩)'들로 보인다.
#1. 1907년 4월 18일 광무황제를 알현하고 물러나와 읊은 시
海牙密使一去後(해아밀사일거후) 唯何盃酒靑山哭(수하배주청산곡)
헤이그에 밀사로 한 번 가고 나면 어느 누가 술잔 부어 청산에 울어줄까
#2. 1907년 4월 22일 비밀리에 서울을 빠져나와 (철도편으로) 부산 도착, 4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행 배를 기다리며 북산(배산)에 올랐다가 읊은 시
風雪凍霜我死後(풍설동상아사후) 誰將美酒哭靑山(수장미주곡청산)
풍설동상에 나 죽은 뒤에 누가 장차 좋은 술로 청산에 울어줄까
#3. 1907년 5월 21일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기 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 동포들이 베풀어준 전별식에서, 춘추전국시대 연나라 자객 형가가 나중에 황제가 된 진나라 왕을 죽이러 가는 길에 연나라의 수도 연경에 흐르는 역수를 건너며 읊은 칠언고시 장사가(壯士歌)에 추와 일을 덧붙여 비장한 심경을 더욱 깊게 표현하여 읊은 시로 팔언 구성이나 칠고로 칠 수 있다.
秋風蕭蕭兮易水寒(추풍소소혜역수한) 壯士一去兮不復還(장사일거혜불부환)
쓸쓸한 바람 불어 역수도 차갑구나, 장사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으리
이렇듯 이준 열사는 이미 자결을 암시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열사는 다음 소개하는 오언율 한시를 즐겨 암송, 생사관(生死觀)이 뚜렸했었다고 전한다.
#4. 이준 열사의 생과 사에 관한 관점, 생사관을 알 수 있는 시
人死稱何死(인사칭하사) 人生稱何生(인생칭하생)
死而有不死(사이유불사) 生而有不生(생이유불생)
誤生不如死(오생불여사) 善死還永生(선사환영생)
生死皆在我(생사개재아) 須勉知死生(수면지사생)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어도 죽지 아니한 것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아니한 것이 있으니
그릇 살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고 잘 죽으면 도리어 영생을 얻게 될 터
생과 사가 다 내게 달려있으니 모름지기 죽고 사는 것을 힘써 알리로다
함께 보기
#1. 1907년 4월 22일 장도에 오르기 전 21일 밤, 안창호 이갑 이종호 이도재 서정순 헐버트 베델, 그리고 박 모 상궁 등 지사들이 베풀어준 전별식을 마친 다음 안창호 이갑 이종호 등 세 청년과 함께 자택으로 돌아와 읊은 칠언절구
雪晴雲散北風寒(설청운산북풍한) 楚水吳山道路難(초수오산도로난)
今夜與君酒盡醉(금야여군주진취) 明朝相憶路漫漫(명조상억로만만)
눈 개고 구름 개니 북풍도 차가운데 초수오산 가는 길이 몹시도 험하구나
오늘 밤은 그대들과 마음껏 취하련다, 아침을 생각하면 갈 길이 아득하다
#2. 안창호에게 써준 칠언절구
治邦無上順民情(치방무상순민정) 開發商工敎厚生(개발상공교후생)
大衆同歸恒産日(대중동귀항산일) 驅貧爲國四方平(구빈위국사방평)
나라를 다스림에 더없이 좋은 것은 민정을 거스르지 아니함이니
상업을 권장하고 공업을 일으키며 후생을 가르쳐서 윤택하게 하라
대중이 한가지로 힘을 한데 모아 서로 생업을 가지고 날마다 힘쓰면
가난을 물리쳐 나라를 위함이니 동서남북 온 나라가 평안하리로다
#3. 이갑에게 써준 오언절구
三月春風好(삼월춘풍호) 紅花處處家(홍화처처가)
庭前楊柳樹(정전양류수) 又有綠陰多(우유록음다)
삼월에 봄바람 좋을시고 이곳저곳 집마다 붉은 꽃 피었구나
뜰앞에 늘어진 버드나무도 잎이 우거져 녹음 또한 짙푸르다
#4. 이종호에게 써준 오언절구
四海寧無日(사해영무일) 一家何患憂(일가하환우)
平生吾輩事(평생오배사) 獨立由由求(독립유유구)
온 세상이 하루도 안녕치 못하거늘 어찌 한 집만을 근심할쏜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직분은 스스로 독립을 찾는 일뿐이로다
필자는 이 시들을 읽을 때마다 열사 떠나기 전날 밤의 정경을 그려보곤 한다. 열사 이준 공, 남은 하룻밤 조국의 미래를 짊어진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청년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세 사람 자택 초대, 술상 놓고 둘러앉아 #1을 읊고, 신민회 일로 분주한 안창호에겐 조국의 미래를 당부하며 #2, 착 가라앉아 울적한 이갑을 격려하면서는 #3, 또 그리고 가족을 염려해주는 이종호에겐 #4…,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 문서로 본 순국과 역사적 고증
최초보도: 1907년 7월 15일(월요일)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 화데란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차석대표 이준 씨가 어제(7월 14일 일요일)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죽었다.
백과사전: 드 흐로트 윈크레르 프린스 제7판(1966~1975)~제9판(2007 현재)
한국의 애국자 이준(1859~1907)은 1905년 이래 보호정책을 강요하는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1907년 대한제국 황제에 의하여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이 일본을 불쾌하지 않게 하려 했으므로, 이준은 평화회의에 참석이 거부되었고 그는 '자결'했다. 그의 시신은 헤이그에 묻혔다가 1965년(1963년의 오기) 한국 서울로 돌아갔다.
#1. 1907년 7월 15일 헤이그시청이 작성한 사망증명서
어찌 된 셈인지 사인은 기록되지 않았다. 만국평화회의보와 네덜란드 여러 신문은 열사 '뺨에 수술이 필요한 종기로' '종기 수술 후유증으로' 등의 추측 보도와 함께 이위종의 인터뷰,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겪고 있는 조국의 불행과 잔학한 모욕이 그를 더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의 애국심을 자극했습니다.' '세계인 앞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강렬히 보이고자…' 등을 싣고 있었으며,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스테드가 '한국인들은 피를 더 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기도 하여 사실상 '어떤 정황'을 짐작게 하고는 있었다. 당시 보도가 그랬고, 네덜란드는 (1907년 당시는 물론) 1960년대까지도 자살에 대한 보도가 금지돼 있었다고 한다.
#2. 내부적으로는 자결을 정설로 다루던 제국주의 일본
이준 열사 서거 이후, 당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던 미국의 젊은 서기관 덜레스는 한국의 독립문제가 본회의에 상정되지 않자 한국의 한 애국자가 자살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제2대 총통 원세개도 상나라의 절개를 지킨 백이와 숙제에 비견하면서 가슴을 갈라 피를 뿌려 진실한 마음을 보였으니 그 장한 절개에 온 세상이 놀랐다며 칭송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중국계 일본인 문명비평가 진순신 또한 평화라는 이름을 내걸고는 있었지만 몇몇 강대국이 약소국 침략을 서로 인정하기 위해 모인 회의나 마찬가지였고 이에 절망하여 자결했다고 '중국의 역사' 근현대 편에서 밝혔다고 한다. 무엇보다 더욱 유념해야 할 사안은 국내에 최초로 종기설을 퍼뜨린 일본이 내부적으로는 중국 광둥과 간도 주재 총영사가 본국에 보내는 극비보고서 기밀문건에 할복분사로 기록하거나 독립군 이용 장군을 자살한 이준의 장남으로 기록하는 등으로 열사의 자결을 정설로 다루고 있었단 사실이다. 당시 일본 역사가 아오야기난메(靑柳南冥) 역시 '조선사화와 사적'에서 할복 자결을 밝히고 있었다.
△열사 서거를 할복분사로 기록한 광둥주재 일본총영사의 보고서(1926년)∥이미지 출처: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홈▷헤이그 활동▷문서로 본 순국)
△을사늑약의 '정당성'과 헤이그 특사 파견의 '부당성'을 말하며 이준 열사 서거를 병사로 왜곡하고 조작하여 국내에 최초로 종기설을 퍼뜨린 한국정미정변사 표지와 판권∥표지에는 나라사키가쓰라소노(楢崎桂園) 저(著)로 돼 있으나 판권엔 저자(著者) 나라사키강이치(楢岐觀一)로 돼 있어 혼선을 일으킨다. 어쨌거나 저자 나라사키는 1907년 당시 오사카마이니치신문 경성지국 기자였으며, 원고작성은 열사 서거 직후 허겁지겁 불과 두 달 만에 끝냈고, 12월 20일 펴냈다. 열사 '종기를 앓고 있었고, 여독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고 한다.∥이미지 출처: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홈▷헤이그 활동▷병사설의 조작)∥<여독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사망에 이르렀다는 말을 뒤집어보면 (일제로 추정되는) '누군가의 과로사 위장 독살 시도'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다. 종기는 양념일 터이다.>
#3. 이상설의 일기 초록, 그리고 권업신문
만국평화회의보 1907년 7월 20일 자에 의하면 이위종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급히 돌아온 7월 18일 인터뷰에서 '종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당시 이상설이 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에서 중요한 내용만을 골라 뽑아놓은 초록, 이른바 '이상설의 일기초'를 이위종이 갖고 있었으며, 장지연이 해조신문 주필로 초빙돼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 이위종을 만나 이상설의 일기초 및 기타 사행문서와 증언 등을 견문하고 최초로 '이준전'을 지어 의열투쟁의 사적과 의의를 부각했다는 연구 등에 의하면 이준전에 '병사설'이 기록돼 있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이상설이 '이준 종기로 병사'를 말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오늘날엔 기본적인 사실(史實) 이준 열사 서거 날짜마저 7월 15일이라고 하면서 최초로 보도한 신문은 일본의 진서신문으로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이라고 보도했다고 소개하며,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보도에 대해서는 할복자살은 민족의 공분을 끌어내기 위한 허구로 결론짓고, 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조사한 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베델과 협의하여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술연구까지 나오게 된다. (연합뉴스 2007-06-23 이준 열사 할복자살의 진상은?)
이상설의 일기초 이위종 소장의 개연성은 있다. 이상설 이위종은 프랑스 영국 미국 등지를 순방하며 특사활동의 연장선에서 외교활동을 펼친 다음, 이상설은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르다 정재관과 함께 1909년에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고, 이위종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1908년 봄이면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의회 창설에 참여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이 '잠시 헤어지며' 무슨 이유로든 정사 이상설의 일기에서 부사 이위종이 초록을 뽑고 기타 사행문서 사본까지 따로 한 벌 갖고 다녔을 수는 있다. 그러다가 장지연을 만났을 때 장지연에게만 특별히 보여줬을 수도 있고 나아가 장지연이 일기초를 필사하여 갖고 있다가 이준전을 지었을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일성 이준 열사 기념사업회 자료에 의하면 일단 이위종이 이상설 일기초를 갖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고,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장지연 소장 필사(모필)본'의 일기 방식이 그 당시 일기 쓰는 방식과는 다르고, 이준 열사 부분을 제외하면 여정만을 짧게 기록하여 의문을 자아내고, 헐버트의 전기에 비추어 헐버트 관련 내용이 사뭇 다르고, 일본도 이미 파악하고 있던 내용만 들어있고, 필체가 특히 장지연의 필체와는 다르고, 무엇보다 (이위종은 물론) 이상설이 열사의 자결을 부정한 적이 없어 일기초는 위서라고 한다. 게다가 위암문고 전 이준전도 (열사의 '병사' 부분이 오류라고 생각해선지) 장지연 스스로 전 편을 엮으며 빼냈던 것이며, 장지연 사후 위암문고 편자가 다시 집어넣은 것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일기초의 위서에서조차 지조를 지킨 사람의 자결로도 해석이 가능한 '자정(自靖)'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자정(自靖): 의병장 의암 유인석은 국가 변란에 유림이 취할 행동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말했다. 첫째 거의소청(擧義掃淸) 의병을 일으켜 깨끗이 하거나(침략자를 쓸어버리거나) 둘째 거지수구(去之守舊) 멀리 떠나서 옛것을 지키고 따르거나(망명하여 훗날을 도모하거나) 셋째 자정수지(自靖遂志) 스스로 다스려 뜻을 지키거나(스스로 목숨을 끊거나)를 제시했다. 세 번째 처변 자정(自靖)은 자결의 의미로 쓰였다. 이 외에도 같은 의미로 자정치명(自靖致命) 자정수절(自靖守節) 수도자정(守道自靖) 망복자정(罔僕自靖) 등이 있으며, 또한 승려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원만 구족한 적멸, 즉 원적에도 자정을 넣어서 자정원적(自靖圓寂)이라 이르기도 한다.>
사인이 기록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지 경찰관 보고서 및 의사의 사망진단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져버렸고 사인이 기록되지 않은 헤이그시청이 작성한 사망증명서만 남아있다. 이준 열사 서거 당시 상황도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각국 기자단의 협회장 스테드의 일기엔 열사의 사인이 기록돼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취재기자로 승선했다 사망한 스테드의 일기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스테드의 후손은 할아버지 유품을 공개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이준 열사의 사인은 정녕 이대로 설로만 남아있을 것인가. 이제 '피를 토하며 죽었다'고 하여 일부 학자가 이준 열사 병사로 해석한 위암문고 전 이준전 '병사' 부분을 발췌하고,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토크 의병계열 인사들이 함께 설립하고 또 창간한 한인 동포 권업회의 기관지, '이상설 창간'의 권업신문의 열사 서거 관련 기사를 올린다.
1) 장지연의 위암문고 권지육(6권) 내집 전 이준전 발췌
한국사료총서 4집 韋庵文稿 > 韋庵文稿 卷之六 內集 > 傳 > 李儁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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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儁(이준)…海牙殉死(해아순사) 헤이그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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儁(준) 이준 열사, 知事不濟(지사부제) 일을 뜻대로 이루지 못하게 됨을 알게 되자 鬱悒噓唏(울읍허희) 걱정스러운 마음에 답답하여 한숨지었고, 憂憤成疾(우분성질) 근심스럽고 분하여 앓아누웠으며, 廢食累日(폐식누일) 여러 날 계속 음식 먹기를 그만두었다가, 嘔血而卒(구혈이졸) 피를 토하며 죽으니, 卽七月十四日也(즉칠월십사일야) 곧 7월 14일이었다. 그리고 臨歿時所言(임몰시소언) 죽음에 임하여 남긴 말이 있었으니 皆忿慨悲痛(개분개비통) 몹시 분하고 비통하다, 그러면서 涕淚汪汪(체루왕왕) 슬피 울며 크게 소리쳤고, 在傍者爲之哽咽(재방자위지경열) 곁에 있던 사람이 목이 메어 울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전문☜)>
2) 권업회 기관지 '이상설 창간'의 권업신문
△좌-권업신문 1912년 8월 29일(목요일) 러시아력 16일 제18호 1면(~2면 2단) 이날 是日∥우-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일요일) 러시아력 16일 제120호 1면 1단~4단 이준 공이 피 흘린 날∥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홈▷원문정보 신문류▷권업신문☜)
경술국치 3년째에 나라 잃어 애통함을 상징적 문학적 표현으로 구구절절이 애끓게 하다가 다시 이를 악물게 하는 기사에, 열사 이준 공이 서거한 지 8년째에 지난날을 돌이키며 추모하는 기사로, 그리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사실(史實)도 몇 들어있다.
a) 좌-권업신문 1912년 8월 29일 자 1면 1단~2면 1단 이날 是日(시일)
단군개국 사천이백사십오년 팔월 이십구일 이날은 어떠한 날이오. 사천년 역사가 끊어진 날이오.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날이오. 이천만 동포가 노예 된 날이오. 오백년 종사가 멸망한 날이오. 세계 만국에 절교(絶交) 된 날이오. 천지 일월이 무광한 날이오. 산천초목이 슬퍼한 날이오. 금수어별이 눈물 흘린 날이오. 충신열사의 피 흘린 날이오. 애국지사가 통곡한 날이오. 우리의 신성한 민족이 망한 날이오. 우리의 생명이 끊어진 날이오. 우리의 재산을 잃은 날이오. 우리의 자유를 빼앗긴 날이오. 우리의 신체가 죽은 날이오. 우리의 명계가 없는 날이오. 우리는 입이 있어도 말 못 할 날이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할 날이오. 손이 있어도 쓰지 못할 날이오. 발이 있어도 가지 못할 날이오. 우리의 조상은 땅속에서도 눈을 감지 못할 날이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도 희망 없는 날이오. 우리는 살고자 하여도 살 곳이 없는 날이오. 우리가 죽고자 한들 묻을 땅이 없는 날이오. 슬프다, 우리 사랑하는 동포여 이날 이날을 기억할 날이오. 지금 삼년 전 이날에 원수의 임군 목인가(목인이가) 사내정의를 우리 대한에 패송(파송)하여 수만 명 왜병을 방〃곡〃에 배치하고 매국적 이완용 송병준 등을 농락하여 합병조약을 체결한 날이오. 이날 이날은 저 조그마한 섬 중에 있던 하이족(鰕夷族)으로 벌거벗고 금수와 같이 행동하던 저 야만과 원수 되던 날이오. 이 민족 저 민족이 합하여 명색이 국가로 수천 년도 못된 저 무도한 왜국에게 우리 사천년 된 민족이 멸망 받은 날이오. 애통하다, 우리 동포여 이날 이날에 어떤 참혹한 형편을 당하였느뇨. 우리의 황실은 왜왕의 신첩(臣妾)이 되었고 우리의 민족은 왜인의 노복이 된 날이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보고 들을 지어다. 우리의 조국을 붙들고자 하다가 대마도에 가두어 만 리 고도에 원혼이 된 최면암(崔勉菴) 선생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나라 없어지는 날 방성대곡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한칼로 목을 질러 국은을 갚고자 한 민충정(閔忠正) 공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국권을 회복코자 하여 만국평화회에 가서 더운 피를 뿌려(1) 세계에 빛나게 한 이준(李儁) 씨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원수를 할빈정거장에서 단총 일발에 거꾸러트리고 여순구에서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 안중근(安重根) 씨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국록을 먹고 원수를 돕는 수지분(須知芬)을 상항정거장에 더러운 피를 뿌리게(2) 하고 지금 옥중에 있는 장인환(張仁煥) 씨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매국적을 한양 대도 상에서 형경의 비수가 한번 벗적한(버쩍한/번쩍한) 결과로 원수의 손에 원통한 혼이 된 이재명(李在明) 씨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후사를 부탁하고 재산을 분급하여 공익사업에 부치고 뻬델불그에서 자결한 이범진(李範晋)의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국가를 회복하며 원수를 멸망코자 하여 영웅 열사가 의병을 모집하고 각처에서 일어나 독립기를 드다(들다)가도 원수에게 도륙을 당하며 요행 망명 도주하여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와신상담하는 일도 이날이오. 우리 조국의 청년 학도는 창가 체조로 애국심을 분발하며 신체를 건전케 하다가도 원수의 손에서 징역 받는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청년이 해외로 나오다가 중로에서 원수의 손에 잡혀 방포 일성에 무주 고혼이 되는 일도 이날이오. 우리의 민족은 하나님이 사랑하므로 다 하나님 앞에 믿는 자녀가 되고자 하여도 저 원수는 세계의 공법을 무시하고 종교를 박멸하여 신자를 포박하고 암살인자(암살자) 음모사건이라 거짓말로 죄목을 만들어 공판하기 전에 옥중에서 죽이는 일도 이날이오. 우리 내지의 동포는 혼인잔치에도 세전이오. 생남하는 때에도 세전이오. 소와 말과 개까지라도 다 세전이오. 여러 가지 세전으로 우리 민족은 핏줄이 말라 살 수 없는 일도 이날이오. 슬프다, 우리 동포여 이날 이날에 여러 가지로 생각하면 우리의 허물인가, 원수의 죄악인가. 이것을 공판하여 불쌍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는 권능은 다만 지공 무사한 하늘에 계신 상제시라, 볼지어다. 원수의 나라는 점〃 쇠망한 형평(형편)에 빠지는 것도 이날이오. 마귀를 숭배하며 도덕을 무시하고 밤낮 사람 죽이는 재주만 가르치는 일도 이날이오. 외국~채가 수십억이 되어 보상할 방침이 없으므로 국가의 철로와 항구를 전당 잡힌 일도 이날이오. 부녀를 외국에 패송(파송)하여 매음(賣淫)으로 생활코자 하는 일도 이날이오. 저의 귀족들은 음란 사치가 극도에 달하여 평민은 살 수가 없으므로 사회주의자가 생긴 일도 이날이오. 저의 임군 목인 이하 황족을 폭발약으로 몰살케 하고 공화국을 설립코자 하려던 행덕(幸德) 등 수십 명이 죽은 일도 이날이오. 저의 정치의 부패와 인민의 불평은 날로 심한 일도 이날이라. 우리 동포여 이날 이날에 원수의 형편과 우리의 사정을 생각할 때에 슬픈 마음도 이날이오. 기쁜 생각도 이날이오. 낙심될 일도 이날이오. 희망될 일도 이날이오. 이순신(李舜臣) 씨의 철갑선으로 왜적을 함몰할 일도 이날이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외적을 격파할 일도 이날이오. 워싱턴(華盛頓)의 독립기를 들 일도 이날이오. 나폴레옹(拿巴崙)의 혁명을 폭동할 일도 이날이오. 우리 동포여 이날 이날에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뇌성벽력이 머리를 눌러도 굴치 말고 천병만마가 당전하여도 퇴보 말고 용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목적을 달할 날이오. 우리 동포여 잊지 못할 날이 이날이니, 이날이 지나고 그날이 당하며, 우리의 한숨은 변하여 웃음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쾌락이 될 이날을 잊지 말고, 금년 이날에도 이 생각이오, 명년 이날에도 이 생각이오, 십년 백년까지라도 이날에 이 생각을 잊지 말고, 우리 한반도를 사랑하는 동포들아, 우리가 신성한 민족이 아닌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몸을 바쳐 우리가 자나 깨나 사나 죽더라도 이날을 잊지 말고 우리가 이날이 우리의 기념할 날 되기까지 힘쓸지어다. 이날에 이 말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 형제자매에게 고하며 특별히 아·청 영지에 있는 우리 사랑하는 동포여, 이날에 이 생각으로 모세(摩西) 선지의 본을 받을 지어다. 이스라엘(以色列)민족 사십만을 애급에서 거느리고 가남 복지로 가던 이날이 되며 항우(項羽)가 강동자제 팔천으로 도망하던 이날이 될까. 이날이 그날이 될까. 그날이 이날이 될까. 이날. 이날=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이날 是日의 필자: 단재 신채호 연구가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장편의 자유시로 채운 위 무기명 논설 이날 是日은 '단재 신채호의 작품'이라 한다.
○형경~: 형경(荊卿)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왕을 죽이려고 했던 연나라 자객 형가(荊軻)의 이명으로 후세 사람이 높여 이르는 존칭이다. ([가] #3.의 '장사가' 참조)
○원수의 나라는 점점~: 19C 말에서 20C 초까지의 일제의 국내 상황을 단적으로 짚어준다. 일제의 한국 병탄은 국가 경제 침체 등 총체적 난국 타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민지 확보였으며, 아울러 오랜 숙원이던 '정한론(征韓論)'의 완성이었다.
<본문에 표시한 (1)과 (2)를 비교해 보자. 먼저 (2)를 보자. 스티븐스가 어디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 건물 앞에 배를 갈라 피를 뿌렸을까. '피격으로 죽었다'는 얘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1)도 이준 열사 '헤이그에서 자결하여 순국'일 뿐이다. 회의장 안에 배를 갈라 피를 뿌리거나 창자를 뿌렸단 얘긴 아니다. 그렇게도 왜곡이 일어나긴 했다. 하여, 이상설이 '이준 종기로 병사'를 말했다는 주장까지 나오게 된다.>
b) 우-권업신문 1914년 7월 19일 자 1면 1단~4단 이준 공이 피 흘린 날
세월이 뜻 없도다. 지난 十四일은 충렬사 이준 공이 하란 해아부에서 뜨거운 피를 흘린 지 제八년째 되는 날이로다. 아깝다. 충렬사의 뜨거운 피가 거저 식고 말았는가. 거룩한 그의 피가 우리 마음에 밤낮없이 고동은 하건만 무심한 우리들은 피를 흘려 그의 붉은 마음을 본받지 못한 ●●● 두어 줄 눈물로 기념도 한번 ●●이 못 한 까닭에 八년 동안에 잃은 것도 많았고 ●● 일도 많았고 또 이제 후에는 하란 공원에 임자 없는 충렬사의 백골까지, 찾아다가 장사할 곳이 없게 되었도다. 공은 어찌하여 이렇듯 정다운 세상을 개연히 버리셨는지 그 기념할 만한 사적을 말하여 보자. 단군 四천二백四십년에 이종호 씨가 임금의 사명을 봉승하여 그 조부 용익 공의 가진 뜻을 계속하여 아령 해삼위에 당도하여 공과 및 이상설 이위종 세 분을 국권 회복하자는 밀사로 하란 해아부에 파견한바 되어 만국 대표에게 공고사(控告辭)를 ●리니 그 사에 하였으되 「일찍 한국의 독립함은 一천八백八십四년에 각국이 다 공인한 바이오. 이 좌석에 당하신 귀국들도 또한 공인한 바이어늘 一천九백五년 십一월 십七일에 일인이 그 병력으로써 한국을 핍박하여 당●한 각국 ●에 교섭의 권리를 무단히 빼앗은지라. 그러므로 이제 일인의 교활한 수단과 및 우리의 법률 전권을 남●없● 파괴한 사실을 세 가지 조목에 나누어 말하노니, 一은 모든 정사를 일인이 우리나라 조정의 허락한바 없이 자기의 임의로 주장하며, 二는 일인이 군사 만한(많은) 세력을 믿고 우리나라를 반대하며, 三은 일인이 우리나라에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함이라. 귀 총통은 공리대로 판단하면 일인의 공법상에 위배됨을 넉〃히 알지며, 또 시험하여 묻노니 우리 한국이 임의(이미) 자주하는 처지에 어찌 일인으로 하여금 우리의 국제교섭을 차지하여 원동의 평화를 요란케 하리오. 그러나 일인이 오직 우리의 국제교섭권을 강탈하기 때문에 우리 위원 등이 대황제의 사명을 받자왔으되 본회석에 참예치 못하니 이는 우리의 원통한 바로소이다. 귀 총통은 이러한 사정을 낱〃이 살피소서. 한국이 국제교섭의 권리가 없는 것은 한국의 본뜻이 아니오, 다 일인이 압제한 연고라. 바라건대, 약한 자를 붙들어주사 우리로 하여금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인이 한국 내에서 여러 가지 잘못한 행위를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대저 일인이 한국에 대하여 행동이 무리한 것은 구미 열강의 본래 미워하던 바라. 이제 이 공고사를 받아본 후에 곧 우리 대황제에게 사신 보내신 여부를 전보로 물으니 이때는 한국독립을 가히 회복할 만한 좋은 기회라. 그런데 통신기관이 임의(이미) 일인의 차지한 바 되어 이등박문의 무리가 이 전보를 받아보고 이에 대황제를 위협하여 사신 보낸 일이 없다고 평화회에 답전하니 이 답전은 곧 이준 공으로 하여금 피 흘리는 원인이 되었더라. 슬프다, 이 세계에는 공법도 없고 정의도 없고 오● 강한 자의 권리만 있을 뿐이라. 그리하여 천지 간에 호소할 데 없는 깊은 원한을 그대로 품고 장사가 한 번 감이니 다시 올 길이 망연하였지만 대한에도 사람이 있는 것을 세계 열강에게 자랑하였으며 또 일인의 괴악한 행위를 광명한 백일하에 드러내었느니라. 공의 거룩한 죽음은 우리 역사의 꽃송이니라. 공의 꽃다운 이름은 우리 민족의 노래이니라. 공의 죽음을 기●● ●함으로 공의 이름을 사모치 못함으로 임금이 양위하였으며 군대가 해산하였으며 한·일이 합병하였으며 아·중 영지에 유리하는 도다. 생각건대, 이날을 당하여 이상설 씨의 소감이 우리보다 어떠하며 이위종 씨의 회포가 또한 우리보다 어떨런가. 우리 민족아, 이날을 기념하자. 기념하여라. 공의 보배로운 피는 봄에 이슬이니라. 여름에 비니라. 공의 빛난 정성은 밤에 별이니라, 낮에 태양이니라. 이렇게 기념한 결과로 언제나 반도에 가득한 비린 핏물을 우리의 더운 피로 말끔하게 씻어놓고 서울 장충단에 뚜렷이 모이어 二천만의 우리●● 한●●로 공의 의로운 영혼을 향하여 경배하며 二천만의 우리가 ● 한 몸같이 이상설 이위종 양 씨의 애국성을 찬미할는지 아느뇨. 시베리아 저 하늘에 서방으로 저 하란 공원을 향하여 통곡함을 말지 아니하노라. 이날에.∥이날에 느낌을 정미년 三월 경에 서울 동문 앞 탑골승방 다락문 위에서 고 충숙공 이용익 씨의 추도회를 열고 이때 이준 공은 추도사를 진술할새 공은 크게 낯빛을 변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가로대 「여러분, 우리나라를 사랑하며 동포를 위하여 일한 후에 한 나라에서 한 동향 사람의 추도회만 받지 말고 한번 세계 사람의 추도회를 받읍시다(자결 암시)」 하며 말●●● 그때 기자가 붓끝으로 쓸 적에 얼굴이 왈칵 붉었노라. 그해 七월을 당하여 대한문 앞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장안을 떨치더라. 그때야 이준 공이 해아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회복하기 운동하다가 뜻과 같지 못하매 칼로 배를 갈라(숙소 융 호텔에서 할복 추정) 세상을 떠났다고 온 장안 사람들이 떠드는 줄 알고 그때에 기자의 느낌이 아~ 공의 그 석 달 전 아무의 추도회에서 세계 사람의 추도회를 받으리라(자결 암시) 하던 말이 과연 참언이 되어 자기가 혼자 ●●하였다 하는 느낌이 ●●노라. 오늘은 공의 세상을 떠난 제八주년인데 그동안 아무 기회가 없는 고로 공의 마지막 한 말씀을 기록지 못하였다가 오늘날 마침 공의 얼굴과 비석을 그려내고 비석에 ●●●● 말씀 가져다 내 마음대로 쓰게 됨은 그 느낌은 기쁘고 때로…(끝줄 바로 앞 행간 속 마지막 한 줄, 원본판독불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
○장사가 한 번 감이니~: 이준 열사가 미리 읊은 절명시, [가] #3.의 '장사가' 참조
<이종호는 황제의 명으로, 1907년 2월 의문사로 생을 마감한 조부 이용익이 황제의 비자금 30만 원을 예치했던 '블라디보스토크 청국은행 이용익 계좌'에서 특사 경비 황제 하사금 20만 원을 찾으려고 동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행 측 거절로 손자 인출은 무산, 동포들 모금으로 최소 경비만 우선 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특사 경비 황제 하사금은 헐버트의 친구로 서울에서 전차 사업 등을 하던 콜브란 손을 거쳐, 부친 이범진의 급한 전보를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며칠 다니러 간 이위종한테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때 열사 이준 공이 자결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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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 서거의 새로운 가설
왜곡이나 조작 또는 설도 뭔가 '재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전혀 소설이라면 사람들은 금방 눈치를 채고 만다. 따라서 새롭게, '재료'에 대한 가설을 한번 세워봤다.
온갖 자료를 하나로 묶어 펼치면, '누군가' 피곤해하는 열사에게 '음료수'를 권했고 마시는 시늉만 한 덕분에 용케도 '과로사'는 피했으나 며칠 간 식사를 전혀 못 하게 됐으며, 한국의 독립문제가 본회의에 상정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예정된 다음 활동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여론에 호소하고 루스벨트 면담을 추진키로 하여 정지작업차 헐버트가 먼저 떠난 다음, 기왕의 심리적 고통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이 가중돼 극심한 '급성우울증'에 시달리다 기왕에 결심했던 자결을 떠올리게 됐고, 때마침 호텔에 혼자 있을 때 할복을 시도하나 워낙 기운이 없어 단번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매 얼굴을 긋고(얼굴에 난 종기 수술설), 목을 긋고(목에 난 종기 수술설), 크게 외치며 가슴까지 찌르고(심장마비설),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란 호텔직원들이 달려오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하여 온갖 설 난무…가 한눈에 보인다.
○할복 자결: 한국 방식은 칼을 복부 깊숙이 찔러넣거나 좌우로 갈라 (상태에 따라 피를 토하기도 하면서) 비교적 서서히 사망하게 되며 시간을 줄이려고 목 동맥을 끊기도 한다. 을사늑약 당시의 충정공 민영환이 대표적이다. 일본 무사들의 할복 방식은 복부를 천으로 감싸고 단검으로 좌우로 가르고 창자를 확실하게 끊기 위해 위로 밀어 올리면 고통을 줄여주려고 옆에 선 무사가 '목을 내리쳐 즉사'하게 된다.
○호텔에 열사 혼자였던 이유: 이위종은 아내가 위독하다는 부친 이범진의 전보를 받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며칠 가 있었다. 아내의 위독은 일종의 암호로 특사 경비 광무황제 하사금이 (서울에서 헐버트와 가까이 지내던 실업가 콜브란 손을 거치며 어찌 된 셈인지 전달 예정일을 훨씬 넘겨) 그제야 이범진에게 전달돼 수령차 갔던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이상설이 호텔을 잠시 비웠던 것은 예정된바 미국으로 먼저 떠나는 헐버트 배웅차 기차역쯤(어쩌면 암스테르담까지) 나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설이 숙소를 방문한 누군가에게 헤이그에 늦게 도착한 이유로 (경비모금 등을 시시콜콜 얘기할 순 없어 짐짓)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으로 좀 늦었노라 한 것으로 보이는 일본 측 자료를 비롯하여 각국 기자들이 누군가의 암살 위협에 대한 생각과 황제의 안위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등을 이위종에게 묻고 답한 1907년 9월 당시 기사를 포함한 온갖 자료를 하나로 묶어 풀어낸, 필자 나름 합리적 추론의 결과다.
<위 가설을 세우며 필자는 이준 열사의 서거는 '누군가의 과로사 위장 독살 시도 및 열사 본인의 할복 자결 시도의 종합적 상승 작용의 결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2012.04.24(화)
수오몽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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