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생지몽

[연재13] 대한의사 이재명군(부제: 공무도하 1909)

수오몽생 2012. 5. 1. 23:40

(13회)

 

김병록은 같은 로스앤젤레스지방 회원이다. 통상의 월례회는 물론 어떤 모임이든 꼬박꼬박 함께 참석하고 교회까지 함께 다닐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이긴 하지만 서로 늘 바쁜 탓인지 이렇게 서로의 집으로 찾아와 만나기는 또 매우 드문 일이다.

 

"뭐 하고 있어? 일도 안 나갔다며?"

 

김병록이 들어서는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재명이 불쑥 입을 열었다.

 

"형, 나 아무래도 귀국해야 할까 봐…"

"느닷없이 거 무슨 소리야? 앉으란 말도 없이."

"도저히 안 되겠어. 도대체 숨을 쉴 수 없어…"

"그러지 말고 일단 나가자. 저녁때도 다 됐고, 밥 먹으면서 얘기하자."

 

두 사람은 집 근처 동포가 운영하는 찬관(식당)에 마주 앉았다.

 

"너 그 손가락 개창(疥瘡/옴)은 좀 어떠냐?"
"아이, 형, 이런 게 뭐가 대수라고…다 나았어."

"평화회 소식에 돈까지 모아 보내고, 엊그저께까지만 해도 참, 달떴었는데…"
"내 말이! 이준 어르신은 자결! 통감이란 놈! 이완용이란 놈! 이놈들! 이놈들이 우리 대황제 폐하를 갈아치우고! 군대까지 해체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괴변이야, 어?"

 

가까운 동료를 앞에 두고 재명은 그만 잔뜩 흥분해버렸다.

 

"어허, 진정하고. 늘 조용하던 사람이 왜 이래, 목소리 좀 낮춰라."

"요 며칠 곰곰 생각해 봤는데, 나 아무래도 귀국해서 의병을 해야겠어."

 

김병록이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다. 얘기는 교회로 가서 하자. 좀 있다가 다들 모일 거야. 리버사이드에서 누가 오는 모양이야. 샌프란시스코 공동회 참석자 파악이겠지…"

 


△로스앤젤레스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와 대한인국민총회∥◎옛 주소: 웨스트 제퍼슨 블러바드 (W. Jefferson Blvd.) 1374번지와 1368번지 ◎현주소: 옛 주소와 동일∥교회는 1906년 5월 10일 공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었으며 1938년 5월 현재 위치에 건축되었다. 설립 이후 오늘날까지 예배당의 기본적 기능 외에도 친교시설로 활용되면서 로스앤젤레스 거주 한인들의 정신적 안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초창기 교역자로 방화중 전도사, 홍치범 목사 등이 있으며 공립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시절을 거치는 동안 로스앤젤레스지역 한인독립운동 거점 중 하나였다. 1938년도 건물이 아직도 남아있으며(위 사진 왼쪽) 현 교회는 1983년 신축됐다(위 사진 오른쪽).∥교회가 관리하는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은 교회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아래 사진).∥이미지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 독립운동의 역사/제59권 국외 항일유적지/제5장 미주지역/4. 로스앤젤레스지역)

 


△공립신보 1907년 8월 16일(금요일) 자 2면 2단 잡보 추도회설행∥해아부에 특파위원으로 갔다가 격분순사한 이준 씨와(7월 14일 자결순국) 애국혈성으로 자사한 정재홍 씨와(6월 30일 자결순국) 친위대장관으로 군대해방(해산) 할 때에 분사한 박성환 씨와(경성시위보병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일명 박성환, 8월 1일 자결순국) 기타 전망한 군인(남대문전투전몰해산군인)과 지사를 위하여 거 토요일(8월 10일) 하오 8시에 상항 공립협회에서 추도회를 설행하였는데 이준 씨의 사적은 최유섭 씨가 설명하고 정재홍 씨의 사적은 이정래(이강) 씨가 설명하고 박성환(박승환) 씨의 사적은 양주삼 씨가 설명하고 전망군인과 위국순사한 제씨의 사적은 임치정 씨가 설명하였는데 참석한 회원들도 각각 강개 비분한 말로 연설이 많았더라.∥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일람▷연속간행물▷공립신보)

 

이준 열사 자결 논란에 관한 단상
열사의 자결순국을 두고 일각에서는 1956~1962년에 이미 할복 자결이 아닌 분사로 정리됐고 또한 병사로 확인된 만큼 이제는 논란을 그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출처도 제대로 밝히지 않으면서 그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이 신채호 베델 두 사람과 협의, 열사의 분사를 할복 자결로 조작하여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고까지 주장하여 호도한다. 그러나 위 기사를 보면 이준 열사에게 격분순사 즉 몹시 분노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했고, '육혈포 권총으로 자기 배를 쏘았다가 병원에서 숨을 거둔' 정재홍 지사에게 자사라고 했으며, 또한 '칼로 배를 가르고 권총으로 마무리한' 박승환 참령에게 분사라고 했다. 격분순사의 줄임말로 보이는 분사가 저들의 주장대로 자결을 의미하는 낱말이 아니라면, 박승환 참령은 대체 어떻게 자결하여 순국했단 말일까. 열사 말고도 '민심을 격동케 한' 지사들의 자결은 많았었다. 열사의 자결을 '민족적 가공'으로 깎아내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정재홍 지사에 관하여

대한자강회 인천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던 정재홍은 이토히로부미 저격을 노리고 1907년 6월 30일 서울 북서 '농상소'에서 열린 '박영효 귀국 환영식'에 참석했으나 초청받은 이토히로부미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참석지 않아 저격에 실패하고,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 생욕사영가(生辱死榮歌) 추탁서(追托書) 등 유서를 남기고 육혈포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는 사상팔변가의 마지막 구절에 '한 사람 나만 죽어 전국이 감성(感省)하면 이 몸이 영화 되고 국가에 행복일세' 하고, 생욕사영가 네 번째 구절에선 '지사 열만 잘 죽으면 잃은 국권 되찾는다'고 하여 자신의 자결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4권)/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형태별 일람▷연속간행물▷공립신보 1907-08-09 정씨유서)/황상익 서울대 교수-을사늑약에 맞선 마지막 저항…정재홍의 자결(프레시안 2010-09-20)


경성시위대 의거 개요

군대해산이 시작된 1907년 8월 1일 오전, 서소문 안 경성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자 격분한 장병들이 무장을 갖추고 남대문 안 일본군 제51연대 제3대대와 전투를 벌였다. 제1연대 제1대대가 봉기하자 곧바로 제2연대 제1대대도 합류했으며 시가전 현장은 지금의 남대문로4가 45 대한상공회의소 일대였다. 오전 8시를 지나며 시작된 '남대문전투'는 10시 50분쯤 제2연대 병영이 점령당하고 11시 40분쯤 제1연대 병영마저 점령당하면서 종료됐다. (고종시대사 속음청사 매천야록 등 우리 측 자료와 '남대문 부근 전투 상보' 등 일본 측 자료가 서로 달라 정확하진 않지만, 종합하면 대체로) 일본군은 장교 포함 30여 명이 전사하고 70여 명 부상, 한국군은 장교 포함 10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 부상, 500여 명이 포로가 됐다고 한다.∥출처: 국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서울 정동권역 12번 13번)/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14권)


이준 열사 등의 추도회를 겸한 총회 공동회가 끝났다(8월 10일). 항일의병전쟁이 각지각처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독립전쟁 최적기다. 여러모로 지원방안을 논의한 끝에 신민회지원 및 연해주지회 설립차 이강(이정래)을 파견했다(8월 27일 귀국).

 

이재명은 도적의 수괴 이토히로부미와 매국적 이완용을 제거함으로써 국면전환에 큰 도움이 되리라고 판단하여 이 두 사람을 최우선 과제로 처단할 것을 제안하면서 가장 적임자는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자원하여 파견됐다(10월 9일 귀국).

 

또한, 이재명의 거사와 거사를 위한 자금지원 외 협회와 국내 단체 간 통신연락 및 공립협회 국내 교두보 대한매일신보 지원 등을 목적으로 임치정 이교담 김병록 등 다수가 속속 파견됐다. 이외에도 여러 동포가 각자의 소명 따라 귀국을 단행했다.

 

광무군(光武軍/대한제국군) 출신 인사를 만난 이재명, 그리고 귀국

 

재명은 샌프란시스코 공동회에 갔다 온 후 조금 부족한 여비마련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뛰었다. 임무도 임무지만 집에 갈 때는 뭐라도 좀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낮에는 오렌지농장 사탕무농장 등지에서 일하고 또 저녁때는 늦게까지, 백인여관이나 동포찬관에서 설거지 등등 허드렛일을 했다.

 

(계속)

 

참고:
이재명 의사의 동지 김병록에 관하여

 

김병록의 행적을 일부 짚어본다. 이재명 의사보다 먼저 귀국하려 했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나중에 귀국했다(날짜 불명). 다음 가)의 7, 나), 다)로 비추어 그렇다.

 

또한,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소속이면서도 리버사이드를 오가며 활동했다. 일자리 때문으로 짐작이 간다. 어찌 됐든 이 의사 못지않게 협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연속간행물)

 

1 공립신보 1906-11-22 무 04 02 羅省會報告(나성회보고) 원문이미지
<羅省會報告 로스앤젤레스지방…새로 입회한 회원15인…김병록이재명…☜>

 

2 공립신보 1907-02-20 무 04 02 河邊會報告(하변회보고) 원문이미지
<河邊會報告 리버사이드지방회 부회장 김영일…경찰 김기만 씨 보고에 본회〃원 조성필과 로스앤젤레스 회원 김병록 양인이 쟁투한 일이 있다…벌금 50전…☜>

 

3 공립신보 1907-05-10 무 01 02 羅城會報告(나성회보고) 원문이미지
<羅城會報告 로스앤젤레스지방 회장 장원근 씨의 통상보고를 거한즉 회원 김병록 씨는 리버사이드회로 의거하였고(依據하다/기대어 의지하다)…☜>

 

4 공립신보 1907-05-31 무 01 02 羅城會報告(나성회보고) 원문이미지
<羅城會報告 로스앤젤레스지방 회장 장원근 씨의 보고를 거한즉 4월 5일 연환회(공립협회 창립 2주년 기념행사)에 총회를 위하여 연보한 제씨 열명(列名)과 금 수효는(금액은) 여좌라…김병록 5원…이재명 2원 50전…(2~3단)☜>

 

5 공립신보 1907-06-21 무 02 03 國魂喚起趣旨書(국혼환기취지서) 원문이미지
<리버사이드…국혼환기취지서/대저 억만 권 쌓인 서적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고 천만 마디 하는 말이 한 번 행하는 것만 같지 못한지라…해아부(헤이그) 만국평화회…본 지방에 있는 한인들이 각각 공립신보를 위하여김병록 15원…☜>

 

6 공립신보 1907-07-12 무 01 02 河邊會報告(하변회보고) 원문이미지
<河邊會報告 리버사이드지방회 대리회장 김영일 씨의 보고를 거한즉 상항(샌프란시스코)회원 김산석 씨와 나성(로스앤젤레스)회원 이두성 김병록 양 씨가 보(譜? 本?=나성? 하변?) 지방으로 이래(移來)하였고 본 지방회원 박방화 씨는 출회…☜>

 

7 공립신보 1907-08-02 무 03 01 환영 겸 전별 원문이미지


△공립신보 1907년 8월 2일 자 3면 1단환영 겸 전별 상항지방회에서 거 토요일(7월 27일) 석에 쏠력서 온 회원 최유섭 신영구 양 씨를 위하여 환영회와 환국차로 내도한 회원 박창도 김병록 김창원 조성필 제씨를 위하여 전별회를 겸행하였는데 빈객 제씨의 강개한 연설이 있은 후 이교담 이정래(이명 이필래 및 이강/8월 27일 귀국) 양 씨의 회사(回辭/답사/答辭)가 있었다더라.∥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검색어: 김병록▷연속간행물(19)▷공립신보7▷7번☜>

 

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템(독립유공자 공훈자료)

 

<1 김병록/김병록(金丙錄) 1893(오류)~미상/일찍이 1902~1905년 하와이 이민 시 미국으로 노동 이민 갔다가 그곳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이재명(李在明)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 후 공립협회에서 매국적 처단을 결의하고 1907년 10월 이재명을 파견할 때 그도 뒤따라 귀국하였다.…☜>

 

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독립운동사자료집11: 의열투쟁사자료집)

 

<7. 김병록의 심문/재판장이 물어보기를 이재명은 미국에서 서로 알게 되었는가? 김병록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러하다. 또 묻기를 이재명이 귀국 후에 피고도 역시 귀국하였는데 귀국 전에 이재명과 더불어 이완용·이용구를 살해할 음모가 있었다는데 그러한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런 일은 없었다. 또 묻기를 이런 일을 들어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피고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국사에 관한 일을 분개하여 서로 상의한 일이 있었는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런 일은 없었다.…☜>

 

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2)

 

<2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2 105人事件公判始末書Ⅱ. 二. 高等法院篇(國漢文) 還送關係書類 국역/還送關係書類…一. 李在明 모살 미수 사건(總理大臣李完用謀殺未遂事件)判決…無職 피고 李在明(이재명) 10월 16일생, 24세(1886년생)…賣藥商 피고 金丙錄(김병록) 10월 16일생, 26세(1884년생)…明治 43년(1910년) 5월 18일 京城地方裁判所 刑事部 재판장 판사 塚原友太郞 판사 谷多喜磨 판사 鄭求昌 明治 43년 5월 판결 선고 재판소 서기 岩山德兵衛 위 등본임.…☜>

 

<이재명 의사와 동지들의 나이가 자료마다 각기 다르게 나온다. 이를 두고 필자는 오랜 시간 심사숙고, 동아일보 '1925년' 1월 11일 자 '교살된 이재명의 유족 조사'의 이 의사의 계부 73세 홀아비 임옥여 씨 인터뷰 기사 중 '지금으로부터 삼십 팔구 년 전에 이모(李某/이름은 미상)의 피를 받아'에서 이 의사의 생년 1925-39(굳이 38년 몇 개월까지 따져야 할 필요가 없을 때 우린 보통 38~9년이라 하고 39년에 무게를 두므로 39)=1886년을 유추한 뒤 이와 맞아떨어지는 1910-1886=24세, 즉 1910년 5월 18일 현재 10월 16일생 24세, 만 나이로 추정되는 판결문에 따르기로 했다. 일제는 1902년경부터 서구 법률의 예를 따라 세는나이를 없애고 만 나이를 썼다고 한다.>

 

2012.05.01(화)

수오몽생